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나는 초상화의 주인이 아빠인 것을 확인하고 대공님이 저택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직 대공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실은 알고 있었다고 밝혀야 할까? 아니면 대공님이 먼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밝힌다면 화를 먼저 내야 할까. 아니면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듯 카르시온이 물었다.
“리엔, 너는 대공을 어떻게 생각해?”
“원망해.”
대공님이 엄마 아빠와의 결혼을 반대한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 이후 충분히 바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쿤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의 나를 본 듯이 말했다.
그건 우리 가족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
대공님이 아빠를 찾으려 했다면 그녀의 도움으로 충분히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대공님은 아빠를 찾지 않았다.
“카온, 내가 대공님의 손녀로 자라왔다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건 안다.
그래도 자꾸만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렉스와 에르한이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을 거다.
내가 친손녀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숨길 거였다면, 연회장에서도 끝까지 모른 척했었어야지.”
완벽하게 숨겼었어야지.
나를 그렇게 애틋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내 연인인 카르시온을 희대의 도둑놈처럼 대하면서.
꽈리를 팔아 달라는 말에, 계약서까지 써주며 전부 가져가라는 말을 했으면서.
어떻게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적어도 ‘손녀 같아서’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거기에 나를 지키겠답시고 황제의 앞에서 검을 뽑아?”
기가 차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거기서 그렇게 나와 버리면, 내가 모르는 척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어지잖아.
나는 카르시온의 눈을 바라보며 뺨에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자 기분이 다소 들뜬다.
“……하지만 그런 과거가 없었더라면 내가 널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카르시온이 없는 미래라니, 상상만 해도 아득했다.
그래서 나는 이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내 말을 들은 카르시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는 듯.
하지만 이윽고 고개를 젓는다.
“널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다고 한 거 기억 안 나? 나는 어떻게든 너와 결혼했을 거야.”
나는 그와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아예 마주치지 못했을 수 있잖아.”
카르시온이 붉어진 얼굴로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성말라 보이는 눈빛으로 내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도 나는 언젠가 널 찾아냈을 거야.”
갈라진 목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눈을 내리감자, 그의 기척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도 포티투아 저택 밖에는 사람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을 텐데.
내가 카르시온과 이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있다면 세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입을 맞추려던 찰나, 카르시온이 뭔가를 느낀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대공이 황제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많이 났나 본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대공님이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
대공님은 저택에 돌아온 뒤 곧바로 나와 카르시온을 불렀다.
그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
“폐하께서 일주일 뒤, 재판을 열겠다 하셨다.”
“……네?”
재판을 열겠다는 건 둘째치고, 일주일 뒤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재판 이전에는 엄밀히 준비 기간이 존재했다.
하물며 제대로 된 수사도 진행하지 않은 상황이지 않은가.
이건 나를 몬스테라를 퍼트린 범인으로 몰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폐하의 독단으로 결정된 사항이 아니다. 오늘 아침 열린 귀족 회의에서 대다수가 찬성표를 던졌지.”
“귀족들도 세라의 선동에 넘어간 건가요?”
“정말 네가 마녀라고 믿는 자도 있지만…….”
대공님은 비통한 얼굴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몇몇은 재판을 통해 네가 개발한 약의 권리를 박탈해, 직접 약을 만들 생각인 것 같았다.”
“하.”
이게 말로만 듣던 마녀재판인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내게 대공님과 카르시온이 없었더라면 나는 즉시 옥에 잡혀 들어갔을 거다.
그 안에서 심문관은 내게 자백을 강요하고, 그에 따르지 않았을 경우 고문을 가했겠지.
종래에는 어떻게 됐을까.
화형?
뭐가 되었든 결말은 나의 죽음이었을 거다.
그래. 나름 적정가에 팔고 있다고는 하나, 부담이 가긴 했겠지.
많은 물량을 전부 라그라스에서 의존하고 있으니.
운송 비용에, 관세도 붙을 테니 이러나저러나 라그라스에서 사는 것보다 비쌀 수밖에 없었다.
세라가 주장한 것처럼 언제 가격을 올릴지 전전긍긍하기도 했을 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발자인 나를 마녀로 몰아 그 레시피를 빼앗겠다는 발상은 정말…….
“와. 이래서 매년 사탄 실업률이 올라가나 봐요.”
거참. 양심도 없지.
부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한 것을 눈치챈 듯 대공님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순간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까, 공적인 자리에서 부르듯 대공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잘만 쓰던 할아버지라는 말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대공님이 뭐가 미안해요.”
미안할 건 따로 있잖아. 쓸데없이 이런 거에 사과하지 마요.
대공님은 결국,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듯 흐느끼듯 말했다.
“……전부. 전부 미안해.”
그런 대공님을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대공님은 저 의심 안 하세요?”
솔직히 세라의 말만 들으면 빼도 박도 못한 범인이지 않나.
“내가 어떻게 너를……!”
목소리를 높이던 대공님이 급히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핏줄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겠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가 뭔가 결단한 듯 크게 호흡했다.
“리엔. 재판에는 참석하지 말거라.”
“……재판에 참석하지 않으면 제가 범인임을 인증하는 꼴이 될 텐데요.”
내 반박에,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카르시온이 입을 열었다.
“아니, 대공의 말대로 재판은 불참하는 게 나아.”
그가 잘 마시지도 않던 술을 꺼내 병째로 들이켰다. 화를 가라앉히려는 것 같았다.
“그들은 네가 범인인지 중요하지 않아. 레시피에 대한 권리 박탈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 그리고 분노한 민중들의 화살받이가 필요할 뿐.”
“나도 알아. 하지만 참석을 하든 하지 않든 결국은 내가 범인으로 몰릴 상황이잖아.”
게다가 내가 재판에 참석하지 않으면…….
나를 보호해 주고 있는 대공님이 피해를 보게 될 거다.
대공님은 이미 희생할 만큼 했다.
황제의 앞에서 검을 꺼내고, 명령에 불복종했으며,
몬스테라를 퍼뜨린 범인으로 지목된 나를 끌고 갈 수 없게 저택 문을 걸어 잠갔다.
그는 내 무죄가 밝혀져도 지금까지 행했던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거다.
대공님을 바라보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를 걱정해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리엔.”
“……대공님.”
“나는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다. 보호하는 존재이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내가 반드시 너를 지켜 주마.”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손등을 덮었다.
매일 잡는 누구의 손과 달리 거칠고, 주름살이 가득한 손이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든든해서. 너무나도 따뜻해서.
나는 그 손을 쳐내지 못했다.
***
내가 마녀로 몰린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아니나 다를까.
나에 대한 마녀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에, 라그라스 전역에서 탄원서가 날아왔다.
리시안셔스는 말할 것도 없고, 베고니아 공작가와 피오르의 아나나스 가문.
이모네인 아르메리아 백작가, 한스네 상단. 거기에 리사동 부원들의 가문까지.
모두 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움직였고, 아바스칸투스의 행태를 비난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면, 전쟁이라도 날 분위기였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인생 헛살지는 않았나 보네.”
카르시온이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얼굴을 했다.
“좋은데 싫은 이 기분…….”
나는 그런 카르시온이 귀여워서 분홍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조금 의외였던 점은 라그라스의 일반 국민들도 내 편을 들어줬다는 거다.
같은 사람인데 한쪽은 성녀, 한쪽은 마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덕분에 그동안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심심할 일은 없었다.
대부분 대공님 또는 카르시온과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은 손님을 맞기도 했다.
나를 체포하려는 기사들과 성난 군중들을 막기도 급급할 텐데 웬 손님이냐 하면은…….
내 소식을 들은 리시안셔스 공작님과 공작 부인이 공간 마법으로 아바스칸투스로 달려왔다.
두 분은 재판이고 뭐고 당장 나를 라그라스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재판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건 맞다.
중요한 건 그 이후.
아바스칸투스의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볼 예정이었다.
그간 대책 없이 시간을 보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 내게는 최후의 수단이 있었다.
“몬스테라 치료제.”
확산 속도가 줄었다고는 하나 아직 몬스테라가 완벽히 잡힌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기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기피제를 항상 몸에 뿌리고 다닌다.
황실에서 파견된 병사들은 마나이완제로 마물인 모기를 토벌했다.
그러나 몬스테라에 걸린 사람은 지금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었고, 아직까지 치료제를 개발했다는 사람은 없다.
아바스칸투스는 내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내가 만든 치료제가.
안타깝게도 이 나라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치료제를 인질로 삼고 싶지 않았으나, 이쪽도 목숨이 걸려 있는 만큼 봐줄 생각은 없었다.
아. 가끔은 저택의 비밀통로를 통해 쿤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죄인이 된 얼굴로 항상 내게 사과하기 바빴다.
자신이 나를 아바스칸투스에 초대했기 때문에 이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라그라스와 아바스칸투스의 반응이 현저하게 엇갈렸기 때문에 더욱 그랬겠지.
“리엔.”
카르시온의 목소리에 나는 생각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왜?”
“……재판이 열리기 전에 아칸더스를 찾아올까?”
일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일에 관련해 그의 이름은 금지어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칸더스를 왜.”
“리엔. 나는 그딴 새끼보다 네가 훨씬 중요해.”
나는 이를 악물며 카르시온을 노려보았다.
“말조심해, 카온. 그는 분명 내게 범인이 아니라고 했어.”
그는 내게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했다.
분명.
분명……. 그렇게 말했다.
카르시온이 입을 달싹이며 내게 뭐라 말을 하려던 때였다.
벌컥-!
“아가씨!”
카르시온이 미간을 좁히며 사용인을 바라보자 그가 흥분한 얼굴로 말을 전했다.
“인공적으로 마물을 탄생시킨 범인이 라그라스 황실에 자수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