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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43)화 (143/161)

143화

내 말을 듣자마자 카르시온이 빙결 마법이라도 맞은 듯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나는 그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저 굳은 모습을 감상하는 것 또한 묘미였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의 움직임이 서서히 돌아온다.

그의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정말?”

반쯤 잠긴 목소리를 들으니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그럼 농담이겠어?”

야살스럽게 눈을 접자, 그가 아찔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흐…….”

결국, 그의 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린다.

코피를 보자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 얘 아직도 나한테 적응 못 했구나.

제어 마법 없이 밤을 보내서 이제는 뭐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생각해 보면 최근에 한 키스도 그렇고 침대를 합친 것도.

이번에 제어 마법 없이 밤을 보낸 것도 전부 내가 힘들었을 때 진도를 나간 거였다.

아니 그렇다고 맨날 정신적으로 힘들 수는 없잖아.

나도 이제는 행복하고 싶은 걸.

카르시온이 주머니에서 서둘러 손수건을 꺼냈다.

하지만 웬일인지 한쪽 손으로 흐르지 않게 받치기만 하고 코피를 닦지는 않았다.

“왜 안 닦고 있어?”

그가 울상을 지으며 설명했다.

“이거 리엔이 전에 내게 선물해 준 손수건이야.”

“그런데?”

“그런데라니, 이걸 아까워서 어떻게 써……?”

나는 이마를 짚었다.

“용도에 맞게 쓰는 게 어디가 어때서.”

카르시온이 시무룩하게 읊조렸다.

“용도…… 내 행운의 손수건…….”

내가 선물할 당시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 용도였다.

“손수건 따위야 얼마든지 선물해 줄 테니까 아까워하지 마.”

“하지만 이건 네가 처음으로 준 손수건인 만큼 의미가 깊은걸.”

카르시온에게 잘 생각해 보라는 듯 말했다.

“그거 차별이야. 두 번째, 세 번째에 받을 손수건은 또 그것만의 의미가 있지 않아?”

“……그러네. 다음에 받을 손수건도 똑같이 소중히 대해야겠어.”

야. 그 의도로 말한 게 아니잖아.

작게 한숨을 쉰 나는 결국 픽 웃고 말았다.

“카온.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그냥 마법으로 닦으면 되는 거 아니야? 코피도 힐링 마법으로 멈출 수 있을 거고.”

“아.”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그가 마법을 시전했다.

말끔해진 그의 얼굴을 보며 만족스러운 눈을 하던 나는 문득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나 얘 유혹하던 중이었지, 참.

“이리 와 봐, 카온.”

금세 내게 다가온 카르시온이 고개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쓸었다.

“중간에 기절하더라도 해 보는 건 어때?”

응? 어제는 제어 마법 없이 잘했잖아.

나를 바라보는 카르시온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싫어?”

“……약!”

“약?”

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그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약 먹고 와도 될까? 생각해 보니 어제는 분위기에 취해서 잊어버렸잖아.”

이 와중에 챙길 건 야무지게 챙기는 그가 기특했다.

나는 설핏 웃으며 그의 귓불을 매만졌다.

귓불마저 예쁘면 어쩌자는 건지.

“약은 내가 매일 먹고 있으니 넌 언제나 마음의 준비만 하면 돼.”

매일 약을 먹고 있었다는 말에 사뭇 충격을 받은 듯 카르시온이 말을 더듬었다.

“왜, 왜 매일……?”

“왜긴. 매일 밤 너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너도 나를 원하고 있었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그럼…….”

“왜 이번처럼 말하지 않았냐고?”

카르시온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라는 듯 얼른 고개를 주억였다.

“네가 언제 먼저 손을 뻗을까 궁금해서.”

와, 근데 어떻게 매일 껴안고 자는데 몰래 한 번 만질 생각도 안 하는지.

나는 카르시온이 무슨 성자라도 되는 줄 알았다.

성욕이 있다는 건 선명히 보여서 알겠는데, 인내심이 어떻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진도를 나가려고 할 때였다.

문득 렉스를 처리하고 남은 떨거지 한 명이 생각났다.

“지금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인데, 카온.”

“으응.”

“에르한은 건드리지 마.”

잠시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딴 걸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그럼 왜?”

나는 방금 막 꽃이 핀 것 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그려내었다.

“내가 직접 조지게. 작업은 이미 다 완료해 놓은 지 오래거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카르시온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그럼 걔 조질 때 나도 데려가.”

“껴들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약속할게.”

새끼손가락까지 꼭꼭 걸고 나서야 표정을 푸는 그였다.

“그럼 어제 하던 거 마저 할까, 자기야?”

카르시온이 눈썹을 내리깐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막상 본 게임에 들어가면 180도 바뀔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그와 내 몸이 천천히 겹쳐지려 할 때였다.

쿵쿵!

“리엔 아가씨, 급한 일입니다!”

놀란 나는 카르시온의 가슴팍을 확 밀쳐내며 답했다.

“무, 무슨 일이죠?”

그리고 하녀의 입에서 들려온 말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한 일이었다.

“조지 교수님께서 깨어나시지 않아요!”

* * *

나는 입술을 뜯으며 초조하게 조지 교수님을 바라봤다.

그가 의식을 잃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까지 돌입한 것이다.

교수님의 상태를 체크해 보니 엊그제만 해도 멀쩡하던 오른손과 다리까지 괴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빨랐다.

마치 몬스테라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조지 교수님이 의식을 잃었으니, 기적처럼 털고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나 혼자 치료제를 만들어야 할 터였다.

나는 고개를 푹 떨궜다. 절망이 드리워진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홀로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까? 그것도 조지 교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게 됐다면 고민하고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애초에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일도 없었을 거다.

나는 왜 항상 무력해야만 할까.

이제 모든 족쇄에서 해방되어 카르시온과 행복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불현듯 아칸더스가 내게 졸업 선물로 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것이 필요해지는 날이 올 거야.’

설마.

‘그날이 오면 내가 말한 게 무엇인지 반드시 알게 될 거다. 그러니 버리지 말고 꼭 갖고 있어.’

아칸더스.

설마 당신이 말한 날은 몬스테라의 유행을 의미한 건가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연구실 한구석에 놓아둔 소포를 꺼냈다.

몇 개월 지나 먼지가 조금 쌓인 것을 제외하면 그가 내게 보냈을 때 그대로였다.

조심스럽게 소포를 풀자 작은 상자가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붉은색 액체가 담겨 있는 약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몬스테라의 치료제인 걸까?

아니면 연금술의 천재였던 그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만든 걸까?

뭐가 됐든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약물로 조지 교수님을 살릴 수도 있다는 거다.

어떤 약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나는 아칸더스를 믿고 있었다.

그가 내게 하는 행동과 눈빛. 그것은 한 치의 의심 없이 가족을 향한 것이었다.

거짓으로 그런 애틋함을 꾸며낼 수 없었다.

약병을 들고 서둘러 조지 교수님께 향하려던 때였다.

귓가에 아칸더스의 당부가 맴돌았다.

‘나는 네가 이기적으로 살았으면 한다. 누군가를 동정하지 말고, 너의 것을 양보하지 말렴.’

내게 주려 했던 것이겠지.

세상에 딱 한 병밖에 없는 귀중한 약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칸더스.

“미안해요, 난 내 사람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조지 교수님께 약을 먹였다.

붉은색 액체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묘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괜찮아질 거라 확실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리고 이튿날.

의식을 잃었던 조지 교수님이 깨어났다.

* * *

하루.

약을 먹은 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검게 변했던 그의 손끝 발끝이 원래의 색을 찾았다.

물론 완전히 괴사된 왼쪽 손은 전혀 나아진 기색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것도 큰 차도였다.

아마 왼손은 병이 전부 낫는다 하더라도 전과 같이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교수님, 며칠은 푹 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조지 교수님은 의식을 되찾은 후 곧바로 연구실을 찾았다.

하루빨리 치료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까닭이다.

“네가 내게 먹인 게 정말 치료제라는 보장은 없지 않느냐.”

“하지만 교수님은 효과가 있었잖아요.”

“……아칸더스는 대체 어떻게 이 일을 예견하고 약을 만든 건지.”

“저도 그게 의문이에요.”

조지 교수님이 미간을 좁히며 내게 물었다.

“어제 내게 먹인 약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나?”

아. 조지 교수님을 살려야 한다는 것에만 급급해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슬쩍 눈을 피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복용량은 준수해야죠. 한 방울이라도 덜 먹었다가 안 나으면 어쩌려고.”

“떼잉, 적당히 융통성을 발휘했어야지. 의식을 잃은 상태라 어떤 맛이 났는지도 기억 못 하거늘.”

“아쉬운 대로 약을 담았던 병은 있을 거예요.”

“줘 봐라. 그거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사용인을 시켜 약병을 가져오게 했다.

조지 교수님은 사용인이 가져온 빈 약병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그의 미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와락 구겨진다.

“네가 맡아 봐라, 리엔. 내가 늙어서 그런가 확실치 않군.”

“무슨 냄새가 나길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지 교수님이 건넨 약병을 받아 냄새를 맡아 보았다.

“어……?”

호흡이 빨라지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여기서 왜 꽈리 열매 냄새가 난단 말인가.

부모님은 꽈리 열매로 만든 치료제를 복용한 후 돌아가셨다.

때문에, 지금까지 몬스테라의 치료제를 만들 때 꽈리는 완전히 배제하고 다른 약초를 찾았다.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세워지며 망치로 머리를 내려친 듯한 충격이 일었다.

아니지?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가족인 내가 아칸더스를 믿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믿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죠, 아칸더스?

당신이 내게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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