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615)

2화 드미트리의 얼간이 (2)

블러드 팽 패거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특히 대장으로 보이는 흉악한 얼굴의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혹시 모를 변수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대체 우리 도련님이 뭘 믿고 이리 설치시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드미트리의 사병(士兵)은커녕, 일반 주민들도 황급히 뒤로 물러나면서 주변이 휑하게 변해 버렸다.

블러드 팽 패거리를 마주하는 사람은 단 두 명.

로만 드미트리와 그의 하인인 한스뿐이었다.

“도련님.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자제라는 건 잘 알겠는데, 성 밖에서, 그것도 송곳니 문신을 새기고 있는 우리를 상대로 그런 같잖은 태도를 보이면 참 곤란합니다. 이 밑바닥 생활도 나름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것이라서 말이죠. 저희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말을 들어 놓고도, 그냥 물러나면 블러드 팽의 일원으로서 체면이 살질 않습니다. 상대가 설령 드미트리 가문의 자제라 할지라도요.”

슥.

뒤에 있던 패거리들이 모두 무기를 꺼냈다.

흉흉한 눈빛을 보이는 그들은,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공격할 기세였다.

로만이 피식 웃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은 쓰레기야. 이 땅의 주인에게도 이리 나올 정도면, 평소 행실은 알아볼 필요도 없겠지.”

“쓰레기? 이 개…… 헉?!”

대장은 욕을 마저 내뱉지 못했다.

로만의 발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순간,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로만의 모습에 동공이 커졌다.

“공격해!”

“이익!”

블러드 팽 패거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대장도 미리 쥐고 있던 단검으로 주저 없이 로만의 급소를 공략했는데, 로만은 바로 코앞에서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해 버렸다.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 로만의 날카로운 눈빛이 대장과 마주쳤다.

그 순간.

퍽!

“컥, 크르르르륵.”

나뭇가지에 목이 관통되어 버린 대장이 피거품을 물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블러드 팽 패거리들이 악에 받쳐 로만을 공격했다.

거의 열에 달하는 사내들의 공격에 한스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황급히 주변에 있는 큰 돌멩이를 들고는 로만을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장을 처리한 로만은,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사내들의 공격을 모두 피해 내며 한 명씩 확실하게 처리했다.

나뭇가지로 단검을 쳐 내는 것도 신기했는데, 나뭇가지로 공격할 때면 어김없이 사내들의 급소에 구멍이 뻥 뚫렸다.

“괴, 괴물……!”

“이게 로만 드미트리라고?”

사내들이 당황했다.

처음에는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들은, 동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는 모습에 덜컥 겁을 먹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차례로 쓰러지는 사내들.

마지막 남은 사내가 도망치려는 순간, 로만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사내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콰악!

“놔, 이거 놓으라고!”

사내가 발악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동료들의 모습에,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상태였다.

로만이 말했다.

“너희들은 드미트리의 법도를 어겼다. 그리고 그에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협박해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지. 하나의 집단이 올바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법도를 지킬 필요성이 있다. 너의 목숨을 앗아 가지는 않겠지만, 너 하나를 본보기로 법도의 무서움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겠다.”

천마라 불렸던 사나이.

무림에서 로만은 곧 법이었다.

한평생 지도자로 살았던 로만은, 잔인할지라도 법도를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았다.

콱.

“크윽.”

사내를 무릎 꿇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강하게 젖히더니, 나머지 손으로 그의 혓바닥을 쭉 빼 버렸다.

“혓바닥을 잘못 놀린 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라.”

“으…… 으으, 으으으윽!”

사내가 발악했다.

하지만 도망칠 방법은 없었다.

로만의 우악스러운 손길은 사내의 몸을 강하게 억압했고, 로만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을 쥐더니 그대로 사내의 혓바닥을 잘라 버렸다. 피가 튀었다. 사내가 발악했고, 그가 고통에 포효하는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잔인한 장면에 마을 주민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로만은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사내의 혓바닥을 깔끔하게 잘라 버렸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혓바닥.

사내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넋을 잃은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입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힘겹게 막았다.

“내 이름은 로만 드미트리다. 내가 행한 형벌이 마음에 들지 않거든, 언제든 나를 찾아와도 좋다.”

천마신교.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에서는 모든 업보는 피로써 대가를 치른다.

로만이 한스를 보았다.

한스는 처음 보는 도련님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경비병에게 연락하라. 오늘의 일을 보고하고, 이곳으로 병력을 보내 뒷수습을 하라고 말이야.”

“아, 알겠…… 딸꾹, 습니다.”

딸꾹질하는 한스.

그는 시체들을 한번 확인하더니, 창백한 표정으로 황급히 성으로 뛰어갔다.

압도적이었던 전투.

그러나 로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몸이라니.’

로만.

아니, 백중혁.

무림에서 그는 정점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다.

수백, 수천의 무인들이 백중혁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학살을 당했고, 피가 강이 되어 흘렀을 때 천마신교가 무림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랬던 자신이 겨우 시정잡배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데 수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백중혁의 정신을 가진 로만으로서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기의 흐름이 엉망이야. 체내에 보유하고 있는 기의 양도 얼마 되지 않고.’

최악이었다.

그래도 나름 무술을 훈련한 흔적은 있었지만, 로만의 기준에서는 하지 않은 것만 못했다.

‘이따위 몸으로 새로 시작해야 한다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게는 백중혁으로서 무공을 갈고닦았던 지난 경험들이 있다. 처음부터 올바른 방향을 정해서 무공을 연마한다면, 최악의 조건이라 할지라도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빠르게 정보를 모아서, 몸의 기반을 만들 환골탈태(換骨奪胎)부터 진행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때였다.

“도, 도련님.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구타를 당하던 사내아이였다.

거동이 불편한 모양인지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예를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쓰러운 모습.

그러나 로만의 음성은 차가웠다.

“나는 네가 불쌍해서 도와준 것이 아니다. 블러드 팽 패거리가 드미트리의 법도를 어겼기 때문에 형을 집행한 것이고, 너 또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조금의 거짓 없이 너의 상황을 설명하라. 만약 네 말에 거짓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네 혓바닥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내아이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법 강단이 있었다.

구타를 당할 때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확실히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아시다시피 블러드 팽은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받는 세력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땅을 빌리기 위해서 블러드 팽에게 돈을 빌렸고, 농작물을 정상적으로 수확하면 그 돈을 충분히 갚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러드 팽의 고의적인 방해로 농사를 망쳐 버렸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제 누이를 탐내서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련님. 저희는 억울합니다. 비록 가진 것이 많은 집안은 아니나, 그렇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제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으니, 제발 저희를 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주십시오.”

사내아이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말은 논리정연했고, 상황을 고하는 사내아이의 음성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로만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얼굴은 새카맣고 근육도 없이 빼빼 마른 몸이었지만, 사내아이의 눈빛에서는 총명함이 보였다.

‘사천왕(四天王) 중 한 명이었던 광마(狂魔)를 이런 허름한 환경에서 얻었었지. 그때의 광마는 별 볼 일 없는 사내아이에 불과했지만, 후에 성장해서 그 누구보다도 든든한 우군이 되었어. 왠지 광마를 보는 듯하구나.’

“이름이 무엇이냐.”

“……케빈입니다.”

“케빈이라. 내 너의 이름을 기억하마. 그리고 수일 안으로, 이번 사건은 올바른 과정을 통해 확실하게 처리해 주마.”

“헉!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케빈이라는 소년은 수차례 감사를 표했다.

로만이 빙그레 웃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연.

벌써부터,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얼추 상황을 정리한 로만은 한스의 도움으로 예복을 차려입었다.

곧 로렌스의 영애가 도착할 시간.

전형적인 귀족의 영애를 만나는 자리인데, 피와 더러운 흙탕물에 물든 옷을 입고 만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한스를 통해 두 가문의 약혼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번 혼인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은 정략결혼입니다. 로렌스 자작 가문은 최근에 주변 영지들과의 분란으로 수차례 전쟁을 벌이면서, 금전적으로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희 드미트리 가문에게 정략결혼을 제안한 것이죠. 그래도 다행인 건 도련님이 이번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셨다는 겁니다. 로렌스 가문의 영애는 근방에서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만큼, 도련님이 그분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리셨죠.”

대충 그림이 보였다.

두 가문.

로렌스는 자금이 필요했고, 드미트리는 확실하게 귀족 가문으로 자리매김할 배경이 필요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 거래였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로렌스는 드미트리 가문의 차남(次男)을 원했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적극적으로 혼인 의사를 밝히면서 둘의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었다.

로만이 로렌스의 영애를 본 것은 한 귀족 파티에서 먼발치에서 확인한 것뿐이라서, 둘이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이라.’

사실, 로만으로서는 마음에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자신에게 닥친 현실이라 흐름에 몸을 맡기고는 있지만, 언제든 이 결혼을 뒤엎을 의향이 있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서로의 마음이 맞아야 할 수 있는 일. 평생의 연(聯)을 맺는 과정에서 가문의 배경과 같은 조건적인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아. 기회를 보고, 이 혼인을 무를 방법을 찾아야겠어.’

상대의 배경.

영애의 미모.

그런 건은 로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그날 오후.

예정대로 로렌스의 영애는 드미트리를 방문했다.

“플로라 로렌스라고 합니다.”

소문대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기른 금발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고급스러웠고, 이목구비 그 어느 한 곳도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전형적인 미인의 얼굴. 특히 호수처럼 맑고 차분한 눈빛은 보자마자 빨려 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로만 드미트리가 그녀와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는지를 알 것 같았다.

외모라는 단 하나의 강점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상당한 가치를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플로라는 따로 걷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한산한 공간에 도달하자 싸늘한 얼굴로 돌변했다.

“우리의 결혼을 없었던 것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파혼(破婚).

그것이, 플로라 로렌스가 드미트리 영지를 방문한 이유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