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블러드 팽 (3)
정보는 발보다 빠르다.
블러드 팽 드미트리 지부가 무너지자, 곧바로 그와 관련한 소식이 로렌스에 있는 본거지에 전달되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냐?”
“예. 정보원들에 의하면, 로만 드미트리 단 한 명에 의해 드미트리 지부원들이 전부 당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드미트리 기사단도 움직인 상태라, 이대로 있다간 전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빌어먹을.”
벤 마일즈.
블러드 팽의 리더인 그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군.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는 절대 그 정도의 인물이 아니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는 녀석이, 그것도 왕실 검술 아카데미의 입학도 거부당한 녀석에게 드미트리 지부가 통째로 날아갔다고? 이건 말이 안 돼.”
며칠 전.
수하들이 로만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벤 마일즈는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웬만한 집단은 상대가 귀족이면 감히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귀족들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족속.
가문의 복수를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귀족과의 문제는 좋게 해결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기에 블러드 팽은 엄청난 악명을 얻을 수 있었다.
대단한 세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귀족을 테러하는 엄청난 일을 벌였으니 말이다.
이번 일도 비슷한 맥락이다.
벤 마일즈는 로만 드미트리를 처단함으로써, 사그라져 가는 블러드 팽의 악명에 다시금 불을 붙이려고 했다.
상대도 딱 적당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드미트리의 장자라고는 하나, 소문에 의하면 로메로 남작은 로만보다는 다른 두 아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로만의 죽음을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 손익 계산을 모두 끝냈을 때, 벤 마일즈는 대담하게도 수하에게 드미트리 한복판에서 그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실패는 의심하지 않았다.
귀족도 같은 인간.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칼이 몸에 구멍을 뚫으면, 상대는 피를 줄줄 흘리며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로만을 따라간 조직원들이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블러드 팽 드미트리 지부가 완전히 털려 버렸다.
‘이대로 도망치면 우리의 악명은 끝난다.’
상대의 평판이 문제였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서 쉽게 생각했는데, 그런 녀석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돌면 앞으로의 활동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선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언제나처럼 조직원들을 해산시키면 당장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으나, 예전과 같은 악명을 유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벤 마일즈가 말했다.
“로만의 행방은?”
“방금 드미트리를 나섰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새벽의 이슬에서 정보를 얻은 모양입니다. 드미트리 기사단과 따로 움직이는 상황이라 로만이 먼저 로렌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그에게 꼬리가 붙잡히면 그때는 도망치기가 힘들어집니다.”
“결국 혼자란 말이지.”
벤 마일즈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황당했다.
블러드 팽을 얼마나 만만히 보았으면, 감히 혼자서 로렌스의 본거지를 공격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수십 킬로미터가 떨어진 로렌스에까지 와서.
이건 물러나서는 안 될 문제다.
드미트리 기사단과 부딪칠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지금 당장 병력을 집결시켜라. 오늘 우리는 드미트리 가문의 애송이를 죽이고, 다시 한번 블러드 팽의 악명을 떨칠 것이다.”
리더로서의 결단.
이 순간만큼은, 벤 마일즈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했다.
* * *
드미트리 기사단이 로렌스 영지에 도착한 시각은, 중천에 떠올랐던 해가 조금 저물어 갔을 때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훈련 도중에 사건이 발발하는 바람에, 발목을 붙잡는 요소가 많았다.
멀리서 보이는 로렌스의 성벽.
선두로 나선 조나단 기사단장이 방문 목적을 밝혔다.
“드미트리 남작 가문의 기사단장 조나단이다!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이신 로만 도련님이 로렌스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당장 성문을 열어라! 블러드 팽이 지금 로만 도련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한시가 급했다.
성벽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지만, 로렌스의 성문은 미동도 없었다.
성벽 위.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사각 턱에 단호한 인상의 사내는, 조나단의 재촉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무장한 병력은 성문을 열어 줄 수 없습니다. 로렌스에 출입하길 원하신다면, 무장을 모두 해제하고 정식 절차를 밟으십시오.”
“방금 말하지 않았나! 로만 도련님이 위험하다고! 도련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장이 필요하다!”
“저희의 입장도 이해를 해 주십시오. 그 어떤 영지가 아무런 통보 없이 들이닥친 무장 병력에 성문을 열어 준답니까? 급한 사정은 알겠으나,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이 위험한 것이라면 저희가 자체적으로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선택하십시오. 이대로 말머리를 돌려서 가시든가, 아니면 무기를 모두 버리고 순순히 정식 절차를 밟으시든가. 선택지는 그것뿐입니다.”
“이익!”
조나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로렌스와 드미트리.
아무런 교류가 없는 가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성문을 열어 주지 않는 상황에, 머리로는 이해해도 속에서는 열불이 치솟았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로만 도련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너희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드미트리 기사단의 단장 조나단이다.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것이고, 너희들의 모습을 내 눈에 담을 것이다. 그러니 문을 열어라. 지금은 꽉 막힌 절차에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힘을 합쳐 도련님을 찾을 때다.”
쿠르르르.
허리춤의 검에서 진동이 일었다.
3성의 오라 기사.
조나단의 기세는 일개 경비대장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경비대장도 그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긴장감이 팽배하게 차올랐다.
그때였다.
“경비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로렌스의 병사.
그가 다급하게 경비대장에게 달려가더니, 밖에서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경비대장에게 속닥였다.
창백해지는 경비대장의 얼굴.
그가 화들짝 놀랐다.
“그게 사실인가?”
“예. 지금 로렌스 광장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로렌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상황에, 조나단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문 열어, 이 개새끼들아!”
* * *
로렌스 광장.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그곳은 평화로웠다.
일상적인 풍경이 연출되던 곳이었는데, 한 사내의 등장은 사람들의 평화를 나락으로 빠트렸다.
“꺄악!”
“저, 저게 뭐야?”
질질질.
로만.
그가 나타났다.
드미트리 기사단이 도착하기 1시간 전에 로렌스에 도달한 그는,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광장 중심부로 질질 끌고 갔다.
그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은 기겁하며 길을 내주었다.
일상적이지 않은 광경에, 어느새 사람들은 로만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지?”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당황하는 사람들.
그런데도 로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항하는 사내의 머리칼을 더욱 우악스럽게 움켜쥐자, 사내가 메마른 입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사내의 정체는 바로 벤 마일즈였다.
블러드 팽의 수장.
그는 로만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상황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상대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다.
빠르게 처리하고 잠적하면 그만이라고 판단했건만, 이후의 벌어진 상황은 아직도 믿기질 않았다.
블러드 팽의 본거지에 도착한 로만. 그때부터 학살이 시작되었다.
수십 명의 조직원이 달려들었는데도 로만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검이 번뜩일 때면 조직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압도적인 광경.
눈이 팽팽 돌았다.
상식의 경계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게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범죄 조직은 정보가 생명이고, 그렇기에 로만이 얼마나 한심하고 하찮은 인간인지를 잘 알고 있다.
보복 행위도 사람을 가렸다.
만약 로만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로만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벤 마일즈는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도망쳐야 해.’
하지만 판단은 늦었다.
로만을 처리하겠다고 얼굴을 내밀었을 때부터,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제한적이었다.
그 결과.
벤 마일즈는 이 꼴이 되었다.
얼얼한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피로 시야도 확보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본능이었다.
그래서 빌었다.
로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먹거렸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로만 도련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블러드 팽 조직을 로만님에게 바칠 것이고, 그간 모아 두었던 금은보화도 모두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 주십시오. 주제도 모르는 하찮은 개 한 마리를 살려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단 한 번만 자비를 베푸신다면, 로만 도련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개 한 마리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간절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발악했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우뚝.
로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날 위해 목숨을 바칠 개 한 마리라.”
피식.
웃었다.
어느새 광장 중심부에 도달한 상황에, 로만이 벤 마일즈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판단은 내게 이빨을 드러내기 전에 했어야지.”
“도, 도련님 제발…….”
꽈악!
머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 내가 붙잡고 있는 이 자는 그간 고리대금으로 무고한 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블러드 팽의 리더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블러드 팽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세력인지를.”
웅성웅성.
사람들이 동요했다.
둘의 대화.
로만 드미트리와 벤 마일즈의 신분에 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피가 끓었다.
한껏 고조되는 분위기에, 로만은 로렌스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하려고 했던 일을 직접 행했다.
“블러드 팽은 드미트리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추잡한 수작질로 드미트리의 영지민들을 나락에 빠트렸고, 그걸 방해한 나를 죽이려는 의도까지 보였다. 블러드 팽의 죄는 명백하다. 고로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악(惡)의 뿌리를 뽑겠다.”
눈을 감을 시간도 없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퍽!
로만은 그대로 벤 마일즈의 얼굴을 땅바닥에 강하게 처박았다.
피가 튀었다.
얼굴이 뭉개지고, 벤 마일즈는 동공이 풀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질질 끌려오는 동안 살려 달라고 수도 없이 내뱉던 벤 마일즈가, 축 늘어진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죽음이 일상적인 세상에서도, 지금 목격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때.
“도, 도련님?!”
경악한 얼굴의 조나단과 드미트리 기사단.
그들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밖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그때.
플로라는 아버지의 집무실 앞을 서성였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드미트리 영지를 방문한 직후.
정식으로 파혼 의사를 밝힌 그녀는, 로렌스로 돌아와서 아직 아버지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파혼.
로렌스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일이다.
드미트리의 자본력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던 아버지의 계획이 모두 무산될 테고, 그간 플로라를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던 아버지로서도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을 터.
아버지의 실망한 표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파혼을 선언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이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했건만, 막상 자신에게 닥친 현실에 플로라는 겁쟁이가 되고 말았다.
‘그래, 말하자. 내 인생이야. 정략결혼 따위로, 마음에도 없는 사내에게 팔려 나갈 수는 없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정략결혼이라 할지라도.
드미트리의 얼간이와 같은 사내가 아니라, 자신이 조금이라도 존중할 수 있는 사내와 하고 싶었다.
이건 옳은 선택이다.
플로라가 문을 열려는 그때.
“영주님! 영주님!”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슨 큰일이 난 모양인지, 그는 플로라를 발견하고도 대충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집무실로 들어갔다.
플로라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코앞에서 닫힌 문에, 플로라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건물 밖에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했던 로만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을 벌였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