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나는 어버버 거리며 멍하니 이모를 바라보았다.
도란도란 대화가 끊기지 않았던 집무실에 정적이 일었다.
이모는 몰린 시선과 정적에도 굴하지 않고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엔. 이모는 두말할 거 없이 찬성이란다.”
“……혹시 카온이 방금 한 말을 듣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왜 아니겠니. 이모가 결혼해 봐서 아는데, 얼굴과 더불어 그건 정말 큰 장점이란다.”
백작님은 이모와 달리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닌지 얼굴을 굳힌 채 혼잣말을 뱉어냈다.
“우리…… 리엔이, 벌써……?”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뇌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변명했다.
“밤일이라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백작님이 생각하시는 그게 아닐지도 몰라요.”
“여러 의미라면 예를 들어?”
“……암살?”
백작님의 안색이 푸르죽죽해진다.
생각해 보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심각한 일이었다.
상황이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원망스레 카르시온을 노려봤다.
전에 내가 제인과 한스에게 말할 때는 부끄러워하더니.
왜 하필 이모네 부부 앞에서 당당해지냐는 말이다.
그때 이모가 살풋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걱정 말렴. 사실 네 이모부도 성인이 되자마자 나랑 일을 치른 건 똑같단다.”
전혀 위로되지 않는 말이었다.
내가 창피한 것은, 친구가 아닌 부모님과도 같은 이모 부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모는 나를 달래려는 듯 티가 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리엔, 오늘은 집에서 자고 가는 거지?”
그 말에 카르시온을 힐끗 바라보았다. 자신은 상관없다는 표정.
그러나 나는 거절을 입에 담았다.
“아쉽지만 오늘은 리시안셔스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공작 부부님께 늦지 않게 오겠다고 말씀드려서 기다리실 거예요.”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이곳에서 잠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고백한 사실을, 이모가 백작님과 루카에게 전해야 하는 만큼 더더욱.
놀란 백작님이 내게 뭐라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이모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 마음을 눈치 챈 듯했다.
자세히 보니 웃는 이모의 눈가가 묘하게 붉어져 있다.
……몰래 울기라도 하신 건가.
이모는 그런 적 없다는 것처럼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저녁은 먹고 가렴. 주방장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해 줄 거야.”
“가지는 빼주실 거죠?”
그렇게 카르시온과 나는 이모 부부와 저녁까지만 함께한 후 백작가를 나섰다.
“좋은 분들이시네.”
카르시온의 말에 나는 그의 가슴께를 툭 쳤다.
“아까 낮에는 결혼 허락 어쩌고 하면서 긴장한 것 같더니, 말 잘하더라?”
“리엔이랑 하나도 안 닮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긴장이 안 되더라고.”
“아아 그치? 나만 붕 뜨긴 해.”
백작가 모두 금발이었지만, 나는 먹을 칠한 듯 홀로 다른 색이었으니까.
내 반응에 카르시온의 눈에 당황이 그려졌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괜찮아. 틀린 말도 아니고 딱히 그걸로 슬픈 적은 없었어.”
나는 내 외모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얼굴은 엄마를 쏙 빼닮았고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아빠에게서 전부 물려받은 흑발 흑안.
거울을 볼 때마다 내가 엄마 아빠의 자식이라는 것을 확인받는 것 같달까.
역시 나도 카르시온과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카온, 우리 아바스칸투스에 다녀오면…….”
“잠시만!”
카르시온이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는다. 내가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이유를 설명했다.
“……그거 너무 플래그 꽂는 말 같았어, 리엔.”
아. 결혼하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내 파멸의 주둥이가 또 일을 낼 뻔했군.
“아바스칸투스에 놀러 갔다가 괜히 눌러 살게 되는 거 아니야?”
카르시온의 걱정에 나는 그의 손을 떼어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왜 거기서 살아? 내 가족은 전부 라그라스에 있는걸.”
***
“뭐? 리엔이 벌써 도착했다고? 심지어 저택 앞이야?”
평소와 같이 서류를 보고 있던 카리스는 집사가 전해 온 소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인이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할 빠릿빠릿한 움직임이었다.
리엔에게 편지는 받았지만, 이렇게 이르게 도착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워프 게이트를 타더라도 일주일은 족히 걸리는 거리일 텐데.
“가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마중을 나가야…….”
“대공님. 어떤 심정인지는 알겠습니다만, 조금만 고정하십시오.”
그때였다. 마침 카리스 대공의 수도 저택으로 방문했던 쿤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집사. 함부로 말하지 말게. 자네가 어떻게 대부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무려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것도 십수 년간 존재조차 모르다가 겨우 알게 된 아이.
그런데도 차마 손녀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워 감히 얼굴 보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나이가 지긋한 집사는 쿤의 지적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고개를 숙였다.
“실언했습니다.”
쿤은 긴장으로 얼굴이 하얗게 변한 카리스를 부축했다.
“제가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대부님은 천천히 마음을 추스르고 나오십시오.”
“……배려 감사합니다.”
카리스는 호흡을 고르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액자가 시야에 담겼다.
그는 급히 집사에게 명령했다.
“내가 시간을 끌테니, 리엔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까지 저택 곳곳에 걸려 있는 가족 초상화를 모두 거둬라.”
“알겠습니다. 다만, 중앙 현관에 있는 도련님의 초상화는…….”
갑작스럽게 치우기에는 너무나도 큰 초상화였다. 급하게 치우다가 파손될 위험도 있었다.
루드가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하며 그려 놨던 대형 초상화.
그때는 지금처럼 사진이라는 기술이 없어서 얼굴을 남기려면 날을 잡고 화가를 불러 그려야 했다.
따라서 사진처럼 여러 장을 구비해 놓을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건 천으로 덮어 놓는 게 좋겠군.”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카리스는 학술제 이후 보는 손녀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포티투아 대공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엔이 드레스 끝을 잡고 카리스에게 인사했다.
그 모습이 몇 년 전 봤던 모습과 다르게 퍽 성숙해 보여서.
그래서 카리스의 마음이 더욱 미어졌다.
조금 더 빨리 용기를 냈더라면 얼굴에 젖살이 빠지는 과정을 볼 수도 있었겠지.
카리스가 오래간 말이 없자 리엔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대공님?”
“호칭이…….”
“네?”
“크흠흠. 호칭이 바뀌었군.”
“아. 그때는 대공님의 신분을 몰라서……. 죄송했습니다.”
“아니다. 나는 예전의 그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더 정겹고 마음에 들어.”
리엔은 뜻밖의 수확에 기쁘게 웃으며 답했다.
“대부님께서 그러시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는 할아버지라 불러도 될까요?”
흡족한 대답이었는지 카리스의 입매가 풀어진다.
“그럼 그럼.”
화목한 둘 사이에 쿤이 껴들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뭐가? 아, 아니 뭐가요?”
리엔은 아카데미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반말을 내뱉었다가 급히 말을 정정했다.
“편히 말해 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리엔.”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는 모습에 리엔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자신도 반발이 편하긴 했다.
“그래서, 뭐가 곤란하다는 건데?”
“카르시온 소공작은 입궁을 허락받지 못했으니 폐하께 다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제야 카리스의 시선이 리엔의 옆에 있는 카르시온에게로 향한다.
손녀인 리엔에게만 집중해, 있는 줄도 몰랐다.
‘서로 좋아한다고 했나.’
하긴 먼 타국인 아바스칸투스에 호위도 없이 단둘이 올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닐 터였다.
카르시온을 보는 카리스의 눈에 저도 모르게 살기가 들어간다.
카리스의 살기를 느낀 카르시온은 똑같이 살기를 뿜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카리스가 리엔에게 친한 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카르시온이었다.
둘의 눈빛이 첨예하게 맞붙던 때였다.
리엔이 그게 왜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추가로 허가받을 필요 없이 나 혼자 입궁하면 되잖아? 폐하를 뵙는 건 잠시면 되니까.”
“저도 그게 편하기야 하지만…….”
쿤의 시선이 카르시온에게 향한다.
“저와 입궁하는 걸 소공작께서 허락할지는 모르겠네요.”
리엔이 카르시온을 바라보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안 돼. 혼자는 위험하잖아.”
“누가 보면 리엔을 노리는 살수라도 심어 놓은 줄 알겠습니다.”
쿤은 카르시온을 설득해 보려는 듯 말을 늘어놓았다.
“리엔은 폐하께서도 허락한, 엄연한 아바칸투스의 손님이지요. 호위 기사가 붙을 겁니다. 게다가…….”
그가 말을 흐리며 카리스를 바라봤다.
리엔을 건드렸다간 제 대부님의 검에 흔적도 없이 다져질 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르시온이 으르렁거리며 리엔을 꼭 끌어안았다.
“안 돼. 라그라스에서도 산전수전 다 겪은 리엔이야. 여기에서 안 그러라는 법 있어?”
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다.
“복잡하게 됐군요. 하필 다른 가문도 아닌 리시안셔스라서.”
리시안셔스는 제국 전쟁 당시 아바스칸투스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던 가문이었다.
카리스가 아바스칸투스의 전쟁 영웅이라면 라그라스의 전쟁 영웅은 리시안셔스 전대 공작이랄까.
때문에 아바스칸투스 황제는 아직도 리시안셔스를 꺼렸다.
쿤의 말에 카르시온이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입을 연다.
“아, 그러고 보니 제 할아버지를 죽인 게 대공이셨지요.”
카르시온이 카리스를 보며 사르르 웃었다.
“가문의 원수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제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하나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카리스를 긁기 위해 말을 꺼냈다.
카리스가 덤덤하게 답한다.
“그대 할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겠지.”
“그래서 당당하시다?”
오히려 놀란 건 리엔이었다. 그녀가 카르시온과 카리스를 번갈아 보며 눈치를 봤다.
그것을 눈치챈 쿤이 상황을 정리한다.
“두 분 다 눈에 힘 좀 푸시지요. 리엔이 당혹스러워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두 남정네의 드센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든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짐부터 푸는 게 좋겠습니다.”
쿤이 어느새 뒤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하자 그가 리엔을 저택안으로 안내한다.
카르시온은 당연하다는 듯 리엔의 뒤를 따랐다.
쿤이 그런 카르시온의 손목을 붙잡는다.
“카르시온.”
카르시온의 무심한 눈이 쿤을 향했다.
“왜, 아까처럼 소공작이라 부르지 않고.”
“당신을 위해 조언하는 겁니다만, 대부님께 너무 막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왜?”
쿤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혹시나 싶은 얼굴로 묻는다.
“혹시 리엔의 이모와 만난 적 있습니까?”
“만났지. 만나서 결혼 허락도 받았는데.”
움찔.
쿤이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가 풀었다.
“그럼 그분께도 이런 태도를 보이고 결혼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리엔의 가족인데 그럴 리가.”
그 말에 쿤이 기쁜 듯 활짝 웃음 지었다.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