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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161)화 (161/161)

161화

아칸더스를 만나고 난 이후, 그가 나를 공범으로 지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족이 아니라 선언하며 그와 철저히 선을 그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아칸더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미련하긴.”

내 입장에서야 일이 복잡해지지 않아 좋지만…….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어쩐지 카르시온을 만나지 못했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안 그런 척하긴 했지만 약간의 상실감도 들었다.

지금이야 사무치게 후회하고 있다 한들, 아칸더스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니까.

“언제 출발할 거야, 리엔?”

카르시온의 목소리에 나는 마시고 있던 차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곧.”

하지만 내게는 카르시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금방 괜찮아지겠지.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아칸더스의 범죄 행위가 확실시되고, 내 혐의가 풀렸다.

아칸더스가 진행한 연구와 나의 연관성을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비가 마물이 아닌, 일반 동물에 불과하다는 수사 결과가 나온 것도 한몫했다.

그의 오래된 연구 일지를 통해, 첫 실험 대상이 내 부모님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물론 일각에서는 여전히 내가 전염병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일각일 뿐이었다.

작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며칠 전 아바스칸투스의 황제가 직접 만나서 사과의 뜻을 전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나는 편지를 받자마자 화롯불에 던져 버렸다.

“사과를 하려면 직접 오던가.”

피해자인 나보고 오라 가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제국의 황제가 사과를 위해 직접 움직이는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하지만 반발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아바스칸투스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황제에게 받아 낼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답장을 보내긴 했다.

대공님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편지였다. 양심이 있으면 이 정도는 해주겠지.

카르시온이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정말 황제한테 뭔가 더 요구하지 않을 거야, 리엔?”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더 많은 것을 황제에게서 뜯어낼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다른 곳에서 뜯어낼 게 많으니까.”

아직 세간에 몬스테라 치료제를 개발했다는 것을 발표하지 않았다.

지금은 포티투아 영지에서 나는 꽈리를 라그라스로 가져가 치료제로 만드는 과정에 있었다.

어느 정도 물량이 모이면 유통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아바스칸투스는 내게서 치료제를 사려면 꽤 큰 지출을 각오해야 할걸?”

모기 기피제와 마나 이완제는 지금의 감염병 사태가 끝나면 서서히 가격을 올릴 생각이었다.

나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바스칸투스 사람들은 모기 기피제를 살 수밖에 없어.”

라그라스는 모기가 여름철에만 반짝 활동했지만, 아바스칸투스는 아니다.

덥고 습한 기후 때문에 항상 모기를 비롯한 여러 해충에 시달렸던 아바스칸투스다.

그로 인한 사망자 수가 많은 것도 당연지사.

하지만 몬스테라 감염병 사태 이후 오히려 사망자는 줄었다는 통계가 있다.

모기 기피제가 실은 모기뿐만 아니라 각종 해충 퇴치에 뛰어난 효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모기 기피제는 이미 각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다.

쓰지 않았을 때는 몰라도, 편의성을 아는 지금은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내게서 모기 기피제의 권리를 박탈하려고 한 것이겠지만…….

어쩌겠나.

내 혐의는 이미 벗겨졌는데.

그럼 마녀 몰이에 실패한 대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마나 이완제는 이전부터 전 대륙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팔아 왔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지.”

나는 내 주머니에 얼마 정도 들어오려나 생각하고 있다가 문득 세라가 떠올렸다.

분명 세라와 관련해 무슨 일이 터졌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일로 숨 쉴 틈 없이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다.

“카온, 세라는 어떻게 됐는지 알아?”

카르시온은 모르고 있었냐는 듯 두 눈을 껌뻑였다.

“탈옥했대.”

“……탈옥?”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황궁 감옥의 보안은 상당했다.

그저 카르시온이 아칸더스의 앞으로 나를 어렵지 않게 데려가서 쉬워 보였던 거지.

그런데 아무 능력도 없는 세라가 대체 어떻게?

순간, 나는 카르시온이 내 안전에 있어 이리 허술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카온, 너 탈옥한 세라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그가 나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고 더 이상 세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어쩌면 아카데미 시절, 세라가 카르시온이 자신의 손목을 잘랐다고 주장한 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렉스……. 이제 혼자 심심하지는 않겠네.”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시계가 어느덧 12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나와 카르시온이 라그라스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대공님이 배웅을 나왔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차마 네게 다시 놀러 오라는 말은 못 하겠구나.”

나는 아직 대공님과 아빠에 관해 대화를 나누지 않은 상태였다.

대공님이 내게 먼저 말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대공님. 헤어지기 전, 혹시 제게 하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미안하구나. 이곳에서 모진 일을 겪게 해서.”

이런.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대공님은 죄책감 때문인지 뭔지 아직도 내게 용기를 내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착한 내가 먼저 다가가 드리는 수밖에.

“대공님. 저는 아바스칸투스가 싫어요.”

대공님은 씁쓸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대공님은 싫지 않아요. 정말로요.”

“아…….”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그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매가 느슨히 풀린다. 깊은 안도가 느껴졌다.

“다행이구나.”

“카온과 결혼 날짜를 잡게 되면, 제 결혼식에 초대할게요.”

대공님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가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내, 내가……. 너의 결혼식에 참석해도…….”

자신 때문에 결혼식 분위기를 망칠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 얼굴을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든지.

“그러니까 다음에 라그라스로 오시면…….”

나는 대공님을 보며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빠와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할아버지.”

순간,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그렇게 일 초. 이 초.

삼 초가 채 되기 전, 스르르 그의 몸이 무너져 내린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폭포수처럼 눈물이 흘렀다.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다는 듯.

“알고, 알고 있었…….”

“그럼요. 대공님이 그렇게 티를 내시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나는 자세를 낮춰 대공님을 다정히 끌어안았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건강하세요, 대공님.”

사실 최대한 빨리 결혼식을 잡을 예정이라 만나는 건 생각보다 금방이겠지만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던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나를 마주 안았다.

“리엔……. 내 손녀딸.”

“네, 할아버지.”

“……비록 너를 알게 된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단다.”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그의 서툰 고백에 답해 주었다.

“저도요.”

***

라그라스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나를 반겨 준 것은 리시안셔스 공작 부부였다.

“리엔!”

“우리 며느리!”

옆에 있는 카르시온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내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달려오시는 두 분이었다.

카르시온에게는 다소 미안하지만 두 분의 환대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나를 향한 이 넘치는 사랑이 너무도 좋았다.

“아버님, 어머님!”

호칭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챈 듯 두 분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공작 부인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벅찬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세상에……! 어머님이라는 말을 이리 자연스럽게!”

공작님도 호칭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말했던 것을 작게 되뇌었다.

“아버님이라니…….”

“리엔, 그래서 우리 손주 이름은 뭐로 짓는다고?”

공작 부인의 설레발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결혼은커녕 반지 교환도 못 했는걸요, 어머님.”

“……뭐?”

누군가 찬물이라도 뿌린 듯 잠시 정적이 일었다.

변화하는 공작 부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그때였다.

공작 부인이 카르시온의 손을 잡고 있던 나를 납치하듯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힐끔 카르시온 쪽을 보니 그는 공작님에게 잡혀 무언가 살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공작 부인이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리엔.”

“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에에…….”

“카온이 네게 아직도 청혼을 안 한 건 아니겠지?”

어…….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네. 아직…….”

내 대답에 공작 부인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카온, 이 모자란 아들놈이 아직 청혼조차 하지 않았다고?! 당연히 임신 오해를 했을 때 오갔다고 생각했건만……!”

나는 그녀의 분노에 등 쪽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청혼이야 뭐 제가 먼저 할 수도 있었던 거고…….”

하지만 공작 부인의 화는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리엔. 먼저 교제하자고 고백 한 사람이 누구였니?”

“저요.”

“먼저 침대로 이끈 건?”

“저……요.”

“그럼 청혼은 누가 해야 할까?”

나는 내 엄지에 껴 있는 리시안셔스 문양이 박힌 반지를 들어 올렸다.

“청혼은 공작님, 그러니까 아버님이 하시긴 했……죠?”

“아…….”

공작 부인이 깨달음의 탄식을 내뱉었다.

“이건 리시안셔스 남자들을 잘 관리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구나.”

나를 바라보는 공작 부인의 눈동자에 진심 어린 통탄함이 엿보였다.

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내 미래를 본 것 같았다.

***

공작 부부를 겨우 떼어 낸 우리는 방으로 들어와 여독을 풀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으려니 옷을 갈아입은 카르시온이 내 옆에 걸터앉았다.

나는 그런 카르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공작 부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청혼까지 내가 하는 것은 조금 억울했다.

나는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카르시온에게 물었다.

“공작님이랑 무슨 대화를 했어?”

“별거 아니야.”

“그 별거 아닌 게 뭔데?”

“……궁금해?”

“응.”

“정말로?”

“응.”

“흐응.”

그러자 카르시온이 느른히 웃으며 제 입술을 톡톡 쳤다.

“입 맞춰 주면.”

이제 입맞춤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아주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카르시온도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빠르게 값을 지불했다.

쪽.

“됐지?”

짧은 입맞춤에도 충분하다는 듯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함박웃음을 지어냈다.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리엔, 우리 1학년 마지막 학기 때 편지 하나 쓴 거 기억나?”

미래의 나에게 쓰는 편지를 말하는 건가.

그 왜 졸업하기 전에 나눠 줬던.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카르시온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아공간에서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나 그거 리엔 너한테 썼다? 졸업 전에 받고 나서 아직 열어 보지도 않았어.”

“……그걸 왜 나한테 써? 미래의 너에게 보내는 편지였잖아.”

“너와 나는 하나니까 대충 비슷한 거 아닐까?”

“그게 무슨…….”

개 같은 논리야.

내 함축된 시선을 받은 카르시온이 씩 웃으며 내게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열어 봐.”

얼떨결에 편지 봉투를 받은 나는 봉해져 있는 실링을 열어 편지를 꺼냈다.

“진짜 나한테 쓴 편지 맞아?”

카르시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갸웃거리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편지를 열었다.

그리고 편지 안에 쓰인 글씨에 내 눈을 의심했다.

<나랑 결혼해 줄래, 리엔?>

상상도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순간적으로 벙찐 나는 눈을 빠르게 껌뻑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카르시온은 어느새 손에 고급스럽게 세공된 반지를 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꿈이 아닌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렇게 갑자기? 정말로?

“1학년 때 쓴 편지라며……!”

“그때 쓴 거 맞아. 사실 졸업할 때 즈음이면 너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어?”

이 집안은 어떻게 된 게 설레발 까지 유전이다.

“졸업하는 날 청혼하려고 했는데 조금 늦었네.”

멋쩍은 듯 뒷덜미를 문지르던 카르시온이 내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 카르시온 리시안셔스의 아내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리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벽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한없이 여유로운 척하더니.

지금 보니 어깨도 뻣뻣했고, 얼굴도 다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그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답이 들려오지 않자, 당황한 카르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엔?”

나는 눈부신 웃음을 지으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당연하지. 내 가족이 되어줘서 고마워, 카르시온.”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야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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