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카르시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의미심장한 말은 뭐란 말인가.
마치 카리스 대공이 리엔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리엔과 카리스의 뒤통수에 닿았다.
결 좋은 흑발을 가진 두 명이 나란히 서 있으려니 할아버지와 손녀를 보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아바스칸투스 사람이라고 말한 적 있었지.
게다가 카리스 대공이 리엔에게 보내는 애틋한 눈빛 하며 저를 경계하는 눈빛까지.
“설마…….”
하지만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바스칸투스의 대공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평민으로 사는 리엔을 그냥 두고 있던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카르시온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기 가득한 쿤을 무표정으로 스쳐 지나갔다.
설령 이 가정이 진짜라고 해도 카리스에 대한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진짜라면 괘씸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신분 때문에 온갖 고생은 다 겪은 리엔이었다.
카리스 대공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거라면, 지금껏 리엔을 찾지 않다가 왜 이제 와서야.
리엔의 정신이 안정을 찾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서 친할아버지의 등장이 그녀의 정신 건강에 도움 될까 한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카르시온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그는 괜히 리엔의 감정이 들쑤셔지지않기를 바랐다.
“내 가정이 틀렸으면 좋겠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 현관에 크게 자리한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흰색 천으로 덮여 있어 안쪽에는 어떤 그림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리엔은 그 앞에 멈추어 서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카리스 대공에게 물었다.
“와, 엄청 크네요. 이 액자는 무슨 그림인가요?”
잠시 몸을 움찔한 카리스가 괜히 한번 목을 가다듬고 답했다.
“큼, 가족의 초상화란다.”
“아…….”
리엔은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카리스 대공에게 마땅히 대공의 작위를 물려줄 후계자가 없다는 건 유명한 사실.
그렇다면 저 그림은 죽은 아내나 자식의 초상화겠지.
서둘러 어색한 표정을 지워 내며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다음에.”
“네?”
카리스의 의미 모를 말에 두 눈을 깜빡이자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보여 주마.”
“어……. 네, 기대할게요.”
그런 둘을 바라보던 집사는 대화가 끝난 것을 깨닫고 다시 리엔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집사가 안내하는 곳을 따라 오른 방향으로 걸어가자 카르시온이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간다.
그때 카리스가 카르시온의 어깨를 턱, 하고 붙잡았다.
“자네는 그쪽이 아닐세.”
카리스가 가리킨 곳은 리엔이 가는 방향과 정반대인 곳이었다.
카르시온이 빙그레 웃었다.
“저는 이쪽이 좋은데요.”
“……거기는 남는 방이 하나밖에 없네.”
“리엔과 같은 방을 쓰면 됩니다.”
“남녀가 유별한데 어딜 감히!”
카리스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몸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카르시온은 태평하기만 했다.
“죄송하지만.”
카르시온은 예전에 리엔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리엔은 저 없이 못 자는 몸이라서요.”
그러고는 얄밉게 눈꼬리를 휘어 접는 카르시온이었다.
“……뭐? 누구 없이는 못 자?”
카리스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리엔을 바라보자 그녀가 어색하게 목덜미를 매만졌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최근에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서 카온이 없으면 잠을 잘 자지 못해요.”
그것 보라는 듯 카르시온이 여유로운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카리스의 얼굴이 충격과 배신감으로 얼룩지자 그 반응에 조금 당황하던 리엔이 급히 입을 열었다.
“……그,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은 게! 한 침대를 쓴 것도 꽤 된 일이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는 사이라서요!”
하지만 그 말은 카리스를 달래지 못했다.
오히려 동침을 오랫동안 했다는 말에 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렇군…….”
시든 꽃처럼 쪼그라든 그를 보며 리엔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렇게 충격을 받으신 거지? 대공님은 쿤과 나를 이어 주고 싶으셨던 건가?’
지금 보니 힐끔 확인한 쿤의 표정도 가관이었다.
하긴, 아직도 감정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볍게 듣고 넘길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고, 동거에 동침까지 하고 있었다니.
‘와, 나 같으면 이미 울었다.’
리엔이 쿤에게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전하고 있을 때 카르시온이 승자의 얼굴로 선언했다.
“그럼 리엔에게 확인도 받았으니 저는 같은 방을 쓰겠습니다.”
“…….”
카리스는 답이 없었다. 그저 고요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리엔은 어쩐지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며 눈치를 보다가 집사를 툭, 쳤다.
빨리 방으로 안내하라는 뜻이 담긴 터치였다.
집사는 프로였다.
곧바로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고 걸음을 옮겼다.
“그, 그럼 짐부터 풀고 오겠습니다. 말씀하실 게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카르시온은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리엔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둘만 덩그러니 남겨진 중앙 현관에서 카리스가 섬뜩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오랜만에 검을 잡을 일이 생긴 것 같군.”
넘실거리는 살기에, 퍼뜩 카리스가 진심이라는 것은 깨달은 쿤이 그의 허리춤을 살폈다.
다행히 검을 갖고 계시진 않았다.
하지만 카르시온을 다시 마주치기 전, 분노를 조금이나마 풀어 드려야 할 것 같은데…….
쿤은 넌지시 말했다.
“오랜만에 기사들과 대련을 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카리스의 발이 연무장 쪽으로 향한다.
쿤이 눈을 감으며 아바스칸투스와 라그라스의 평화를 위해 희생당할 기사들에게 애도를 보냈다.
***
카르시온이 아공간에 넣어 두었던 짐을 방 안에 차례차례 꺼내놓았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다리를 살랑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카온, 대공님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느 부분이?”
“음. 필터 없이 솔직히 말하면, 언제 봤다고 저렇게 친한 척하시는지 모르겠어.”
“풉.”
카르시온이 급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아니 그렇잖아. 너한테도 그러는 거면 원래 다정하신 분이구나 할 텐데, 너는 완전 이방인 취급이던걸.”
물론 카르시온이 대공님께 막 나간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네가 하필 리시안셔스 가문의 사람이라서 그런가…….”
“푸하하!”
카르시온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긴 거야?”
“그냥 뭔가 그 대공님한테 이긴 것 같아서 기분 좋네.”
유치하긴.
나는 픽 웃으며 그가 꺼내 놓은 짐가방을 열어 봤다.
“그보다, 대공님이 제국 전쟁 때 네 할아버님을 죽이셨다는 게 진짜야?”
어느새 눈물까지 찔끔 흘린 그가 물기어린 눈가를 매만지며 답한다.
“응. 진짜지 그럼.”
“대공님 보는 게 껄끄럽겠다.”
“괜찮아. 할아버지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아버지도 별로 할아버지에 대해 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카르시온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럼 가문의 원수 어쩌고 한 건 그냥 대공님에게 시비를 걸려고 꺼낸 말인가.
단지 시비를 걸기 위해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소환하다니…….
카르시온을 보는 내 눈빛이 흐려지고 있을 때였다. 그가 호기심 어린 눈을 하며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리엔의 조부모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지. 친가 외가 양쪽 다 없었으니까.
“음. 일단 외가인 백작가 쪽은 할아버지가 제국 전쟁에서 전사하시고, 할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십수 년간 이어졌던 제국 전쟁으로 인해 전쟁에 참전한 귀족들도 상당수가 죽었으니까.
“친가 쪽은…….”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나도 알고 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단 하나, 내가 할아버지와 관련해 아빠에게 전해 들은 건…….
내가 쉬이 입을 열지 못하자 카르시온이 다른 질문을 꺼냈다.
“리엔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
“다정한 사람.”
그 한 단어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었다.
“엄마와 날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분이셨지. 요리도 잘하고 가정에 충실하시고. 최고의 아빠였어.”
가끔은 장난이 지나쳐서 문제긴 했지만.
“그때는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하는 게 꿈이었는데.”
“……질투나.”
카르시온이 입술을 내밀며 작게 툴툴거렸다.
아니, 왜 내 아빠한테까지 질투하는 건데.
귀여운 질투에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난 더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아.”
기습적인 입맞춤에 그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리엔, 이렇게 갑자기……!”
나는 흥분하지 말라는 의미로 그의 입술에 몇 번 더 입을 맞췄다.
그제야 조용해지는 카르시온.
“그리고 아까 대답하지 못한 답을 들려주자면…….”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다정히 쓸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사색이 되셨어. 말하기 굉장히 꺼리셨지.”
어쩌면 아빠는 아바스칸투스 귀족의 사생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밑에서 모진 학대를 받았다든가…….
“아빠가 내게 할아버지에 관해 말해 준 건 딱 하나야.”
“……그게 뭔데?”
“혹여나 할아버지를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순간 카르시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유는?”
“이유는 나도 잘…….”
그때였다. 저택 어디선가 남성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연속적으로 말이다.
나는 카르시온과 시선을 교환하다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고는 주변의 아무나를 붙잡고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하인은 지금도 들리고 있는 처절한 비명 소리에도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연무장에 가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연무장?”
단지 검술훈련을 하는 것뿐인데 저런 비명을 지른다고?
……궁금한 건 못 참지.
“연무장까지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하인의 안내로 카르시온과 함께 도착한 연무장.
그곳에서 내 시야에 처음으로 담긴 것은, 시체처럼 널려 있는 기사들과 그 앞에 유유히 서 있는 대공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