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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56)화 (156/161)

156화

세라를 발견하기 무섭게 그녀가 순식간에 등을 돌려 사라진다.

……잘못 본 건가?

하긴, 내가 본 사람은 분명히 하녀 복을 입고 있었다.

자존심 센 그녀가 평민들과 함께 하녀 일을 하고 있을 리가.

게다가 라그라스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들, 그녀는 여전히 귀족이었다.

가문에서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을 텐데 뭐가 부족해 하녀로 취직해서 일하겠는가.

뭔가 찝찝한 기분은 들었지만, 나는 애써 털어 버리기로 했다.

설령 정말 그녀라고 한들, 카르시온이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해를 입을 일은 없을 거다.

나는 그렇게 위안하며 카르시온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의아함을 느낀 듯 나를 바라본다.

“리엔, 무슨 일 있어?”

“세라를 닳은 사람을 봤어.”

순식간에 카르시온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카르시온이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살폈다.

“어디?”

“발견하자마자 사라졌어.”

“그 새끼가 여길 어떻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녀 복을 입고 있었어. 어쩌면 그냥 닮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내가 찾아올까?”

“아니. 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싸움이라면 모를까, 그때처럼 흉기를 휘두르면 어떻게 해.”

“대공 옆에 있으면 안전할 거야.”

의외의 말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공님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더니.

물론 카르시온의 말대로 대공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암살자가 습격하더라도 안전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네가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자 카르시온이 나와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조용히 입가를 가렸다.

귓가가 빨개진 것을 보니 좋아하고 있는 듯했다.

마물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나.

때마침 대공님이 나와 카르시온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만연에 흐뭇한 미소를 걸친 채 내게 정중히 손을 내민다.

“두 번째 춤은 나와 춰 주겠나.”

첫 번째 춤은 파트너와 추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기에 이리 예약을 걸어 두시는 듯했다.

힐끗 카르시온을 보니 살짝 불만 어린 표정이긴 했으나 방해를 놓을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에 안심하며 대공님의 춤 신청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였다.

“이런, 두 번째로 리엔과 춤을 출 기회를 놓쳤군요.”

어느새 다가온 쿤이 우리 사이에 자연스럽게 껴들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는 세 번째를 예약해 놓아도 괜찮겠습니까?”

“꺼져.”

카르시온이 쿤의 손을 탁, 쳐내며 내 앞을 막고 나섰다.

주변에 있던 귀족 몇이 그가 한 말을 들었는지 헛, 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시선이 몰린다.

나는 카르시온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카온, 공석이잖아. 존대해야지.”

그러자 카르시온이 알았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막무가내긴 해도 내 말은 잘 들어서 다행이었…….

“꺼져 주십시오, 2황자님.”

다행이라는 말 취소.

쿤은 카르시온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여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는 리엔에게 물었습니다, 카르시온 소공작.”

“리엔이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는 카르시온을 황당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내가 언제.

쿤이 나에게 시선을 주며 고개를 까딱였다.

“리엔은 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만.”

“딱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뭐 씹은 듯한 표정이 그 증거입니다.”

“억지입니다. 그녀는 싫으면 싫다고 딱 잘라 말할 분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쿤의 시선이 나와 카르시온이 잡은 손에 잠깐 머물렀다.

그 눈빛에 후회가 엿보였다면 내 착각이었을까.

“아카데미 시절, 춤 수업 때 제가 리엔의 파트너였다는 걸 알고 그렇게 질투하시는 겁니까?”

“하루도 못가서 바뀐 거로 아는데 파트너는 웬 말입니까.”

카르시온의 팩트에 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그네슘이 필요해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춤 파트너는 소공작이 아니었지요.”

“아 그거.”

카르시온이 여유로운 낯으로 픽 웃음을 뱉어 냈다.

“그 파트너, 저였습니다만.”

“네?”

“뭐?”

이건 또 뭔 소리야.

나와 쿤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카르시온을 바라봤다.

그가 뭔가 불쾌한 것을 떠올린 듯 눈매를 매섭게 치켜뜨며 쿤을 응시했다.

“황자님. 그럼 제가 누군가 리엔의 허리를 더듬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을 것 같습니까?”

더듬는 게 아니라 얹는 거겠지.

……그래서 사이먼이 평소에는 타지도 않던 부끄럼을 그렇게 타던 거였어?

“잠시만. 네가 내 파트너였으면 네 수업은? 우리 다른 반이었잖아. 또, 진짜 사이먼은 춤 수업하는 동안 어떻게 된 건데?”

카르시온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용히 눈을 접어 올렸다. 그것도 아주 예쁘게.

아무래도 미인계로 상황을 넘어갈 생각인 듯했다.

“……성적만 잘 유지했으면 된 거 아닐까?”

되겠냐.

그래서 사이먼은 어떻게 한 건데.

쿤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본 화제에 집중했다.

“어쨌든, 카르시온 소공자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왜 그것을 알아야 합니까. 제 연인을 다른 불한당으로부터 막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불한당이라니요. 고작 춤을 추는 것으로 이리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나는 둘의 답이 없는 설전을 보며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제가 아무하고도 춤을 추지 않으면 해결될 일이네요.”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대공님이 입을 쩍 벌렸다.

정신을 차린 그가 애절한 표정으로 부탁해온다.

“내가 쿤 님을 설득해 볼 테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카르시온과 쿤도 낭패 어린 표정으로 내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쁘게 입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니, 리엔……!”

“저, 저는 아카데미 재학 시절에도 졸업 파티 때도 한 번도 리엔과 춤을 춰 본 적 없습니다.”

나는 그들을 단호하게 쳐냈다.

“다 큰 남자들이 징그럽게 매달리지 마세요.”

고작 춤으로 인해 연회장에서 국가 간 싸움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게 처음부터 서로 양보하거나 적당히 타협했어야지.

새침하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귀족들이 자못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입매를 슬쩍 끌어 올렸다.

사실 내가 강하게 나간 것에는 싸움을 말리기 위함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다른 귀족들의 망막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새겨주기 위해.

카르시온은 물론이고, 황자인 쿤과 대공님까지 내게 쩔쩔매는 것을 보고 귀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잘은 몰라도 내 위치를 상향 조정하긴 했을 거다.

그렇게 홀로 미소를 그리고 있을 때, 마침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우레토 에드가 아바스칸투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들어오는 동시에 연회장에 있던 모든 귀족이 허리를 숙였다. 뜻밖의 등장에 놀라는 것도 같았다.

이번 연회는 분기별로 열리는 가벼운 파티에 불과했다.

원래대로라면 황제는 물론이고, 대공님과 쿤도 이곳에 참석하는 일이 없었을 테지.

황제는 연회장을 잠시 둘러보는가 싶더니 곧바로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대공님께 시선이 고정된 게, 목적은 이쪽인 듯했다.

“대공, 황궁에 아주 오랜만에 걸음 했군. 내가 불러도 그리 튕기더니 어쩐 일인가.”

“허허, 그리 말씀하시면 누가 오해할까 두렵습니다. 정식으로 부르셨다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왔겠지요.”

“흐음? 분명 짐이 공과 함께 대소사를 나누고 싶다 편지를 보내지 않았소?”

“다 알고 있습니다. 그간 부르심은 그저 투정에 지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두 분의 격 없는 모습에 나는 새삼 대공님이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어느 누가 황제가 한 말을 공개석상에서 투정이라 칭할 수 있단 말인가.

“흠. 그것보다, 듣자 하니 라그라스에서 온 소문의 여인이 대공의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다지.”

“네. 전에 개인적으로 인연이 닿은 적 있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 아이입니다, 폐하.”

대공님이 나를 소개하자 나는 카르시온과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렸다.

“리엔이라고 합니다.”

“호오. 흔치 않은 색을 가진 아이구나.”

황제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의 시선이 유독 길게 머무른 곳은 머리카락과 눈동자였다.

“……짐이 할 일이 많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리엔이라고 했나?”

“네, 폐하.”

“아바스칸투스의 사람들을 살려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마. 그대 덕분에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어.”

“과찬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쿤의 오랜 지병이었던 다한증과 무한증을 고친 것 또한 너라고 했지.”

나를 보는 황제의 눈매가 한층 더 부드럽게 풀어졌다.

“뭘 갖고 싶나.”

대공님과 계약을 체결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꽈리에 대한 안정적인 수급을 약속받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필요한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겉치레는 필요 없다. 너는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뿐이니 솔직하게 말하라.”

“약초가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모기 기피제와 마나 이완제 건에 대해서는 사실 운이 좋았던 것도 있습니다.”

“운이 좋았다?”

“저도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그대가 만든 약이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송구하다는 듯 여쭸다.

“폐하께 감히 제 상황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하라.”

나는 허리와 어깨를 곧게 편 후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답했다.

“저는 곧 리시안셔스 가문의 일원이 될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무언가 부족해 보이십니까?”

“하하하! 당돌하구나. 여러모로 탐이 나는 인재군.”

껄껄 웃던 황제가 내게 장난처럼 제안했다.

“어떤가. 네 외모만 보면 아바스칸투스의 사람인데 진짜 우리나라의 사람이 될 생각은 없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나고 자라온 고향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에 황제가 아쉬운 눈으로 혀를 차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보면 볼수록 아깝군. 리시안셔스와 약혼하지 않은 상태였다면 쿤과 짝을 지어 줬을 텐데.”

“……저는 평민입니다.”

“귀족을 임명하는 건 누구라고 생각하나?”

누구긴 누구야 내 앞에 있는 황제 폐하시지.

나는 이쯤 되니 내가 상견례 프리패스 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시온의 부모님도. 쿤의 부모님도. 심지어는 피오르네 형까지 나를 엮고 싶어 하지 않았는가.

그때였다.

연회장 한쪽에서 비명 같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당장 그 사특한 마녀와 떨어지십시오! 위험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를 가리키며 마녀라 주장하는 이는 다름 아닌 하녀 복을 입은 세라였다.

그녀가 황제의 앞까지 달려 나오자 그 주변을 맴돌고 있던 기사들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녀는 우악스럽게 저지당하는 와중에도 악을 쓰듯 말을 뱉어냈다.

“폐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자신이 성녀라 주장하고 있는 저 마녀는 사실, 감염병 몬스테라를 퍼트린 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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