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나는 몰래 그들을 지켜보던 것을 그만두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백작님……!”
두 남정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둘은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리엔!”
그러다 서로를 의식했는지 경쟁하듯 발걸음을 빨리한다.
내게 먼저 당도한 것은 젊은 피와 긴 다리를 소유하고 있는 카르시온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는 나를 안지 않았다. 대신 몸을 옆으로 슬쩍 비켜주었다.
……미련 가득한 눈을 하고서는 말이다.
0.5초 차이로 뒤늦게 도착한 백작님이 먹먹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오랜…….”
서먹한 분위기에, 인사라도 건네려던 순간 그가 나를 돌연 세게 끌어안는다.
“리엔…….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정말 많이 자랐어.”
“하하, 백작님은 저 볼 때마다 그 소리인 것 같아요. 사실 하나도 자라지 않았는데.”
“키를 말한 게 아니야. 성숙해졌다는 거지.”
백작님의 목소리가 살짝 서글퍼진다.
“그 작던 아이가 불쑥 아카데미로 가더니 어느덧 혼인할 나이가 되어서 남자도 데려오고 말이야…….”
백작님과 떨어진 나는 멋쩍게 웃으며 뒷덜미를 만졌다.
“사실 저는 이모와 백작님이 저를 꾸중하실 줄 알았어요.”
대뜸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한 것도 갑작스러우셨을 텐데, 1학년 이후 한 번도 찾아뵈러 오지 않았으니까.
서운하고 당황스러우셨겠지.
“좀 더 자주 방문했었으면 했지만 그건 욕심이라 생각했다. 네가 싫다는데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모 부부가 내게 그 정도 요구를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에르한이나 루카였다면 이미 등짝에 불이 났겠지.
하지만 이모 부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사정이 있었지만, 겉으로만 봤을 때 그들을 밀어낸 것은 나였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싫지 않아요. 백작님과 이모가 싫어서 오지 않았던 게 아니었어요.”
나는 슬픈 감정을 억누르고 활짝 웃어 보였다.
“자주 올게요. 그동안은 바빠서 오지 못했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모든 걸 해결했으니까.
“……정말이니?”
“그럼요.”
“약속하거라.”
백작님은 어린아이처럼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만큼 절실했다는 거겠지.
나는 옅게 웃으며 손가락을 마주 걸어주었다.
“이곳은 제게 친정인걸요.”
“친정이라니. 듣는 이모부 서운하니까 벌써 남의 딸이 된 것처럼 말하지 말거라.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넌 우리 딸이야.”
“시집가도 저는 이모와 백작님의 딸인걸요.”
“허허,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구나.”
나는 옅게 웃으며 모르는 척 물었다.
“그나저나, 카온과는 무슨 대화를 하고 계셨어요?”
기다리고 있던 주제였는지 백작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잘 왔다, 리엔. 카르시온 소공작님께 몇 가지 질문을 하려던 참이었어.”
“하.하.하. 설마 제가 아는 그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니. 내가 꽤 자주 언급했던 것 같은데. 네 정혼자가 나타나면 꼭 질문하겠다고.”
나는 그것에 대꾸하는 대신 테이블에 널브러져 있는 와인 병을 한 번, 백작님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며 싱긋 웃어 보였다.
“흐응. 그래서 와인을 마시고 계셨던 건가요? 대낮에 음주라니. 이모는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분명 술을 줄이기로 약속했다고 이모의 편지에서 본 것 같은데.
흠칫.
“대, 대낮이라기에는 조금 있으면 저녁을 먹어도 될 시간이잖니. 많이 마시지도 않았단다, 하하.”
“그럼 이모께 말해도 당당할 자신이 있으시다는 거군요. 당장 이모를 불러와야…….”
“리, 리엔!”
내가 당장이라도 이모를 불러올 듯 등을 돌리자 백작님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보던 카르시온이 내 손을 살짝 잡아 왔다.
“리엔. 좋은 날이니까 오늘은 눈감아 드리는 건 어떨까? 나도 그 질문이라는 게 궁금하기도 하고.”
“……후회할 텐데.”
“그래도 궁금하다면?”
당사자가 질문이 궁금하다고 하니 막을 이유가 없어졌다.
솔직히 뭐라고 답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리고 리엔 너도 이미 우리 부모님의 시험을 통과했잖아. 나도 잘 이겨내볼게.”
“……시험?”
그런 걸 하셨었나.
그냥 내게 엄청 잘해주신 것밖에 없는 것 같은데.
카르시온의 말에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백작님이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소공작님은 적어도 결혼하면 잡혀 살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뾰족해진 눈초리로 백작님을 노려봤다.
“다 들리거든요?”
백작님이 이크 소리와 함께 딴청을 피운다.
“방금 잡혀 산다고 하셨습니까?”
장난으로 한 말에 카르시온이 퍽 진지하게 되묻자 백작님이 의문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리엔이 날 잡는다고?”
카르시온은 잡는다는 말에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수줍게 볼을 붉혔다.
그것을 본 백작님은 아련한 얼굴을 했다.
“……이미 꽉 잡혀 있었군.”
결국, 나는 백작님이 이모 몰래 술을 마셨다는 걸 눈감아 주기로 했다.
카르시온은 마법으로 테이블을 말끔히 치우고 난 후 백작님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나는 언제든 말릴 준비를 하려 백작님의 옆에 앉았고.
카르시온이 살짝 입술을 내밀고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지금 질문드리는 것은, 사뭇 장난처럼 들릴 수 있으나 진지하게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 제 답이 마음에 차지 않으시면 저와 리엔의 혼인을 반대하실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문답이 오간 뒤에야 알 수 있겠죠.”
카르시온은 백작가에 들어오기 전, 긴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퍽 여유로운 얼굴로 씩 웃었다.
“열심히 답해보겠습니다.”
백작님은 양손에 깍지를 끼며 턱을 댔다.
“부모님과 리엔이 동시에 물에 빠졌다면 누굴 구하시겠습니까?”
나왔다, 저 질문.
나는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뭐라고 답할까.
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제 부모님은 물에 빠질 만한 분들이 아니십니다만.”
그건…… 그렇지.
두 분 다 대마법사에 가까운 분들이었다. 물에 빠지기 전에 무슨 수를 취하실 터였다.
빠졌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탈출 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끼어들지 않으려 했건만.
나는 참지 못하고 불쑥 손을 들었다.
“저도 수영은 잘하는 편이라 도움 필요 없는데요.”
“……가정이지 않니.”
예상과는 다른 답변에, 백작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카르시온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럼 세 사람 모두 물에 빠졌다고 가정하고 반드시 소공작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할 때, 누구를 구하시겠습니까?”
“세 명 다 구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정석과는 다른 대답에 백작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한 명만 골라야…….”
“저는 그런 간단한 일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아닙니다.”
“간단……?”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백작님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카온은 마법사잖아요.”
그것도 그 유명한 리시안셔스 가문의 후계자.
카르시온이 뒤늦게 덧붙인다.
“아. 물론 한 명만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리엔을 구할 겁니다.”
당황하던 백작님은 대충 마지막 대답에 만족하기로 한 듯 다음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다음 질문을 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리엔이 누군가를 죽이고, 그 사실을 소공작님께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리엔이 직접 누군가를 죽인 상황인 겁니까?”
“네.”
카르시온은 그 상황에 이입한 듯 불현듯 내 손을 잡아 왔다.
“리엔.”
“으응…….”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자 진지한 얼굴로 내게 당부한다.
“혹시라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한테 먼저 말해. 네 손이 더러워지잖아.”
“……안 죽여.”
그러고 보니 아바스칸투스 황자인 쿤이 내 앞에 쓰러져 있는 걸 봤을 때도 저런 말을 했었지.
진심인 게 분명했다.
“……이것도 괜한 질문이었던 것 같군요.”
백작님의 표정에서 ‘이게 아닌데.’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백작님은 결국 아껴 놓았던 질문을 하기로 한 듯 뭔가 결심한 얼굴을 했다.
“이번 질문은 제대로 된 답을 받을 수 있겠군요.”
아. 그걸 물어보려고 하시는군.
확실히 그 질문은 이전 질문처럼 엉뚱한 대답으로 넘길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카르시온은 둘 다 진지하게 답한 것 같지만.
카르시온이 여유로운 낯으로 입을 뗐다.
“준비됐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이번에도 고민 없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백작님, 이건 저희의 결혼입니다.”
그러자 백작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제가 리엔의 결혼에 왈가왈부할 위치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까? 친부가 아니라서?”
“아니요. 그랬더라면 제가 이렇게 백작님과 대화하는 일도 없었겠지요.”
그의 눈매가 휘어진다.
“저는 리엔의 의사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희 부모님이 반대하시더라도 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자기가 불 속성 효자라는 걸 아주 당당히도 말하네.
백작님은 잠시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공작님께서 평민과 마음대로 혼인했다는 이유로, 공작 위를 물려주지 않는다 하시면 어쩌시겠습니까?”
“백작님.”
카르시온은 눈을 휘어 접으며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제게 공작의 자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리엔만 있으면 됩니다. 정말로요.”
“…….”
백작님은 한참이나 카르시온의 벽안을 응시했다. 그러다 픽 하고 웃음을 토해 낸다.
“리엔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소공작님도 소문과도 사뭇 다른 모습에 안심했고요. ……조금 살벌하긴 했지만.”
그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가볍게 묻는다.
“이건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만, 리엔은 소공작님의 어떤 점을 좋아합니까?”
왜 내가 아니라 카르시온에게 질문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쉬운 질문이었다.
내가 그에게 반한 부분이야 수십 가지가 넘었으니까.
“리엔이 좋아하는 것…….”
하지만 카르시온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는지 조금 자신 없게 대답한다.
“얼굴……?”
“얼굴을 제외한다면?”
얼굴을 제외하라는 말에 카르시온은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뺨을 붉히고는 머뭇거리며 답한다.
“밤 일……?”
미친.
말려야 할 건 백작님이 아니라 카르시온의 주둥이였다.
충격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백작님에게 그런 거 아니라고 변명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벌컥-!
노크도 없이 방 안에 들어온 불청객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불청객은 바로 화장실에 들렀다 온다던 이모였다.
“이모……?”
“여보……?”
이모는 무언가에 북받친 듯 한참을 홀로 씩씩거리다가 외쳤다.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