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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47)화 (147/161)

147화

에르한은 다소 긴장된 기색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상단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몬스테라 감염병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상단은, 노는 사람 한 명 없이 바빠 보였다.

그는 제일 먼저 보이는 아무나를 붙잡고는 물었다.

“투자자께서 부르셨다고 들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에르한은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에 기분이 나빴지만, 이번에는 넘어가 주기로 했다.

소란을 일으켜 좋을 것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리아 가문에서 나왔다고 하면 알 거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에게 붙잡힌 직원은 확인해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은근 귀족임을 티 냈는데 굽히는 기색 하나 없는 게 기분을 또 한 번 상하게 했다.

‘쯧, 이 상단도 오래가진 못하겠군.’

조금 애석한 일이긴 했다. 자신이 빚더미에 앉아 있을 때 구원해 준 것은 이 상단이었으므로.

베고니아 공작가에서 자신에게 투자해 줬던 돈을 일언반구 없이 회수해 가고, 방황하던 그였다.

이대로 진행하던 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마음에 가문의 인장을 훔쳐 아르메리아 영지를 담보로 걸기도 했다.

“정말 영지가 넘어갈 뻔했지.”

그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게 이 상단이었다.

사실 먼저 도움을 요청한 것은 자신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상단이 저를 도와줬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에르한은 돈을 갚을 능력은 없었으나 믿는 구석은 있었다.

‘리엔.’

목숨과 같은 영지까지 담보로 내 걸면서 진행 중이던 사업은 관광과 관련된 것이었다.

감염병 사태가 터지고 나서 사람들이 집에만 있자 잘될 리가 만무. 당연히 망했다.

그때는 앞길이 막막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이 상단주의 아들이 리엔의 절친한 친구지 않은가.

설령 오늘 만남에서 자신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더라도 괜찮았다.

“그년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군.”

이 상단의 주력 품목 전부가 그년이 만든 약초였다니.

성녀라고 불리고 있는 리엔이었다.

제국을 구한 성녀가 자신의 가족 하나 구해 주지 못하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껏 숨긴 리엔에게 화가 났다.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 있었다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 남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은 없었을 텐데.

에르한이 한창 리엔에게 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에르한은 직원이 안내해 주는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는 반가면을 쓴 사내가 한쪽 벽면에 서 있었다.

자연스레 고개와 허리가 굽혀지는 위압감에 처음에는 그가 제게 돈을 빌려준 ‘한스’인 줄 알았다.

하지만 허리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모습이,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한 호위인 듯했다.

검이 없는 것은 조금 의문이나, 키도 크고 균형 잡힌 역삼각형의 몸매가 그 증거였다.

‘솔직히 저 정도 몸매면 얼굴이라도 못생겨야 한다.’

그러나 반가면 밑으로 드러난 얼굴만 보더라도 못생길 일은 없는 듯했다.

조각같이 생겼다는 말이 저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검은색 머리카락과 단정한 복장이 금욕적이면서도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 때문인지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제 호위에게 관심이 있나요?”

사내에게서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얇고 고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에르한은 파드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맞은편 자리에 여성이 긴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여성은 호위라는 남성처럼 반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입은 드레스와 장신구가 그녀의 부를 과시하듯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멍하니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뺨이 따끔거리는 느낌에 그 원인을 찾아보니 그녀의 호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를 찢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어쩐지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눈 치워.’

기가 죽은 에르한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이곳의 부상단주 님입니다만.”

“한스를 말하는 거라면, 그는 이곳에 오지 않아요.”

그녀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한스가 당신에게 발행해 준 어음, 제가 샀거든요.”

“아……?”

“즉, 내가 채권자라는 말이죠. 당신이 돈을 갚아야 할 상대가 나라는 거지.”

여성이 소매에서 시가렛 파이프를 꺼내자 호위가 다급히 그녀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몸……안 좋은…… 중독…….”

그녀가 피식 웃으며 똑같이 남성의 귀에 뭐라 속삭인다.

“안심……비타민…… 몸에 좋은…… 분위기만…….”

대화가 들리지 않는 에르한의 눈에는 둘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대화가 끝난 듯 둘의 가까웠던 몸이 떨어졌다.

“공증을 리시안셔스 공작가에서 서 줬다는 건 알고 서명하셨을 테고…….”

여성이 시가렛 파이프를 들어 올리자 호위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파이프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녀가 파이프 끝을 입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에르한의 얼굴에 연기를 후, 내뱉는다.

그가 알던 시가렛의 향이 아니었다. 지독히 쓴 약초의 향.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죠?”

그 모습이 그녀와 한없이 잘 어울려서, 에르한은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여유로운 낯을 하고 있네요.”

“……채무자라고 벌벌 떨고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흐응.

그녀의 비음이 방 안을 울린다.

“채무를 상환할 만한 여력이 충분하신가 봐요. 사업이 잘됐나 보죠?”

“그, 그 돈은 다른 사람이 갚아 줄 예정입니다.”

“어머, 적은 돈이 아닐 텐데. 어떤 거래를 하셨길래.”

에르한은 그제야 가슴을 피며 당당히 말했다.

“요즘 제국에서 성녀라고 불리고 있는 리엔이 제 친동생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여성은 말이 없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흥, 리엔이라는 이름을 듣고 놀랐나 보군.’

하긴 자신도 소문의 성녀가 리엔인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래요? 제가 알기로 리엔 양은 부모님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형제도요.”

“무슨 소리입니까! 저와 리엔은 어렸을 때부터 친남매처럼 자라 온 사이입니다!”

“호적상 친남매가 아니라는 건 맞다는 이야기군요.”

지루하다는 표정의 그녀를 보며 에르한이 급히 입을 뗐다.

“그건 사정이 있었습니다. 호적에는 넣지 못했지만, 그 아이도 저를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사정이라…….”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궁금하네요. 그 사정.”

“사, 사적인 일이라서…….”

그런 에르한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는 시가렛 파이프를 물었다.

후.

연기가 에르한의 얼굴을 덮었다가 사라진다.

에르한의 시야가 정상을 찾았을 때, 여성은 가면을 벗은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에르한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왔다.

그에 반해 여성의 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사정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네가 호적에 들이는 걸 반대했기 때문은 아니고?”

“리, 리엔……?”

“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에르한.”

그녀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다.

“꿇어.”

에르한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하던 리엔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에르한이 잠시 굳어 있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이 은혜도 모르는……!”

“내가 분명 꿇으라고 했지.”

쿵.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에르한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무릎을 꿇었다.

격분한 그가 말을 토해 낸다.

“난 아르메리아 백작이 될 사람이야!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어, 완전.”

리엔이 호위의 너른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러자 호위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근데 너 그 영지. 돈 못 갚으면 내게 넘겨야 하잖아.”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에르한의 고막을 관통한다.

“영지 없는 귀족이라. 누가 대우는 해 줄까 모르겠네.”

“평민 따위가! 감히!”

“평민이라니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에르한. 내가 리시안셔스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얘기 못 들어 봤어?”

리엔이 사르르 눈을 접으며 똑똑히 알아들으라는 듯 말했다.

“난 공작 부인이 될 사람이야. 고작 백작 나부랭이가 될 사람이, 어딜 고개를 빳빳이 쳐드나.”

“고, 공작! 그래! 너! 내가 카르시온 소공작님께 네 실체를 까발릴 거야!”

리엔은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뭘?”

그러자 에르한이 으하하 웃으며 호위를 삿대질했다.

“옆에 있는 호위! 네 애인이지? 하! 카르시온 소공작님이 아시면 아주 난리가 나겠군.”

리엔이 호위와 조용히 시선을 교환한다.

파르르 떨리는 입가가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긴, 옛날부터 반반한 얼굴로 남자 꼬시던 게 어디 가겠어? 렉스도 사실 네년의 피해자지.”

그 순간이었다.

쾅-!

에르한의 머리가 바닥을 거세게 찧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주륵 흐른다.

“다시 나불거려 봐. 누가 피해자라고?”

그 모습을 본 리엔이 쯧 혀를 차며 호위에게 꾸중했다.

“껴들지 않기로 했잖아.”

“……하지만!”

리엔은 호위를 달래려는 듯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제 호위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둘의 입술이 겹쳐진다.

에르한은 입을 벌린 채 그 장면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격렬한 입맞춤과 달리, 호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입술을 뗀 그녀가 마무리로 호위의 붉은 입술을 핥아 올린다.

“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호위의 몸이 무너지자 리엔이 자연스럽게 그의 뒤에 의자를 댔다.

그녀가 에르한을 보며 싱긋 웃는다.

“어디 네가 본 걸 리시안셔스 사람들에게 말해 봐.”

“……내가 못할 줄 알고?”

에르한이 분노에 찬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깐.”

그를 붙잡는 말에 에르한이 만연에 웃음을 그려내었다.

“늦었어!”

하지만 리엔 또한 여전히 웃음기 어린 낯이었다.

“아니, 힘들게 리시안셔스 공작저까지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말하라고.”

“그게 무슨…….”

리엔이 호위의 반가면을 스륵 벗겨낸다.

그러자 그의 머리카락이 분홍빛으로 바뀜과 동시에 감춰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카르시온 리시안셔스.

그였다.

“거, 거짓말이야! 거짓말……!”

“아아, 부채 상환 날짜가 얼마나 남았더라?”

타들어 가는 에르한의 심정과 달리, 한없이 여유로운 리엔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채무자 재산조사를 거쳐 부동산 압류 및 유체동산 강제 압류가 들어갈 거야.”

리엔의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이 사실을 이모가 알면 너를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궁금한걸?”

“배은망덕한 자식! 은혜도 모르는 자식!”

“너 계속 은혜 어쩌구 하는데……. 그래서 내가 먼저 이르지 않았잖아? 알릴지 말지 선택은 네가 해. 난 너만 괴롭힐 거야.”

네가 입 다물고 있으면 만기일이 될 때까지는 이모 부부와 루카가 이 사실을 알게 될 일은 없어.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돼.

너만.

“앞으로 잘 부탁해, 빚쟁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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