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나는 에르한이 나간 방문을 보며 손을 탁탁 털었다.
혼이 반쯤 빠져나간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별것도 아닌 게.”
“리엔.”
왜 그러냐는 의미로 카르시온을 바라보자 그가 말을 잇는다.
“에르한이 기간 안에 갚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야?”
“갚지 못 하면이 아니라, 기간 안에 못 갚을걸?”
에르한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 큰돈을 갚을 수 있을까.
게다가 국가에서 발행하는 채권이 아니라 어음이라 빌려줄 수 있는 기간도 몇 년 되지 않는다.
어음은 법적으로 최대 3년을 넘지 못하니까.
“사실 못 갚을 거 알고도 어음을 산 거야. 내가 사지 않았으면 아르메리아 영지는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을 테니까.”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일단 기간 동안에는 착실히 쥐여 짜려고.”
그러고 보면 내가 에르한에게 배신당하고 아르메리아 백작가에서 고통받은 것도 비슷한 기간이었지.
마지막에 제 상황을 파악하고 내 앞에서 빌빌거리던 에르한을 생각하니 다시금 통쾌함이 밀려 들어왔다.
“기간이 끝나고 나면, 글쎄.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카르시온이 내 머리카락 끝을 잡아 올렸다.
“이모에게는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야?”
“응.”
어린 시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모 부부와 루카에게 털어놓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쓰게 웃었다.
“에르한은 이모의 아들이잖아.”
“리엔 넌 그분의 딸이잖아.”
“……난 이모의 딸이 아니야. 조카일 뿐이지. 나로 인해 그들 가정의 평화가 깨지길 바라지 않아.”
육성으로 말하고 나니 현실이 더욱 차갑게 다가왔다.
카르시온이 그런 나를 보며 입을 몇 번이고 달싹이다가 겨우 물음을 뱉어냈다.
“이모는 네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해?”
“……가족이지.”
“리엔, 네 꿈이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거라고 했잖아.”
그의 입술이 단호하게 맞물렸다.
“그럼 네게 이모는 절대 끊어지지 않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아닌 거야?”
“이모는 심약해. 충격받으실 거야.”
“너는 강하고?”
할 말이 없었다.
카르시온의 앞에서 몇 번이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왔기에 더 이상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가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이모는 네가 의지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내가 그랬듯이.
카르시온을 바라보는 내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정말로.
***
나는 카르시온의 소매를 꼭 잡은 채 아르메리아 백작가 저택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몇 년을 살아온 곳인데, 낯설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긴 1학년 이후로 들른 적이 없으니까.
이제는 리시안셔스 공작가가 내 집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실제로 리시안셔스 영지에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하고 바로 떠올린 게 백작가가 아닌 그곳이었다.
힘이 들어간 내 손을 바라보던 카르시온이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맞춘다.
“이모도 오랜만에 뵙는 거지?”
“그렇지. 매번 편지로만 안부를 전했으니까.”
그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다른 주제를 꺼냈다.
“리엔, 아바스칸투스는 언제 출발할 거야?”
“내가 보낸 편지가 도착했을 때쯤? 네 공간 이동 마법으로 가면 너무 순식간이잖아.”
우리는 쿤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카르시온은 초대받은 적 없으니 살짝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대접받으면 대접받았지, 무시당하진 않을 터였다.
황실에 머무는 것은 다소 부담스러워서, 그가 배려해 준 대로 카리스 대공님의 저택에서 머물고 싶다 편지를 보냈다.
꽈리라는 다른 목적도 있고.
대공님의 저택에 머무르며 조금 친분을 쌓은 후에 이야기를 꺼내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편지가 아바스칸투스에 전달되는 동안 수도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지금은 이모 부부와 루카를 만나러 카르시온과 아르메리아 백작가에 온 상태였다.
이제 백작가에 내가 피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에르한이 날 피했으면 피했지.
나는 쥐고 있던 소매를 놓고는 카르시온의 손에 깍지를 꼈다.
“이제 가 볼까?”
“그래.”
손을 잡은 게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는 그였다.
그렇게 경비병에게 방문을 알린 후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카르시온의 몸이 경직된 것을 느꼈다.
“카온?”
의아한 눈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보자 그가 아연한 얼굴로 내 눈을 맞춰왔다.
“……리엔.”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생각해 보니까 이거, 장인 장모님께 결혼 허락받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니야?”
“뭐? 푸하하!”
“웃지만 말고……!”
“하하, 진짜 귀여워 죽겠다.”
그가 긴장하고 있던 이유가 고작 그런 것 때문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카르시온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입술을 씹는다.
“네 이모님이 날 싫어하시면 어쩌지……?”
“이모가 반대한다고 네가 나랑 결혼 안 할 건 아니잖아?”
여유로운 나와 달리 그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리엔 너도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안 하네.”
이런. 눈치도 빠르지.
이모는 카르시온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걱정이 가득 담긴 편지를 보내 올 정도였으니까.
이모가 카르시온을 별로 좋은 사윗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뻔했다.
경제력과 가문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 문제가 있다면 그의 성격 때문이겠지.
성격이라.
질투가 심해서 조금 피곤하긴 하지……. 뭐만 하면 마법부터 나가서 말리기 힘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공작님과 공작부인께 조차 막나가지 않나.
그나마 공작 부인은 조금 예의를 차리는 것 같기도 한데.
나는 카르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역시,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긍정적인 생각이 마구 솟아난다.
……원래 성격이 어떻든 나한테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한테는 잘하는데 나한테만 막 대하는 사람보다야 훨씬 낫지 않나.
게다가 얼굴은 착하잖아.
나는 그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팔려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말을 뱉어냈다.
“괜찮아. 이모도 네 얼굴을 보면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이해하실 거야.”
“그런 이유 때문인 거야……?”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
내 확신이 담긴 말에 카르시온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리엔!”
저택 대문이 벌컥 열리며 이모가 달려 나왔다.
얼마나 급하게 나왔는지 가벼운 차림에 실내화를 착용한 채였다.
그녀가 나를 와락 끌어안는다.
“오, 리엔. 리엔……. 이게 얼마 만이니…….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단다.”
이모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괜히 울컥한 마음이 떠올랐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을 가장 무난한 인사말을 골라내었다.
“그동안 건강하셨죠?”
“건강하다마다. 네가 보내준 약초들을 생각하면 일백 살은 너끈히 살 거야.”
실없이 웃은 나는 그녀의 뒤쪽을 살피며 물었다.
“이모부는요?”
“일 때문에 아직 황궁에 있단다. 네가 오늘 올 줄 알았으면 휴가를 냈을 텐데.”
“안 알리고 오길 잘했네요.”
“그나저나, 리엔. 너와 같이 온 이 사람은…….”
“아.”
나는 이모와 살짝 거리를 벌리며 카르시온을 가리켰다.
“소개할게요, 이모. 저와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자 카르시온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었나 보다.
“안녕하세요, 이모님. 리엔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미리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카르시온을 바라보는 이모의 눈이 잘게 떨린다.
“혹시 성함이…….”
청산유수로 말하던 카르시온이 잠시 흠칫하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말하지 않고 뭐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카르시온 리시안셔스라고 합니다.”
휘청.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이모가 몸을 휘청였다. 카르시온이 재빠르게 그녀를 부축한다.
“괜찮으신가요?”
“가, 감사합니다.”
이모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연다.
“내 정신 좀 봐. 귀한 손님이 둘이나 왔는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모셔야겠군요.”
이모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우리를 안내한다.
이곳에 살던 내가 안내받는 입장이 되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다른 집 사람이 된 기분.
집사를 따라가려 걸음을 옮길 때였다.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 오는 게 느껴졌다.
“……리엔, 잠시 따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니?”
나는 머뭇거리며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낯선 곳에 혼자 남을 그가 마음에 걸렸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듯 이모가 카르시온을 보며 부탁했다.
“잠시면 됩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러자 그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그동안 저택을 구경하고 있어도 될까요? 리엔이 살던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궁금해서요.”
***
응접실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르시온 소공자와 네가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이 진실이 아니기를 바랐단다.”
역시…….
“이모. 편지에서 말했듯, 카온은 소문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소문을 맹신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주의할 필요는 있어.”
“이모.”
“렉스 때도 그랬지.”
렉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나는 놀라 눈을 껌뻑였다.
“렉스가 베고니아 공작부인을 죽였다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믿지 않았단다. 공작이 죽었을 때도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
다행히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사실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그런 놈인 줄 알았다면 너와 어울리게 하는 일도 없었을 거야. 물론 에르한과도.”
“이모…….”
“리엔, 나는 리시안셔스가 우리 가문에 해코지를 한다고 해도 너만 구할 수 있다면 상관하지 않는다. 이모부도 같은 마음일 거야. 그러니까…….”
이모는 끝까지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뒷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모가 굳센 눈으로 내 손을 단단히 잡아 온다.
지켜 줘야 하는 여린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카르시온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이모. 제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모가 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유일한……. 그래, 그거면 됐다.”
내 진심을 확인한 이모의 눈에서 약간의 씁쓸함과 안도가 느껴졌다.
아.
어쩐지 귓가에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모에게 진실을 말하려면 지금이 기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