소설리스트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42)화 (142/161)

142화

나는 카르시온을 방에서 내보낸 후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멍한 기분이었다.

지금껏 나를 옥죄여 왔던 렉스를 처리했다는 게 믿겨 지지 않았다.

그것도 내 손으로 처리하지 않았는가.

혼자 있으려니 덜컥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내가 처리한 건 렉스가 아니라 환상이었던 건 아닐까.

또 내 앞에 렉스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카르시온을 방에서 내보내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녹음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가 창문을 툭툭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홱 돌리자 도비가 시야에 담긴다.

“도비!”

평소보다 더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창을 열어 도비가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창문을 열자마자 도비가 내게 달려든다.

그 때문에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도톰한 러그 위에 넘어져 아프지는 않았다.

도비가 쓰러진 내 위에서 혀로 나를 마구 핥았다. 꼬리가 마구 흔들린다.

도비 덕분에 긴장이 풀리고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하하, 도비 그만해.”

도비는 한참이나 핥은 후에야 내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나를 핥을 때 잠깐 다른 곳에 놓았던 것을 다시 물고 내 앞에 가져왔다.

“그게 뭐야?”

내 물음에 도비가 기다렸다는 듯 문 것을 앞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도비가 가져갔던 내 양말이었다.

그것을 보자 현실감이 돌아오며 기분이 고양되었다.

그래, 렉스는 이제 끝이 났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해.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양말을 손에 꼭 쥔 채 도비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렉스 베고니아라는 족쇄에서 풀려나, 비로소 자유가 된 것을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 * *

늦은 밤, 카르시온이 내 방에 찾아왔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방문이었다. 그와 매일 밤 함께 잠을 청하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

문을 열자 눈가를 발갛게 붉힌 카르시온이 보였다.

할 말이 많을 텐데도,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옅게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카르시온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내게 다가왔다.

“녹음 구는 다 들었어?”

“……응.”

“음. 잘했어.”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올리자 결 좋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간질간질한 기분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 이건 알고 있었지?”

카르시온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 것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제국에 유행 중인 몬스테라와 비슷한 증상의 병이었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같은 병이었을지도 몰라.”

운이 좋지 않았지.

“살리고 싶어서 뭐든 해 봤는데 결국은 돌아가셨어.”

“……리엔.”

카르시온이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서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일렁이는 눈동자에, 나까지 속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카르시온의 품 안으로 안겨 들어갔다.

단단한 품 안에 있으려니 다시금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렇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이모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모 부부는 정말 좋은 분이셔.”

차라리 나를 싫어하셨더라면 버리고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네가 탐탁지 않아하는 루카도 나를 반겨 주었고. 다만, 에르한만은 내가 백작가의 일원이 되는 게 싫었던 모양이야.”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그것까지는 괜찮아. 나는 실제로 이모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었으니까.”

“……네가 괜찮지 않았다는 걸 알아, 리엔.”

카르시온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이모 부부의 자녀가, 에르한의 가족이 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에르한과 가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렉스를 만나게 됐어. 첫 만남 이후 그는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지.”

그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렉스 베고니아. 그는 내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어.”

과연 그가 했던 것은 사랑이 맞을까.

“에르한은 그런 렉스의 밑에서 나를 감시하고 그에게 내 일과를 전달했지.”

내 말에 카르시온이 몸을 움찔했다. 나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어때, 너랑 비슷한 점이 많지?”

웃으며 말한 나와 달리, 아카데미에 다닐 때 자신이 했던 짓을 떠올린 듯 그가 괴로운 음성을 토해내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하지만 너랑은 다르지. 렉스는 내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강제하려 했고, 내게 손을 올렸으니까.”

직접적으로 손을 올렸다고 고백하는 말에 카르시온이 헛숨을 들이켰다.

나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속으로 분노를 삭이고 있는 듯 그의 몸이 잘게 떨렸다.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카온. 너를 믿고 있었지만 말하기까지 용기가 필요했어.”

입에 담는 것조차 너무 끔찍하고 괴로웠거든.

“리엔. 나는, 나는…….”

공황이 담긴 음성에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표정을 살폈다.

카르시온은 울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런 표정 짓지 마.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는걸. 그리고…….”

그의 뺨에 손을 올리자 따듯한 열감이 느껴졌다.

“나는 네가 웃는 모습이 좋단 말이야.”

그러자 카르시온이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렸다.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억지로 웃고 있는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내 솔직한 감상을 말해 주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네 우는 모습도 좋은 것 같아.”

“악취미야, 리엔.”

“하지만 이렇게 예쁜 걸 어떡해.”

발갛게 변한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날 바라보고 있잖아.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카르시온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네 고통을 미리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사과를 듣고 싶어서 말한 게 아니야. 위로받고 싶었을 뿐이지.”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 내게로 끌어당겼다.

어두워진 벽안이 내 눈과 맞닿는 순간, 나는 웃음을 그려내며 그와 입술을 겹쳤다.

놀란 그의 눈이 홉뜨였지만, 그는 이윽고 눈을 내리감으며 나를 받아들였다.

숨결이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하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하아…….”

입을 맞출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는 너무 뜨거워서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모자랐다. 입맞춤으로는 내 갈증을 완벽히 채울 수 없었다.

더 더, 욕심이 났다.

깊고 농밀한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위로라는 명목으로 그를 삼키기로 했다.

“날 위로해 줘, 카온.”

눈물이 주륵 흘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숨길 수 없는 웃음이 가득 새어 나왔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유혹했다.

“너와의 기억으로 꽉 채워서, 아무것도 생각날 틈이 없게.”

* * *

카르시온은 제 옆에서 곧게 잠이 든 리엔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리엔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황홀한 밤이었다.

제어 마법 하나 걸지 않은 밤이라 더욱 의미가 컸다.

어제는 감정적으로 격양되어 있었기에, 다음번에도 제어 마법 없이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리엔이 일어날 때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게는 할 일이 있었다.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발밑으로 마법진이 생기며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렉스.”

입에 담는 것조차 죄악인 놈.

카르시온은 서늘한 눈으로 재갈을 문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렉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망가뜨린 한쪽 눈이 보였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조금 더 괴롭게 할 수 있었는데.

아쉽기도 하지.

“네가 리엔에게 미친 집착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리엔을 베고니아 공작 부인이라는 자리에 앉히기 위해 부모를 살해할 정도로 미쳐 있다는 것도.

하지만 리엔에게 손을 올린 것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녹음된 리엔의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아,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카르시온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귀한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건지.”

리엔에게 반했다면 최소한 그녀의 앞에서 다정히 굴었을 줄 알았다.

지독한 죄책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미리 알았더라면 리엔에게 복수할 기회를 준다며 그의 수명을 늘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응? 그 더러운 입으로 답해 봐. 리엔에게 왜 손을 올렸지?”

카르시온이 렉스에게 물린 재갈을 풀자 그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어냈다.

“재밌잖아.”

카르시온은 그가 눈을 접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구역감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렉스가 카르시온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런데 결국 리엔을 손에 넣은 건 너구나.”

카르시온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마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틀렸어. 내가 그녀의 것이지, 그녀가 내 것인 게 아니야.”

리엔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은 알아챘어야 했다.

그녀가 평생 저 새끼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었어야 했다.

카르시온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번뜩였다.

“아버지는 옛날부터 깔끔하게 죽이는 걸 선호했지. 근데 나는 조금 달라서.”

지금이라도 제 손에 들어와서 다행이었다.

리엔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한 마당에 고민할 것은 없었다.

리엔을, 리시안셔스를 건드린 죗값을 치를 차례였다.

* * *

나는 문득 느껴지는 허전함에 눈을 번뜩 떴다.

“아…….”

옆자리에 카르시온이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어쩐지 울컥하며 서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아무리 바빠도 이런 날은 같이 있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바닥에 마법진이 떠오르며 카르시온이 눈앞에 나타났다.

“……카온!”

내가 일어나 있을 줄 몰랐다는 듯 카르시온이 순한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사르르 흘러내리는 이불을 보고 시선을 다른 곳에 홱 돌린다.

어제 실컷 봤을 텐데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는 게 신기했다.

그가 손부채질을 하며 딴청을 피운다.

“버, 벌써 일어나 있었어? 네가 깨기 전에 오려고 했는데.”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서운했어.”

내 솔직한 말에 카르시온의 입꼬리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미안해.”

어디를 다녀온 거지? 혹시 아침을 차리다가 온 건가?

카르시온은 임신 오해를 풀고 난 후에도 종종 직접 요리를 해 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뺨에 붉은색의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카온, 오늘은 스파게티를 만든 거야? 아니면 토마토 주스?”

“응?”

카르시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의 뺨을 가리켰다.

“얼굴에 빨간 거 묻었어.”

“아.”

당황한 그는 재빨리 클린 마법을 걸어 자국을 지웠다.

“들켰네. 아침을 차린 건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급하게 오느라.”

그의 귀여운 모습에 픽 웃음이 나왔다.

“뭘 비밀까지야.”

나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아침은 나중에 먹고 어젯밤에 하던 거 이어 하는 건 어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