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다음.”
대공님의 고저 없이 낮은 음성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한쪽에 널브러진 기사들은 아직도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날 생각조차 못 했다.
“다음!”
대공님의 부름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 한 명이 사형장에 끌려 나오는 것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왔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기사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대공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현역 기사가 은퇴한 지 수십 년은 지난 늙은이 앞에서 벌벌 떤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저런 위압감을 풍기고 있는데 눈 마주치고 실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말이 은퇴한 노인이지 한 나라의 전쟁 영웅인,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게다가 오러를 단련한 사람의 실력이, 나이 조금 먹었다고 금방 떨어질 리 없었다.
대공님의 실력이면 아마 일 백 살이 넘어도 창창하실 터였다.
기에 눌린 기사가 공황 상태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결국 대공님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그런 정신머리로 제국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나! 당장 검을 들어라!”
챙-!
기사는 검을 들었지만, 대공님과 3합이 채 되기 전 떨어져 나갔다.
“다음!”
대공님이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묘하게 아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검술부였던 피오르가 검을 잡은 모습을 볼 때는 전혀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나는 검술에 문외한이라 아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만, 듣기로 아바스칸투스의 검술은 공격에 더 치중되었다고 들었다.
라그라스는 효과적으로 방어를 하는 것에 더 치중되어 있고.
“……그러고 보니 우리 아빠는 아바스칸투스 사람이셨지.”
어.
내 옆에 있던 카르시온이 방금 조금 움찔 한 것 같은데.
나는 그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갔다.
흠. 그래서 아바스칸투스의 특징이 녹아있는 검술을 쓰는 아빠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대공님이 흔치 않은 흑발에 흑안인 것도 한몫했고.
아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검술 훈련을 했었다.
가끔 눈이 일찍 떠지는 날에는 그런 아빠를 구경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새 몇 명을 더 처리한 듯 대공님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아까 그 건방진 것도 그렇고, 요즘 젊은것들이란…….”
오, 꼰대의 정석 같은 발언.
한창 대공님이 기사들을 별 모양으로 갈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오늘 대공님 기분이 왜 저렇게 안 좋으셔?”
“몰라. 최근에 귀한 손님이 오신다며 내내 좋으셨지 않아?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이람.”
“설마 제4 기사단인 우리 차례까지 오지는 않겠지?”
“대공님께서 기사들을 쓰러뜨리는 속도를 보면 희망은 지금 버려 놓는 게 좋을 것 같기도…….”
“오늘 저택에 오신 손님이 누구였길래 그래?”
“2황자 전하께서 아카데미에서 친하게 지냈던 분이래. 그 왜 최근 몬스테라 감염병 확산을 확 막은…….”
내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더욱 귀를 기울여 대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불현듯 카르시온이 내 귀를 막는다.
왜 하필 재미있어지려는 찰나에……!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카르시온이 옅게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들어가자, 리엔.”
나는 카르시온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평소와 달리 그의 얼굴이 다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마자 발밑으로 마법진이 떠오르며 배경이 바뀌었다.
대공님이 내게 내어 준 방이었다.
“리엔.”
카르시온이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며 내 손을 잡아 온다.
“꽈리는 내가 어떻게든 거래를 틀 테니 너는 라그라스로 먼저 돌아가는 건 어때?”
나는 그런 카르시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공님은 내게 호의를 갖고 계셨지만, 카르시온에게는 아니었다.
꽈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면 내가 직접 거래를 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카르시온이 아니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알려 줄 거야?”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게 되물었다.
“알려 줄 수는 있지만, 답해 주기 싫다면 화낼 거야?”
카르시온은 극단적이다시피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답해 주기 싫은 것도 내가 듣지 않기를 바라서 그런 거겠지.
카르시온에게 아바스칸투스로 여행 가자는 투로 말을 하긴 했으나 이곳으로 온 궁극적인 이유는 꽈리였다.
아바스칸투스에서만 자라는 꽈리를 적정가에 안정적으로 수급하기 위해.
그 목적을 져버리면서까지 날 라그라스로 보내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카르시온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를 믿었으니까.
“아니,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내 대답에 전전긍긍하던 카르시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오늘 바로 라그라스에…….”
“하지만 바로 라그라스로 돌아가는 건 문제가 있어. 황제의 초대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약소하게나마 인사를 드려야 해.”
그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지만, 이것만큼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아바스칸투스의 황제를 만나면 바로 라그라스에 돌아간다고 약속할게.”
***
저녁은 황궁으로 돌아간 쿤을 제외하고 카르시온, 리엔, 카리스 이렇게 셋이 함께했다.
음식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쓴 태가 났다. 맛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공은 리엔이 먹는 모습을 보며 이것저것 묻기 바빴다.
막상 그는 몇 입 먹지도 않았다.
카르시온은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쿤이 던져 준 힌트가 아니었다면 대공의 출처를 알 수 없는 호의에 의심이 생겼을 텐데.
대공이 리엔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면 저 애틋한 눈빛도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리엔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당부했다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누가 자식에게 그런 당부를 한단 말인가. 사이좋은 관계였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말이었다.
카르시온은 리엔이 잠에 든 것을 확인한 후 침실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포티투아 저택의중앙 현관.
대공의 죽은 가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던 곳이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천을 걷어 내자 젊은 청년의 초상화가 보였다.
흑발에 흑안.
장난스럽게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린 청년이었다.
리엔과 닮은 점은 글쎄.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은 다소 비슷해 보였지만, 이목구비가 닮은지는 잘 모르겠다.
카르시온은 그림의 모서리 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보통 이런 초상화는 오른쪽 맨 아래에 화가의 사인과 함께 인물의 정보가 적혀 있다.
<이벨루안하르드 포티투아 / 루드의 성년을 기념하며.>
그는 이름이 적혀 있는 부분을 천천히 쓸었다.
언젠가 리엔에게 들은 적 있다.
제 아버지의 이름은 ‘하르드’라고.
“이 밤중에 방에서 나와 도둑처럼 무얼 하는 건가 소공자.”
카르시온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카리스 대공.”
그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그를 이곳으로 유도한 것이었다.
기운에 민감한 대공이 자신이 리엔의 방에서 나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채지 못할 리 없으니까.
카르시온은 그를 떠보거나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당신이 리엔의 할아버지인가?”
“말본새하고는. 보는 사람 없다고 바로 말을 놔버리는 건가?”
“리엔이 손녀인 걸 알면서도 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지?”
자신의 말은 무시하는 카르시온에게 다소 어이없음을 느꼈다.
이렇게 자신을 홀대하는 사람도 참 오랜만이었다. 황제도 자신에게는 한 수 접어줄 정도이거늘.
게다가 저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올 줄은 몰랐다.
“……모르는 척한 게 아니다.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그럼 계속 모르는 척하지 왜 이제 와서 친한 척이지? 역겹게.”
역겹게.
그 말이 카리스를 정통으로 찔러 들어왔다.
“당신이 그 알량한 용기를 얻을 동안 리엔이 지금껏 홀로 어떻게 버텨 왔는지는 알고 있나?”
“버티다니? 리엔은 분명 제 이모의 사랑을 받으며 아카데미에서 잘 지내고 있었…….”
“잘 지내? 하, 하하!”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크게 웃던 카르시온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이란 말 못 들어 봤어? 당신이 듣고 본 게 리엔의 전부일 것 같아?”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카리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리엔이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서.’ 카르시온이 없으면 잠을 잘 자지 못한다고 했지.
“리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소공작.”
카르시온은 카리스의 물음에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걸 당신이 알 필요가 있을까?”
“나는…….”
카리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리엔의 할아버지지 않나.”
카르시온은 그런 카리스를 버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공에게 소비해 줄 감정 따위는 없었다.
뚜벅뚜벅.
그가 카리스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네. 리엔은 그 할아버지의 존재도 모르는데.”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술을 뗐다.
“그게 과연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내가 리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정확히 3년 전, 아레나 아카데미의 학술제에서였다.”
“일찍도 알았네.”
“그동안 리엔의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은 아이가 나 때문에 손가락질받을까 두려워서였지.”
리엔을 위해서였다는 말에 카르시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물어볼까 말까.
“소공작, 자네도 알지 않나. 내가 라그라스에서 어떤 존재인지.”
모를 리가. 역사서에 아주 요란하게도 표현해놨는데.
카르시온은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리엔을 떠올렸다.
아아. 역시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나만 물어볼게. 왜 리엔의 아버지는 당신의 밑을 나와 라그라스로 도망쳤지?”
카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뱉은 후 수백, 수천 번을 후회한 말이었다.
“그건…….”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리엔과 같은 까만 동공에는 후회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루드에게 라그라스인을 앞에 데려오는 순간, 죽여 버리겠다 선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