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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54)화 (154/161)

154화

라그라스인을 자신의 눈앞에 데려오는 순간 죽여 버리겠다라.

오늘 연무장에서 무형의 기운을 내뿜으며 기사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그만큼 검에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라그라스인은 리엔의 어머니인가?”

“……그래.”

카르시온의 머릿속에 바로 소설 한 편이 그려졌다.

뻔했다.

왜 대공이 라그라스인을 그토록 혐오했는지 물어보는 게 더 이상할 터였다.

그의 행동이 옳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해는 됐다.

십 수년간 쌓인 라그라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한순간에 사그라든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거겠지.

카리스는 한층 씁쓸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 리엔을 임신한 상태였다고 하니, 내 아들의 입장에서는 둘 다 죽여 버린다고 들렸을 거다.”

“아. 그래서…….”

카리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히자 카르시온은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리엔의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도망치라는 말을 한 건가 보네?”

“도망치라고 했다고……?”

누군가 카리스의 뒷통수를 후려치기라도 한 듯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가 호흡이 어려운 듯 느리게 숨을 몰아쉰다.

제 아들이.

루드가 리엔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그만큼 자신이 제 가족을 해칠까 두려웠다는 거겠지.

죄책감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카르시온이 굳은 카리스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왜 그런 표정이야? 당신이 아들에게 한 말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 아니야?”

뼈를 깊숙이 찔러 오는 말이었다. 카리스는 울 듯이 답했다.

“……그래. 루드에게는 그렇게 느껴졌겠지. 시간이 흘러서 내 기억이 많이 미화된 것 같군.”

카리스가 금방이라도 카르시온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처럼 절실한 눈을 했다.

“과거를 사무치도록 후회한다 한들,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라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나?”

그러나 카르시온은 무정한 눈으로 카리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공, 당신이 핏줄을 찾던 지난 과거를 만회하고 싶건 말건 나는 아무 관심 없어.”

그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다.

“근데 하필 그게 리엔과 관련되어 있네?”

짜증 나게.

“당신이 리엔의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내가 줄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그게 뭔가.”

“당신이 용기를 내지 못한 이유와 비슷해.”

카르시온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번뜩였다.

“리엔이 친할아버지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았을 때의 감정. 그건 과연 긍정일까 부정일까.”

마음 같아서는 대공이 리엔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는 것 못하게 막고 싶었다.

카리스가 제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리엔의 정신 건강도 문제고…….

하필 그녀의 할아버지가 아바스칸투스의 전쟁 영웅인 ‘카리스’인 것도 문제였다.

라그라스에서 나고 자란 리엔이었다.

그런데 카리스가 리엔에게 자신이 조부임을 밝히는 순간, 리엔은 아바스칸투스의 고위 귀족이 되는 거다.

이 사실이 라그라스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어떨까.

하나 확실한 건 긍정적인 시선이 가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하지만 리엔은 자기 사람, 특히 가족을 소중히 여겼다.

렉스가 리엔을 협박할 수 있었던 것도 백작가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이지 않은가.

아칸더스가 몬스테라를 퍼트린 범인임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범인이 아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그를 풀어 준 것도.

다 그 ‘가족’이라는 올가미 때문이었다.

제게 단란한 가정을,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하기도 했지.

카르시온은 긴 생각을 마치며 덧붙였다.

“뭐, 어차피 내가 판단하고 생각하는 건 아무 의미 없으니까. 리엔이 선택해야 할 문제잖아?”

리엔 아버지의 경고를 들은 후, 그녀와 대공을 빨리 떨어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공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고, 리엔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잘해주고 싶어 안달이었지.

리엔의 안전이 확보됐다면, 이 문제에 자신이 나서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롯이 리엔이 결정할 몫이었지.

“그러니까, 대공 당신이 리엔에게 조부라는 걸 밝히는 걸 말리지 않을게.”

뜻밖의 대답에 카리스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정말인가……?”

“근데 지금은 안 돼. 참아.”

“지금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리엔은 아직 무언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괜찮은 척할 뿐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야.”

정 밝혀진다면 적어도 지금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우선 리엔이 아칸더스가 제 부모님을 죽인 범인임을 받아들이는 게 첫 번째.

그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게 두 번째.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상처받지 않을 준비가 되었을 때여야 했다.

리엔의 이름에 리시안셔스라는 성이 붙은 후면 더 좋고.

그때라면 리엔은 아바스칸투스 보다 라그라스 귀족에 가까울 테니까.

친조부가 카리스인 것이 밝혀지더라도 리엔은 ‘리시안셔스’의 일원이었으니 어느 정도 말이도는 것은 찍어누를 수는 있을 거다.

한편, 카리스는 자신이 모르는 리엔의 과거 때문에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막무가내에 행동에 거침없는 소공작이 저리도 조심하는 건지.

“소공작, 부디 리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려 줄 수 있나?”

카리스의 부탁에 카르시온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대공은 자기 아들이 누군가의 고의적인 타살로 죽었다는 걸 알까.’

나중에 그가 알게 되면 반응이 볼만할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대공이 만들어 낸 나비효과가 아니던가.

대공이 리엔의 어머니를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터였다.

아칸더스 따위가 포티투아 저택에 고용되는 것부터 불가능했겠지.

날갯짓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큰 실수긴 했지만.

카르시온은 잠시 들었던 생각을 넣어 두고는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다.

실제로 짜증 나기도 했고.

“이런 것까지 내가 떠먹여 줘야 하나? 그건 나중에 리엔과 친해지면 직접 듣든지 해.”

***

어젯밤 편히 숙면한 나는 카르시온과 아침을 먹고 대공님의 티타임에 초대되었다.

말이 티타임이지, 각종 케이크부터 시작해서 샌드위치나 쿠키 등.

점심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세팅이었다.

“리엔, 크림 묻었어.”

카르시온이 내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손으로 훔쳐 자신의 입에 가져갔다.

그에 대공님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의외였다. 대번에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나는 어쩐지 미묘하게 달라진 듯한 분위기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제 대공님과 카르시온 사이에 오가던 살벌한 눈빛이 다소 누그러진 것 같기도 하고.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없는 사이에 둘이 말싸움이라도 했나.

겉으로만 보면 대공님이 참패한 듯한데.

여기서 의문인 점은 둘이 만날만한 시간이 없었다는 거다.

카르시온은 어제오늘 나와 종일 붙어 있었고, 잘 때도 그를 꼭 끌어안고 잤는데…….

그뿐만 아니라 더 수상한 점은 아침에 카르시온이 했던 말이었다.

“리엔, 라그라스로 서둘러 돌아가자고 했던 거 취소할게.”

“……뭐?”

“네가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돌아가자. 물론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괜찮고.”

“갑자기 왜? 문제를 해결하기라도 한 거야?”

“그냥.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을 것 같아서 네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어.”

……라고 했었지 분명.

밤새 무언가 생각하고 답을 내린 건가.

그렇다면 카르시온이 걱정하던 건 뭐였을까.

의문이 점차 크기를 키워 나갈 무렵이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며 쿤이 다도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여기 계셨군요.”

쿤의 등장에 카르시온이 내 어깨에 턱을 올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꽤나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다.

“방해꾼 하나 더 추가됐군.”

“누가 방해꾼이라는 겁니까?”

“보면 몰라? 너랑 대공이시지.”

“보아하니 대공님께서 티타임에 초대하신 듯한데 여기가 무슨 데이트 장소인 줄 아십니까?”

“응.”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본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폐하께 말씀드려 카르시온의 입궁을 허락받았습니다, 리엔.”

“오. 보안 문제 때문에 쉽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근데 그 허용하신 날이…….”

쿤은 바로 말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내게 조금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편하게 말해. 그런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어.”

황제의 부름이니 당연히 그의 스케줄에 맞춰야 하겠지.

물론 오래 걸리면 조금 곤란하긴 했다.

한스네 상단에서 생산설비가 만들어지기 전, 꽈리에 대한 거래를 끝내고 라그라스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생산설비가 만들어지고 얼마간은 현재 라그라스에 유통된 꽈리로 버틸 수 있겠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

“그게……. 나흘 후 열리는 황실 연회의 초대장을 주셨습니다.”

“황실 연회?”

“예. 분기별로 열리는 연회라 보통 폐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십니다만, 이번에는 짧게나마 참석하시겠답니다.”

“흠.”

귀찮게 되긴 했네.

보나마나 연회장에서 내내 시선이 주목될 터였다.

나는 카리스 대공님의 저택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고, 황자인 쿤과 친구인 데다가…….

그 빌어먹을 성녀라는 호칭까지 붙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카르시온도 한 유명했고.

쿤은 목덜미를 어색하게 만지며 이어 설명했다.

“리엔이 감염병 확산을 막은 것에 아바스칸투스에 기여한 바가 크니, 공식적으로 상을 내리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거 필요 없는데.

나는 약초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모기 기피제며 마나 이완제며 공짜로 나누어 준 것도 아니고 돈을 받고 팔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은행 창고에는 돈이 쌓이고 있을 텐데.

나는 이마를 짚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일단 알겠어. 나흘 뒤라니 나도 서둘러 준비를 좀 해야겠네.”

많은 이들의 앞에서 실수하지 않게 아바스칸투스의 예절을 몸에 익혀야 했다.

드레스나 장신구도 구매하고, 단장을 도와줄 사용인도 구해야겠지.

예전 같았으면 그냥 평민답게 수수한 옷차림으로 갔겠으나…….

나는 조만간 라시안셔스의 일원이 될 사람이었으니 적진과도 같은 아바스칸투스에서 얕잡아 보여서는 안 됐다.

카르시온이 내 파트너로서 참석할 테니 어찌 보면 첫 공식적인 자리나 다름없었으니 더더욱.

그때 대공님의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만 괜찮다면 내가 도와주마. 뒷방 늙은이처럼 보여도 꽤 쓸모가 있을 거다.”

도움뿐이겠는가?

카리스 대공.

이 이름이 내 뒤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대공님의 손을 부여잡고 활짝 웃었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나야말로 고맙…… 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대공님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한 거라고는 진심을 담아 웃으며 인사했을 뿐인데.

저런 분이 정말 살인 귀라고 불리시던 분이 맞나.

당황스러운 마음에 괜히 못 본 척하려 앞에 있는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

근데 이 샌드위치.

왜 내가 아는 맛이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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