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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55)화 (155/161)

155화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샌드위치를 내려다봤다.

설마.

표정이 더 굳어지기 전, 슬쩍 빵 부분을 들어 올리니 하얀색 소스가 발라져 있었다.

맛도 색도 분명 ‘그 소스’였다.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충격으로 인해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빠에 대한 약간의 배신감도 함께였다.

내가 깨달은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할까?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굳이 말해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입맛이 뚝 떨어진 나는 샌드위치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하아. 아바스칸투스에서는 원래 샌드위치에 이 소스를 발라 먹는구나…….

아빠, 특제 소스라면서요. 그게 고향의 맛이었어?

나는 쿤을 힐끔 바라보았다.

쿤, 미안. 평범한 샌드위치라고 하길래 나는 네 미각이 둔한 줄만 알았지 뭐야.

확실히, 이걸 먹고 살아왔다면 평범하다고 할 만했다.

난 이 소스가 아바스칸투스에서는 흔한 거일 줄은 몰랐지.

그때였다.

대공님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내게 물어왔다.

“어떤가. 오랜만에 직접 만든 샌드위치인데…….”

맙소사. 직접 만드셨다고?

나는 언제 내려놓았냐는 듯 하하 웃으며 다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너무 맛있어요.”

급하게 답한 것이 티가 났던 걸까?

대공님의 눈썹이 뭔가 실망한 듯 아래로 쳐졌다.

“그런……가.”

나는 다급히 샌드위치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엄지를 치켜 올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짜예요. 추억의 맛이 난다고 해야 하나. 향수를 일으킨다고 해야 하나. 카온, 너도 먹어 볼래?”

내 제안에 카르시온이 내가 베어 문 샌드위치를 그대로 입에 가져갔다.

“……추억. 그래, 그렇구나.”

더욱 가라앉은 대공님의 목소리에 내가 혹시 뭐 잘못했냐는 뜻으로 쿤을 바라봤다.

아바스칸투스에서는 엄지를 들어 올리는 게 쌍욕이라든지……?

쿤이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다가 휙 내 시선을 피했다.

의도적인 회피였다.

카르시온은 뭔가 알고 있나 싶어 고개를 돌리니, 그는 항의하듯 대공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공.”

내가 쿤을 노려보는 사이 그새 둘이 싸웠나?

그런데 맞서서 카르시온을 노려볼 줄 알았던 대공님이 큼큼거리며 시선을 피한다.

‘고의는 아니었다. 나도 내오고 나서야 깨달았어.’

방금 카르시온에게 입 모양으로 뭐라 하신 것 같은데. 교묘하게 손으로 가리셔서 보지 못했다.

카르시온이 한숨을 쉬며 입에 있던 것을 마저 씹어 삼켰다.

“한시도 방심할 틈이 없네.”

***

대공님이 날 도와주겠다고 한 것은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 날부터 틈틈이 나와 함께하며 이것저것을 알려 주었다.

아바스칸투스와 라그라스의 다른 예절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매너까지 속성으로 가르쳐 주셨다.

재미있는 건 마지막에는 꼭 이 말을 하셨다는 거다.

“내가 해 준 말들은 참고만 하고 굳이 새겨들을 필요 없다. 당당히 어깨를 펴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괜찮아.”

“하지만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예의 운운할 텐데요.”

“고리타분하게 누가 요즘 일일이 예절을 따지겠나.”

얼마 전 ‘요즘 젊은것들은…….’ 을 시전하신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지 않고 꾹 참았다.

“농담이 아니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칼을 꽂아 넣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해도 괜찮다.”

나는 농담도 재미있게 하신다며 하하 웃으며 넘겼다.

그 뒤에 카르시온이 몰래 처리하는 건 마법사인 자신의 전문 분야라고 덧붙인 건 정말 누가 들을까 무서운 대사였다.

그렇게 예절 부분은 대공님의 도움으로 해결했고,

드레스와 장신구는 새로 사러 나갈까 했더니…….

“대체 드레스와 각종 장신구가 네 아공간에 왜 있는 건데.”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카르시온이 꺼낸 드레스들을 바라보았다.

드레스 룸 절반은 족히 채우고도 남을 만한 양이었다.

얘는 아공간에 뭘 넣고 다니는 거야.

저 안은 얼마나 넓은 거지?

황당함을 숨기지 않은 채 카르시온을 바라보자 그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럽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리엔이 갑자기 드레스를 입고 싶어 하면 어떡해.”

“고작 그런 이유로……?”

“리엔을 질투하는 누군가가 와인을 쏟아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뭔데 묘하게 구체적이야.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픽 웃었다.

“그럼 굳이 사러 나갈 필요는 없겠네. 데이트할 겸 같이 나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아바스칸투스와 드레스 형식이 조금 차이가 나지만 예쁘니까 됐다.

내가 다른 나라에서 온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 사이즈와 딱 맞는 거라 급하게 아바스칸투스에서 맞춘 기성복보다 훨씬 낫겠지.

만족스러운 눈으로 무슨 드레스를 입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화륵.

순간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전까지 영롱한 자태를 뽐내던 드레스들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멍하게 드레스…… 아니, 돈이 불타는 모습을 바라봤다.

“아, 실수.”

카르시온이 태연한 얼굴로 저 말을 뇌까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야 이 또라이야……!”

결국, 잔뜩 화난 나는 그에게 접근 금지령을 내리고 대공님을 찾아갔다.

대공님은 내 옆에 카르시온이 없다는 것에 몹시 기뻐하셨다.

사실 대공님을 찾은 것은 할 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 며칠간 대공님의 저택에 머물며 넘치는 호의를 받았다.

아무리 내 진통제로 대공님이 겪고 있던 환상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렸다고는 하나…….

과할 정도의 대접에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대공님의 호의가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 하나.

대공님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서 친근하게 군 것도 있었으니까.

원래 내 계획은 연회 후에도 며칠 더 대공님의 저택에 머무르며 친분을 쌓을 예정이었다.

그다음 꽈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보려 했다.

하지만 대공님이 날 손녀처럼 대하는 태도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를 속이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대공님이라면 내 부탁을 거절하시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나는 대공님과 가볍게 차를 한잔 마신 후 정원을 나와 걸었다.

“대공님, 긴히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뭐든 말해 보거라.”

“정말 중요한 거라서, 진지하게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러자 나와 나란히 걷던 대공님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그는 오랫동안 내 눈을 맞춰왔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말해 보렴.”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포티투아 영지에서 자라는 꽈리를 팔아 주실 수 있나요?”

조금 뜻밖의 말이었는지 대공님이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꽈리?”

“사실 제가 아바스칸투스에 온 목적도 이거였어요.”

“왜 꽈리가 필요한 거지?”

“제가 약초로 여러 가지를 만드는 건 알고 계시죠?”

“그래. 알다마다.”

“저는 몬스테라의 치료제를 연구했고, 치료제를 만들어 냈어요.”

“아…….”

“꽈리는 지금 라그라스와 아바스칸투스에서 유행 중인 몬스테라 감염병 치료제의 주원료에요.”

대공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라그라스에서는 꽈리가 나지 않아서 아바스칸투스와의 무역이 필요해요.”

“…….”

“부탁드려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거예요. 치료제도 아바스칸투스에 폭리를 취하지 않겠다 약속드릴게요.”

“가져가라.”

“……네?”

이렇게 쉽게?

“내 영토에 있는 꽈리의 소유권을 모두 너에게 양도하마.”

“네?”

대공님이 턱을 가만히 매만지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사용인을 불러 펜과 종이를 가져오게했다.

“그래. 계약서를 써 주는 게 확실하겠구나.”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얼을 타다가 강제로 소매 넣기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적당한 가격에 팔아만 주셔도 감사해요.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내가.”

대공님이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서툰 손길로 천천히 쓰다듬는다.

“내가 주고 싶어서 그렇다.”

“할아버지. 아니, 대공님. 사실 말씀은 안 드렸지만,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에요.”

“이 늙은이가 여기서 더 가져가서 무엇 하려고. 게다가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 않나.”

“하지만…….”

“아가야. 나는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단다.”

나는 입술을 꾹 내리 눌렀다.

“제가 진통제를 만들어 드렸기 때문인가요?”

“아아. 그것도 네가 만든 거였지. 그건 아직도 잘 쓰고 있단다.”

말씀하시는 것을 봐서는 진통제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도대체 왜?”

대공님은 흐리게 웃으며 내게서 손을 뗐다.

단지 쓰다듬던 손을 거뒀을 뿐인데 허전함이 크게 다가온다.

“네가 손녀 같아서라는 말만 해 두마.”

***

시간은 빠르게 흘러 황제를 만나기로 약속한 연회 날이 찾아왔다.

나는 카르시온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분홍색의 하늘하늘한 천이 겹겹이 덧대어져 있는 드레스를 입게 됐다.

카르시온의 아공간에 남아있던 마지막 드레스였다.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면 천이 나풀거려서 괜히 요정이 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덕분에 카르시온도 오랜만에 제어 마법을 건 상태였다.

뭐, 아쉽기는 했지만 오늘같은 날 다른 나라 귀족 앞에서 코피를 흘리게 둘 순 없으니까.

“라그라스 제국에서 오신 리엔 님과 카르시온 리시안셔스 님 드십니다!”

카르시온의 손을 잡고 연회장에 들어가자 무수한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악의가 담긴 시선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을 이렇게 많이 받게 된 것도 오랜만이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리엔, 시선이 부담스러우면 저들이 우릴 보지 못하게 해 버릴까?”

나는 싱긋 웃으며 복화술로 말을 전했다.

“즈블 득츠그 그믄히 이쓰.”

그때, 먼저 들어와 있던 카리스 대공님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르게 허리에 힘이 들어가며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그래 실수 좀 하면 어때, 나에게는 카르시온과 대공님이 있는데.

하지만 여유로움을 되찾은 것도 잠시.

나는 연회장에서 어떤 한 사람을 발견하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몇 년 전, 아카데미에서 카르시온에게 칼을 휘두르고 라그라스에서 추방된 세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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