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나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매일 해놓고 뭘. 다른 사람 앞이라고 부끄럼타는 거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말을 하니까……!”
“오해?”
카르시온이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주억인다.
어차피 진도 나갈 거 다 나갔고, 결혼도 할 거니까 오해해도 딱히 상관없지 않나.
하여튼, 내 애인은 참 부끄럼도 많아.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천천히 티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무슨 오해를 하든 임신보다는 나은 상황이겠지.”
그때였다.
“리엔 너 임신했어?!”
제인과 한스가 동시에 일어나며 경악성을 토해냈다.
왜 그걸 지금 말하냐는 약간의 원망과 조카가 생긴다는 흥분감이 서려 있었다.
어…….
내가 방금 뭐라고 했더라?
또 내가 오해할 만하게 말한 거야?
급기야 제인이 고양된 얼굴로 내 양손을 잡는다.
“리엔 너어……! 잡아먹다 못해 아주 영혼까지 삼켰구나!”
콜록-!
도륵, 눈을 굴리자 한스가 사레들린 듯 거세게 기침하는 모습이 담긴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해야겠는지 눈물까지 보이며 입을 연다.
“소공작님이! 콜록! 우리, 콜록! 순진한 리엔을! 콜록! 타락시켰어……!”
“몇 개월이야? 설마 한 번에 성공한 건 아닐 거 아니야. 세상에, 내가 이모가 된다니!”
대 환장 잔치였다.
나는 이쯤 되니 내 공포의 주둥아리가 모든 오해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오해를 풀어야겠다 생각하고는 입을 여는데…….
“임신, 아니야.”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굳힌 카르시온이 담긴다.
“리엔한테는 그런 거 안 시킬 거야. 나만 있어도 가정을 만드는 건 충분해.”
나는 몰랐던 그의 속마음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방 안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스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제인에게 속삭인다.
“지 애한테도 질투하려나 봐.”
“나만 그렇게 생각한 줄. 집착이 심한 건 알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리시안셔스 공작님이 들으면 헛기침할 소리였다.
“현실 부정인가?”
“그럼 우리 조카랑 리엔이랑 둘 다 불쌍해서 어떡해?”
생기지도 않은 애를 벌써 ‘우리 조카’란다.
나는 그들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 확실히 말해주기로 했다.
“카온의 말이 맞아. 임신 아니야. 무슨 오해를 하든 임신보다 낫겠다고 한 건 이미 그 오해한 분들이 있어서.”
아주 거하게 하셨지.
“근데 너희까지 오해할 줄은…….”
“아 뭐야 그런 거였어?”
“조카가 생기는 줄 알았는데…….”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스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제인.
정리되는 상황을 보며 나는 이번에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보다, 카온. 너 나랑 아이 갖기 싫어?”
몸을 움찔하는 그.
“생각해보니까 저번에도 내가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다 어쩐다 그러지 않았어?”
“……그 말 그대로야.”
“유산의 고통은 내가 진짜 임신했을 때 받았겠지! 해본 적도 없는데 알 리가 있나!”
“생각해 봐 리엔, 문제는 그것뿐만 아니야.”
“또 뭐가 있는데?”
“우리 애가 성격은 나를 닮고, 장난기는 너를 닮았으면 어떡해?”
“그건……!”
와 내가 생각해도 그건 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질문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확실히…….”
“살짝 문제가 있긴 하겠네.”
제인과 한스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우리를 구경하며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있었다.
없던 팝콘이라도 만들어서 씹어 먹을 기세였다.
카르시온과 내 시선이 둘에게로 가자 제인이 손을 휘휘 젓는다.
“우리는 없는 거로 쳐도 괜찮아.”
“얌전히 보고만 있을게.”
그 흥미롭다 못해 반짝이는 눈빛부터 죽이고 말하는 건 어때.
기운이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일단 손님이 있으니까 이 주제는 나중에 다시 말하자.”
카르시온까지 다시 자리에 착석하자 한스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손을 번쩍 든다.
“어쩌다 보니 동창 모임처럼 되어 버려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나 싶긴 한데…….”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치료제 말하는 거지? 말해. 중요한 이야기잖아.”
카르시온과 제인의 눈치를 살짝 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확실히 만들기 어렵진 않아. 복잡한 과정도 필요 없고 네가 말한 비율대로 조합하면 되니까.”
“다행이다.”
“이 주안으로 대량 생산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빨리?”
“생산 설비와 고용인력을 늘리고 있던 참이거든.”
여기서 더 늘리고 있다는 말에 미간이 좁혀들어간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뭐……. 감염병 사태가 끝나면 약간 손해는 보겠지만 그건 감수해야겠지. 한시라도 빨리 종식시키는 게 더 중요하잖아.”
“오, 너 좀 멋있다?”
“나도 나설 때는 나서는 장사아치라ㄱ……헙!”
한스가 말을 하다 말고 제인의 품속에 호다닥 숨는다.
안 봐도 범인은 뻔했다. 멋있다는 말을 한 내 잘못이지.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카르시온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처리했으니 계속 말해, 한스.”
“다만, 문제가…….”
한스의 어두워진 표정에,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챘다.
나도 걱정하던 문제였으니까.
“꽈리의 수급이지.”
내 말에 한스가 깊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꽈리는 아바스칸투스에서만 자란다.
몬스테라 유행 전까지만 해도 꽈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약초였다.
다른 대체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바스칸투스에서 수입하는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모기 기피제는 워낙 재료 수급이 쉬운 것들이라 괜찮았다.
마나 이완제는 출시된 지 꽤 시간이 흘렀고, 이미 마법사들 사이에서 필수품이었다.
원자재 확보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원료 전부가 라그라스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치료제는 달랐다.
치료제의 주원료인 꽈리는 무조건 아바스칸투스와의 무역이 필요했다.
“리엔 너도 알다시피 무역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야. 우리 상단은 아바스칸투스와 활발히 거래해왔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꽈리를 대량으로 수입한다고 하면 쉽게 해주지 않겠지.”
한스네 상단은 지금 우리 라그라스 제국은 물론이고 아바스칸투스까지 주시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게 모기 기피제와 마나 이완제 모두 이쪽에서 판매를 하고 있었으니까.
꽈리로 무언가 만들 거라고 예상하는 것은 미취학 아동도 쉽게 할 터였다.
“우리 라그라스에서 모기 기피제와 마나 이완제를 사들이며 봤던 손해를 이곳에서 메꾸려고 할 거야.”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리거나 치료제 가격을 후려치겠지.”
한스네 상단에서 팔고 있는 내 물약들은 전부 적정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더 후려칠 것도 없는 가격이라는 거다.
사실 한스네가 아닌 다른 상단에서 유통했다면 독점이라는 이유를 들어 값비싸게 팔았을 터였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만큼 가격을 올려도 문제없이 잘 팔렸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판매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한스네 상단을 통해 유통했던 거였고.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제인이 고개를 기울인다.
“그럼 우리도 치료제를 인질로 삼으면 되는 거 아니야?”
나와 한스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그럴 수는 없잖아.”
“여론이 좋지 않을 거야.”
그러자 제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따지듯 물어왔다.
“그쪽이 먼저 꽈리를 내주지 않은 건데 왜 우리를 욕해?”
“이미 모기 기피제와 마나 이완제를 이쪽에서 독점하고 있으니까.”
“최악의 상황에는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어.”
두 제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지 20년도 훌쩍 넘었다지만, 사이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상대 국가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가 남아있었다.
두 제국 사이에서 이런저런 일로 부딪히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때 카르시온이 뭘 고민하냐는 듯 입을 열었다.
“아바스칸투스에서도 꽈리가 주로 나는 지역이 있지 않아? 그쪽만 어떻게 족치면 될 것 같은데.”
“아……!”
아바스칸투스는 제국인 만큼 땅덩어리가 굉장히 넓다.
아직 치료제의 주원료가 꽈리라는 것이 알려지기 전이다.
그 지역의 영주를 만나 잘만 거래를 튼다면 무난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호구 같은 영주를 만나도 좋지만, 사람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꽈리가 주로 어디서 피는지 알고 있어?”
한스의 물음에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봤다.
“서부 쪽에 주로 서식하는 거로 알고 있어.”
“서부라면……. 아 젠장, 하필 포티투아 영지가 80%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잖아?”
한스가 망했다며 머리를 마구 헤집는다.
“포티투아?”
평지 비율이 높고 토양의 질이 좋아 부유하기로 소문난 영지였다.
근데 포티투아라는 이름이 왜 이렇게 묘하게 들리지……?
“카리스 데네스 포티투아.”
어……?
저 이름이라면 알고 있다.
아니, 라그라스와 아바스칸투스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체를 하기도 전에 한스가 말을 잇는다.
“과거, 제국 전쟁에서 라그라스 제국군을 학살했다는 그 괴물 대공이 하사받은 영지야.”
쿤의 대부님이었다.
***
한스와 제인이 수도로 돌아가자 시끌벅적했던 공작성이 고요해졌다.
카르시온은 내 곁에 있으나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었다.
치료제의 임상실험을 마친 후, 공작성에서 살다시피 한 조지 교수님이 집으로 돌아간 것도 한몫했다.
수도에 있는 공작저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공작님과 공작 부인, 그리고 이모 부부와 루카도 보고 싶었다.
슬슬 진짜 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았다.
“에르한에게 볼 일도 있고.”
그러다 문득 쿤에게서 온 편지가 눈에 들어온다.
쿤의 대부님.
황자인 쿤의 대부님이라고 해서 높은 분이실 줄은 알았다.
그런데도 나중에 그 유명한 카리스 대공인 것을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뭐, 제국 전쟁에서 라그라스 사람을 학살했다고는 하나 그건 자국민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일이라 현실감각이 없기도 하고.
시니어 2학년 때 만난 이후 그분을 다시 만난 적 없긴 하지만, 기억에는 막 무정하신 분은 아니었는데.
한번 눈 딱 감고 쿤을 통해 편지를 보내볼까……?
나는 한참 고민하다가 생각을 정리하려 쿤이 보낸 편지를 펼쳤다.
[……그래서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아바스칸투스로 방문하시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감염병 확산을 막은 리엔을 환영하실 겁니다.
ps. 대부님의 허락을 받아놨으니, 황궁이 불편하다면 그곳에 머무셔도 됩니다.]
편지를 다 읽은 나는 책상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카르시온을 불러 물었다.
“카온, 우리 아바스칸투스로 여행 다녀올래?”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