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 # 산천 >
1화 드미트리의 얼간이 (1)
드미트리(Dmitry) 남작 가문의 하인 한스는, 도련님의 이상 행동에 곤란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라고?”
“이곳이 샐러맨더 대륙에 있는 카이로 왕국이란 말이지. 무림이라는 세상은 존재하지도 않고.”
이상했다.
평소에 머리가 명석하다는 말을 듣는 도련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얼빠진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혹시 약에 취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최근 들어 귀족 가문 자제들의 일탈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많이 되고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이라면 충분히 의심할 법한 문제였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동생들은 이미 수도로 나가 착실하게 성장하는 것에 반해, 나이 스물다섯이 되도록 변방에서 썩어 가는 것만 보더라도 로만 트미트리의 현실을 알 수 있었다.
한스가 달래듯 말했다.
“도련님. 오늘은 도련님과 혼인을 약속한 로렌스 가문의 영애(令愛)가 드미트리 영지를 방문하는 날입니다. 소문으로 들었다시피, 로렌스 가문의 영애는 귀족으로서의 품위와 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미리 준비하고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 보는 자리이니만큼,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말을 툭 끊었다.
아무리 봐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 도련님이, 평소와는 다른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이곳 영지 최고령자에게 데려가 다오. 내게는 이름도 모를 그 영애라는 사람보다,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진짜 이상했다.
25년 평생 드미트리 영지에서 살아온 도련님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알겠습니다, 도련님.”
하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 한스의 역할이었다.
* * *
한스를 따라 이동한 곳은 드미트리 성 밖에 있는 마을이었다.
전시(戰時)가 아닐 때는 성에서 영주민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기에, 이렇듯 성 밖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형태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안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판잣집의 비율이 늘어 갔다.
첨벙.
흙탕물을 밟은 한스가 표정을 찌푸렸다.
사방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취에, 그는 슬쩍 로만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드미트리 영지의 최고령자를 만나야 하겠습니까? 도련님이 말씀하신 영지의 역사와 관련한 일이라면, 드미트리의 현자(賢者)나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괜찮다.”
로만은 주변의 환경에 개의치 않았다.
한스와 마찬가지로 주저 없이 흙탕물에 발을 들였고, 사방으로 튀는 물에 바지 밑단이 젖었다.
‘헉, 바지 다 젖는데.’
한스가 당황했다.
당연히 바지가 젖은 로만이 한바탕 난리를 피울 줄 알았는데, 로만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미트리 가문은 대단히 명망 높은 가문은 아니지만, 로만은 평소에 본인이 귀족 가문의 자제라는 사실을 상당히 으스대던 사람이었다.
재능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귀족으로서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니는 로만의 모습에, 영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일 때면 로만을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며 험담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라니.
영주의 명령에도 성 밖에는 죽어도 나가기 싫다던 그 인물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들었다.
‘……어디 머리라도 다치셨나.’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판잣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한스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로만을 보았다.
“이곳입니다. 영주님이 처음 드미트리 영지를 하사받기 전부터 영주님을 따르던 노인인데, 한때는 대장간의 야장(冶匠)으로 일했습니다. 벌써 구십 해나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죠. 문제는…… 거동이 조금 불편해서, 그와 대화를 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슬쩍, 주변을 살폈다.
악취가 극에 달해 코가 막힐 정도였고, 판잣집 곳곳에 형성되어 있는 거미줄은 보는 사람의 인상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절대 귀족 가문의 자제가 들어갈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스는 오는 길에 계속 의견을 물었던 것이지만, 로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밖에서 기다려라.”
“헉.”
망설임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손을 뻗어 거미줄을 걷어 버리더니, 로만은 안으로 들어가 주변의 모습을 확인했다.
“네가 이 집의 주인인가?”
“도, 도련님이 이 누추한 곳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에서 누워 있던 노인이 화들짝 놀랐다.
거적때기 같은 모포를 황급히 걷으며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를 쓰지 못하는지 일어나지는 못했다.
“앉아서 들어라.”
로만이 그의 앞에 앉았다.
더러운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는 모습에, 노인은 어쩔 줄을 몰라서 로만의 눈치만 살폈다.
“나는 드미트리 영지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이곳이 어떤 땅이며, 어떠한 역사로 이루어졌는지를. 아마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내가 가지고 온 술로 목을 축이면서 천천히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찰랑.
로만이 허리춤에 매달린 술병을 보였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당황하는 노인의 모습에, 로만은 경계심을 녹여 버리는 웃음을 지었다.
“어서.”
삶의 밑바닥.
로만은, 본인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만 해도 노인은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취기가 알딸딸하게 올라오고, 로만도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를 보여 주자 그의 경계심이 풀어졌다.
“드미트리 영주님은 원래 유명한 대장장이셨습니다. 직접 만든 쇠붙이들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상단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우연한 기회에 카이로 왕국에 무기를 납품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이라 그것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설 엄청난 기회였죠.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남작 위를 받은 영주님은…….”
얘기는 길었다.
드미트리의 장자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고삐가 풀린 노인은 본인이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냈다.
로만의 판단은 옳았다.
한스에게 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었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대답에 일부러 그의 입맛에 맞는 술을 준비했다.
덕분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로만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그가, 머릿속에 새로운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 갔다.
‘로만이라.’
로만 드미트리.
아니, 본래 그의 이름은 백중혁이었다.
그것도 무림을 통일한 천마신교(天魔神敎)의 교주라는 신분이 바로 백중혁이 살아온 삶이었다.
무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백중혁.
모든 것을 이룬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천수를 모두 누리고 죽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로만 드미트리의 몸이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사실 죽는 순간에 백중혁은 등선(登仙)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자신의 영혼을 감싸는 성스러운 기운이 있었지만, 백중혁은 인간으로서 살지 못하는 삶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등선을 거부했다.
대부분의 무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등선이건만, 백중혁은 인간으로 죽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선택의 갈림길에서 백중혁은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천명(天命)인가, 아니면 등선을 거절한 내게 내리는 신의 형벌인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새로운 삶.
새로운 환경.
백중혁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천마로서의 말년은 무료하고 따분했지만, 이곳은 주변의 풍경만으로도 삶의 활력이 돋았다.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을 이루어 버린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도 인간으로서 살아가지 못했지. 오히려 잘된 일이야. 로만 드미트리, 카이로 왕국. 내게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이 세상이 내게는 새로운 도전이 되겠지.’
가슴이 뛰었다.
무림 역사에 길이 남을 삶을 살았던 백중혁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평화롭기만 했던 말년보다는 매일 목숨이 위태롭고 치열했던 그 전의 삶이 백중혁을 사람으로서 살게 해 주었다.
평범하게는 살 수 없는 사람.
백중혁이란 그런 사람이었다.
“……이것이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얘기가 모두 끝났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던 노인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고맙다,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따로 보상토록 하겠다.”
“아닙니다, 도련님. 도련님같이 귀한 분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백중혁, 아니 로만이 웃었다.
이만 일어날 차례였다.
그런데 그 순간.
쾅!
콰당!
“이 개새끼야!”
밖에서 들리는 고성.
아무래도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예상대로였다.
밖으로 나가 보니, 한 무리의 사내들이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남자아이를 구타하고 있었다.
퍽!
퍽퍽!
“지독한 새끼.”
“그냥 뒈져 버려!”
남자아이는 강도 높은 구타에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그게 사내들의 분노를 더욱 부추긴 모양인지, 사내들은 정말 죽일 작정으로 남자아이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했다.
퍽퍽, 소리와 함께 남자아이의 몸이 들썩였다.
옷 바깥으로 살이 드러난 부분은 이미 피멍으로 시뻘겋게 물들었고, 얼굴도 엉망이 되어 코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상황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내들의 몸에 새겨진 송곳니 문신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도련님!”
로만이 한스 옆에 섰다.
한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로만의 등장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블러드 팽(blood fang) 일당인 것 같습니다. 드미트리 영지뿐만 아니라 주변 영지에서도 활동하는 고리대금 세력인데, 저들이 저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저 남자아이가 블러드 팽에게 큰 빚을 진 모양입니다. 그냥 모른 척하시죠. 괜히 얽혀서 좋을 것 없습니다.”
로만의 시선이 블러드 팽 일당을 살폈다.
고리대금.
비싼 이자라고는 하나, 어찌 됐든 간에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기에 폭력이 발생한 것이다.
문제는.
‘처벌은 일반 영지민의 몫이 아니다.’
이곳은 드미트리의 땅이다.
방금 노인에게 들은 설명대로라면, 저들은 어떤 문제든 영주에게 심판받고 해결할 의무가 있다.
로만 드미트리.
아직 로만으로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명확하게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로만은 죽었다.
자신이 일어났을 때 처음 발견한 것은, 로만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와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약들이었다.
유서의 내용은 로만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를 보여 주었다.
카이로 왕국은 항상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왕국인데, 그로 인해서 각 가문은 일정 병력과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을 한 명 선정해서 2년간 강제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법이 있다.
그 대상에 로만이 포함되었다.
장래가 밝은 두 동생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기에, 드미트리의 가주는 로만을 전쟁터로 보내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로만은 죽음을 택했다.
전쟁터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에 덜덜 떨던 그는, 약에 취한 날에 목숨을 끊는 선택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로만 드미트리다.’
이전의 삶은 생략했다.
로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든, 자신이 이 몸을 차지한 이상 지금부터는 ‘백중혁으로서의 가치관’을 믿고 따를 것이다.
“멈춰라.”
“도, 도련님!”
돌연 앞으로 나서는 로만의 행동에, 한스가 화들짝 놀라며 로만을 저지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로만의 목소리는 컸고, 구타를 중단한 블러드 팽 패거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로만을 바라보았다.
“로만 드미트리?”
알아보는 눈치였다.
문제는 로만의 평판으로는 그들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패거리의 리더로 보이는 흉악한 얼굴의 사내가,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운 채 말을 툭 내뱉었다.
“드미트리의 도련님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건 우리가 처리할 일입니다.”
“꼴에 귀족 자제라고 나서기는.”
“멈춰라, 이 지랄을 하네. 킥킥킥, 병신 새끼.”
뒤에서 일당이 속닥거리며 웃어 댔다.
마치 들으라는 듯한 제법 큰 목소리에, 한스는 혹시라도 로만이 실수할까 봐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 도련님.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블러드 팽 패거리는 앞뒤가 없는 녀석들입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도 성 밖에서 생기는 문제는 드미트리 가문의 후광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시고…….”
“한스.”
로만이 한스를 보았다.
중저음의 강인한 음성은, 두려움에 떨던 한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나는 아직 이곳의 법도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설명해라. 이곳에서 누가 드미트리의 법도를 어겼는가. 그리고 법도를 어긴 대가로, 어떠한 형벌이 적합한가.”
숨이 턱 막혔다.
한스는 로만의 눈동자에 빨려 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매일 향락에 빠져 살던 볼품 없던 사내가, 지금은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기세로 그를 옭아매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한스는 자신도 모르게 ‘진실’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빚을 지고도 제때 갚지 않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벌을 받아 마땅하나, 블러드 팽 패거리에게는 그것을 직접 처벌할 권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감히 드미트리의 영역에서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인 도련님을 욕보이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그것은 목숨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중범죄. 법도대로라면, 그들은 사형(死刑)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스가 고개를 숙였다.
심장은 쿵쿵 뛰고 다리는 덜덜 떨렸지만, 지금은 로만에게 예를 갖추어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정적이 내려앉은 공간.
지켜보는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블러드 팽 패거리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러자.
“너희들은 드미트리의 법도를 어겼다. 고로…….”
로만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흔하디흔한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들더니 마치 검처럼 블러드 팽 패거리에게 겨누었다.
“지금부터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로서, 법도를 어긴 너희들에게 형을 집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