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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49)화 (149/161)

149화

이모에게 에르한이 나를 괴롭혔다는 사실을 말해도 될까?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 다짐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이렇게 쉽게?

에르한에게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이모 부부가 알 일은 없다고 했었지.

사실 그에게 한 말은 손바닥 뒤집듯 바꿔도 양심의 가책 따위는 하나도 들지 않았다.

다만, 오랫동안 비밀로 했던 사실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말해 버려도 괜찮은지에 대한 의문? 불안감?

그래, 불안감이 들었다.

……내가 이모 부부와 루카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던 이유가 뭐였더라.

이모는 심약해서.

백작님은 나를 너무나도 아꼈기에 베고니아 공작가에 문제를 제기해, 괜히 피해를 볼까 봐.

루카는 어린 동생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이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분이셨고, 베고니아 공작가는 이제 내 편이었으며,

루카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었다.

그럼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가 있나?

내가 어떠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이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구나.”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이모는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만 괜찮다면 나는 듣고 싶구나.”

“듣고 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제가 백작가의 평화를 망칠 수도 있어요.”

“그게 왜 네 잘못이겠니.”

나는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 이미 알고 계셨던 건 아니겠지. 에르한이 알렸을 리는 없는데 어떻게?

손바닥에 땀이 송글송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계세요?”

이모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른단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네 잘못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모른다는 말에 긴장했던 근육에 힘이 풀린다.

“너는 매정한 척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사려 깊고 정이 많았지.”

잠시 말을 쉬고 내 상태를 살피던 이모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 네가 고의로 뭔가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이모의 믿음 가득한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안심이 됐다.

나는 어쩌면 이모가 에르한의 편을 들어줄까 무서웠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모에게 이 말을 꺼내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었기에.

그래서 나는 결국,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것을 택했다. 그린 듯한 웃음이었다.

“이모, 사실 저는 에르한이 끔찍이도 싫어요.”

***

이모는 말허리를 자르는 일 없이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꽤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텐데도 나를 배려한 것인지 큰 표정 변화는 없었다.

아. 내가 렉스에게 몇 년간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할 때는 이모의 눈에 핏발이 섰던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이야기를 끝마치자 이모는 참았던 감정을 한 번에 토해 내듯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가여운 것.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떻게 혼자 감당할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모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이모가 미안해. 미리 알아채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이모는 미안하다는 말을 수 없이 되풀이했다.

“못난 아들을 둬서 미안해.”

그녀의 격양된 감정을 보고 있노라니 목이 메어 왔다.

“……이모가 잘못하신 건 없어요.”

이모는 내 말에 답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너를 위로해 준 게 카르시온 소공자님이니?”

카르시온의 이야기가 나오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네.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 준 사람이에요.”

“감히 너와 어울리는지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런 말 마세요. 이모는 저와 카르시온 사이를 잘 몰랐고, 제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고 바란 건 나쁜 게 아니잖아요.”

“……모르는 건 어쩔 때는 죄가 되곤 하지.”

이모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니?”

에르한의 처벌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몇 년은 에르한이 이모가 이 사실을 알았다는 걸 모르는 척해줬으면 해요. 그거면 됐어요.”

에르한은 내가 언제 갑자기 입을 열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할 테니까.

“알겠다. 너도 다른 생각이 있는 거겠지. 다만, 에르한이 아르메리아 백작가의 후계자로 있는 건 보지 못하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영지를 담보로 걸었던 전적이 있는 이상, 그는 백작이 될 자격이 없었다.

“후계자 교육을 받기에는 늦은감이 있지만, 루카라면 좋은 백작이 될 거예요.”

“그래, 루카라면…….”

약간의 침묵 후 시계를 확인한 이모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꽤 지났구나. 카르시온 소공자님이 저택을 다 돌아보고도 남으셨겠어.”

“카온은 이해해 줄 거예요.”

“먼저 그분께 가 있겠니? 이모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오마.”

“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탁.

리엔이 나간 후, 백작 부인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리엔 앞에서 눈물을 참은 것은 자존심이었다.

자식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자존심.

자존심이 아니더라도 리엔 앞에서만큼은 버텨야 했다.

스스로 부모라 칭한 자신이 무너진다면, 두 번 다시 리엔이 제게 의지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리엔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자신을 찔러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이의 고통을 너무 늦게 알아챘다는 죄책감도 함께였다.

***

방에서 나온 나는 저택 안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카르시온이야 이름 한 번 부르면 바로 달려오겠지만, 숨바꼭질처럼 찾는 것도 나름 재미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보는 저택은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자연스레 내 방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 방향을 휙 틀었다.

추억이 깃든 방인 만큼 좋지 않은 기억도 많은 곳이었다.

이모에게 모든 것을 고백한 오늘 굳이 내 방에 들어가 나쁜 기억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겠지.

“흠…….”

호기롭게 방향을 튼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내 방을 제외하고 나니 갈 곳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도 내 이동 반경은 밥 먹을 때 빼고는 연구실과 내 방이 전부였지.”

새삼 참 작은 세상에서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렉스를 만나기 전에는 장난을 치느라 루카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었는데.

그때였다.

백작님의 집무실이 있는 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

무슨 좋은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실에 가셨다던 백작님이 돌아온 건 확실해 보였다.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네.

나는 백작님을 놀라게 해 주려 살금살금 집무실 앞으로 걸어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대화가 들려온다.

“카르시온 소공자께서 와인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취미라기보다는, 그냥 보이면 하나둘씩 사 모은 게 이렇게 되었습니다.”

“허어. 역시 리시안셔스의 재력은 따라갈 수가 없군요. 그냥 하나둘씩 사 모은 게 이 정도라니요.”

들려오는 대화로 미루어 보아 어쩌다 카르시온과 대화하고 계신 듯한데.

여기서 의문인 점은 둘의 대화가 왜 저렇게 화목해 보이냐는 거다.

분명 사적으로는 처음 만나는 자리일 텐데,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슬쩍 문틈 사이를 통해 안쪽을 들여다봤다.

“미친 저게 뭐람.”

집무실에 있는 테이블에는 와인 수십 병이 올라와 있었다.

그냥 올라와 있으면 다행이지, 이미 시음을 했는지 코르크 마개가 따진 와인 병이 보인다.

나는 다소 당황했다.

내가 알기로 카르시온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는데.

“백작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더 뿌듯합니다. 그럼 이것도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건……! 현 황제 폐하의 즉위를 기념해 신성력을 담아 만든 귀한 백포도주가 아닙니까!”

흥분한 백작님이 급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아……. 이걸 실제로 보게 되다니, 저는 애주가로서 이제 모든 꿈을 다 이뤘습니다.”

“원하신다면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놀란 백작님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과분한데 이 귀한 걸 어찌…….”

“저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카르시온이 아까 이모에게 했던 것과 같은 사람좋은 미소를 짓는다.

“애초에 리엔에게 주려고 모은 것이기도 하고요. 리엔의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백작님께 드리는 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나는 나지막이 감탄했다.

애주가라는 점을 이용해 저런 식으로 구워삶았군.

그의 말만 들으면 아주 일등신랑감이 따로 없었다.

귀한 와인을 선뜻 내줄 만큼 재력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침과 동시에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까지 증명해 낸 셈이었으니까.

그때 백작님이 다소 우울해진 기색으로 카르시온에게 물었다.

“……리엔이 술을 즐깁니까?”

아.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된 후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구나.

나와 술을 마실 날이 기대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백작님이셨는데.

“아니요. 잘 마시기는 합니다만,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 왜……?”

“리엔이 마시고 싶다고 할 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 구해 놓았습니다.”

백작님은 다소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그런 이유로 이런 비싼 걸 모으냐는 얼굴이었다.

“그, 그렇군요.”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리엔에게 주려 했던 것이라면 그 아이에게 주시지요. 저는 제 아이의 선물을 뺏을 만큼 유치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와인 병을 바라보는 백작님의 눈은 아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자 카르시온이 눈을 접어 올리며 와인을 내밀었다.

“저는 보관용, 장식용, 시음용. 이렇게 3개를 가지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에 백작님이 깊은 감명을 받은 듯 입을 틀어막는다.

“카르시온 소공작님은 정말 배우신 분이군요……!”

“리엔에 비해 아직 한참은 모자랍니다.”

백작님이 카르시온의 두 손을 잡고 눈을 반짝였다.

“혹,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대작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하하, 사실 리엔이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오면 꼭 그 놈팡이…… 아니, 예비 사위에게 질문해 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피식 웃고 있던 나는 저 말을 듣고 정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기억하는 질문 대다수가…….

부모님과 리엔이 동시에 물에 빠졌다면 누구부터 구할 것인가?

리엔이 살인을 했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양가 부모님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한다면?

따위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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