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615)

8화 변화 (1)

로렌스 자작의 집무실.

그곳에서는 한참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르코(Barco) 가문의 동태는 어떤가?”

“아무래도 그들이 결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최근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바르코 가문에서 골든 뱅크(Golden Bank)에 의뢰해 거액을 대출받았다고 합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바르코 가문이 대출을 받아서까지 준비하는 것은 전쟁밖에 없겠지요. 그들이 먼저 용병들을 쓸어 담기 전에, 저희도 빠르게 실력 있는 용병들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이제 전쟁은 시간문제입니다.”

“……후우.”

가문의 가신이며 전략가인 도플러의 말에, 로렌스 자작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에는 전쟁이라니.”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분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로렌스를 비롯한 가문들은 카이로 왕국을 기준으로 동북쪽에 위치하는데, 산이 많은 지리적 특성상 농사를 지을 땅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로렌스는 다른 영지들에 비해 비옥한 토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동북쪽에서 생산하는 대다수의 농작물이 로렌스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코 가문에서 하나의 문서를 제시했다.

알고 보니 로렌스 가문의 선조가 빚을 졌다는 내용이었고, 그 담보로 비옥한 토지가 걸려 있었다.

분쟁이 폭발했다.

로렌스로서는 정확히 사실 파악이 되지 않는 문서의 약속을 이행할 수 없다고 버텼고, 바르코 가문은 서류의 권리를 주장하며 로렌스를 압박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바르코 가문의 서류는 진위 여부가 확실히 파악되지 않은 것이었는데, 문제는 바르코 가문의 친인척이 중앙 정부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르코 가문의 권리는 인정되었다.

막대한 빚을 갚든가 토지를 내놓으라는 판결에, 로렌스 가문은 문을 걸어 잠그고 항명의 목소리를 높였다.

시시비비(是是非非)가 해결되지 않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전쟁.

바르코 가문은 전쟁을 준비했다.

로렌스로서는 대화를 수차례 진행했지만, 이제는 골든 뱅크에서 돈을 빌렸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도플러가 말했다.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습니다. 바르코 가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가 가문의 기둥이 뽑힐 바에는, 전쟁을 각오하고 결사의 항전을 벌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미트리 가문과의 혼인입니다. 드미트리가 비록 평민 출신의 가문이라고는 하나, 동북쪽에서는 알아주는 대부호이지 않습니까? 바르코 가문이 무엇을 담보로 골든 뱅크에서 돈을 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보유한 돈이 드미트리 가문보다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걸 알기에,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을 드미트리의 얼간이에게 보낸 것이지 않은가.”

“영주님. 로렌스를 위한 판단이었습니다. 영주로서 옳은 결단을 내렸으니, 본인을 자책하지 마십시오.”

“……알겠다.”

대답과는 다른 표정이었다.

딸인 플로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팠다.

‘바르코에게 땅을 내주는 순간, 우리 가문은 끝난다. 하이에나처럼 콩고물을 노리는 가문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물어뜯으려고 하겠지. 딸을 위해서도 이것이 옳은 판단이다. 가문의 위상이 추락하는 순간, 모두가 흠모하는 미녀의 미래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적어도 가문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혼인을 보낸다면, 드미트리에서도 우리 딸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겠지.’

괴로움을 삼켰다.

이건 현실이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었다.

회의가 정리되었다.

드미트리와의 혼인이 성사되면.

그때부터는 용병을 구하고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제아무리 바르코가 동북쪽에서 강한 무력을 갖추었다지만, 드미트리의 지원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때였다.

벌컥!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플로라를 지나치고 집무실에 들이닥친 한 병사.

그가 로렌스 자작에게 전달한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그게 정말 사실인가?”

“예.”

“크흠.”

믿을 수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가 없다지만, 소문에 의하면 로만은 전형적인 우월주의에 빠진 개새끼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블러드 팽을 소탕했다니.

말이 되질 않았다.

일단 로만이 그만한 무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거니와, 블러드 팽은 본거지가 밝혀지지 않은 점조직이지 않은가.

만약 실체가 그리 쉽게 드러나는 조직이었다면, 블러드 팽은 지금껏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자세히 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사가 무엇을 보았는지를.

“로만 드미트리가 영지를 방문할 때만 하더라도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플로라 아가씨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이니, 아무런 의심 없이 영지의 출입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1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나. 경비 교대를 위해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로렌스 광장에서 로만이 한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내가 바로 블러드 팽의 리더인 벤 마일즈였습니다. 로만과 블러드 팽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만은 로렌스의 영지민들이 보는 앞에서 블러드 팽의 죄목을 읊고 그대로 처형해 버렸습니다.”

상식 밖.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블러드 팽의 소탕은 분명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로만이 플로라의 약혼자라고는 해도, 로렌스의 땅에서 일을 처리하면서 섣부르게 행동하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도플러가 말했다.

“로렌스의 주인인 영주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저지른 살인입니다. 이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단호한 목소리.

로렌스 자작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선후(先後)의 문제?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위.

블러드 팽을 처리했다는,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로만 드미트리를 불러들여라. 내 직접 얼굴을 보고, 이번 일의 사정을 듣도록 하겠다.”

로만을 데려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로렌스의 경비대가 로만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부름을 받자마자 집무실에 얼굴을 보였다.

로만은 혼자가 아니었다.

기사단장 조나단을 대동한 걸음에, 로렌스 자작이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역시.’

이번 사건은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드미트리 기사단의 단장이 따라붙은 것으로 보아, 그들의 도움으로 블러드 팽을 처리한 것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 로렌스 자작님을 뵙습니다.”

“예는 생략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거라. 대체 왜 로렌스에까지 와서 그런 잔인무도한 일을 벌인 거지?”

날이 선 질문.

로만의 표정은 담담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도, 목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건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블러드 팽이 무고한 드미트리의 영주민들을 핍박하고 있었고, 저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러자 블러드 팽이 제 목숨을 노리더군요. 목적이 있어 걸음을 옮기던 중에 블러드 팽의 습격을 받았고, 저는 그들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렌스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입니다. 로렌스에 본거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저는 그곳을 습격해 리더인 벤 마일즈를 확보했습니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로렌스에서의 권리다. 너에게는, 이곳에서 누군가를 처형할 권리가 없다.”

“알고 있습니다.”

권리.

중요하다.

그것은 명분이고, 로만도 선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블러드 팽의 정보를 알아내면서,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저는 로렌스에서 블러드 팽을 제대로 처벌할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벤 마일즈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아닙니다. 블러드 팽의 리더라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온갖 죄목으로 인해 로렌스에서는 제법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렌스는 그동안 어떻게 대처했습니까? 방관했습니다. 여러 사건 사고로 벤 마일즈가 붙잡힌 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대한 보석금에 풀어 준 경우가 수차례입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을 뿐입니다. 로렌스의 방법을 믿지 못했기에,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이번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녀석이 감히!”

“도, 도련님!”

당돌한 발언.

도플러는 얼굴을 붉히며 고함을 쳤고, 조나단은 당황해서 로만을 말렸다.

상대는 로렌스 자작.

드미트리 가문보다도 높은 자작 가문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눈앞에 두고도, 로만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로만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실망했습니다. 블러드 팽을 처리한 일로 치하(致賀)를 해 주리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절차의 문제로 저를 다그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로렌스뿐만 아니라, 동북쪽 일대의 문제로 거론되던 블러드 팽을 해결했습니다. 로렌스에서는 방관하고 지켜보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저는 제 손에 직접 피를 묻혔습니다. 자작님에게 묻겠습니다. 제가 정녕 잘못했습니까?”

로렌스 자작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도플러를 보았다.

“저 말이 사실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벤 마일즈가 이미 알려진 인물이라는 것 말이다. 그것이 정말 사실이냐고 물었다.”

도플러가 당황했다.

벤 마일즈.

그도 알았다.

블러드 팽의 리더인 줄은 몰랐으나, 워낙 악명이 높아서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도플러의 반응.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로렌스 자작의 시선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로만을 향했다.

“이번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도록 하겠다. 비록 네게 로렌스의 땅에서 누군가를 처형할 권리는 없지만, 애초에 우리가 일을 똑바로 했다면 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겠지. 이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따로 보상을 해 주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그만 물러나도록.”

“예.”

로만이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조나단은, 황급히 로만을 따라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탁.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한 방 제대로 맞았어. 저 녀석이 바로 로만 드미트리란 말이지?”

로렌스 자작.

그의 얼굴에, 웃음이 활짝 피어올랐다.

호랑이의 자식은 역시 호랑이였다.

로만의 당당한 태도를 바라보며, 로렌스 자작은 자신의 사위라는 시각으로 그의 모습을 평가했다.

“그렇지. 남자란 자고로 저런 당당함이 있어야지. 무고한 영지민을 위해 직접 손에 피를 묻히는 후계자라. 대체 누가 저 녀석을 얼간이라 부른단 말인가? 사내야, 아주 멋있는 사내야.”

웃음이 나왔다.

로만의 말은 궤변이었고, 원래라면 처벌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럴 수 없었다.

로만과 같은 사내가 자신의 사위라고 생각하니, 없었던 정마저 생겨나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눈빛.

당당한 태도.

멋있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처참했던 이미지가, 실물로 확인해 보니 완전히 달랐다.

“영주님. 그래도 이번 일을 이렇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나. 곧 플로라의 남편이 될 녀석이야. 남자가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저런 결단력과 실행력이 필요한 법이지. 그리고 무고한 시민을 죽인 것도 아니지 않나. 그간 우리를 괴롭히던 블러드 팽을 처리했으니, 오히려 그 녀석의 말처럼 치하해야 옳은 일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번 일은 그만 넘어가도록 하지. 기분이 아주 좋아. 로만이 플로라에게 어울리는 사내였을 줄이야.”

들떴다.

드미트리와의 정략결혼은 항상 로렌스 자작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플로라.

딸을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로만이 얼마나 멋있는 사내인지를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 당장 플로라를 불러오거라.”

그때까지는 몰랐다.

두 가문의 혼사.

그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사실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