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변화 (2)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랐다.
집무실에서 나오는 병사를 붙잡은 플로라는, 그제야 로렌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았다.
‘세상에.’
블러드 팽.
로렌스 인근에서 극악무도한 범죄 집단이라 불리는 세력.
한때는 귀족 가문들이 그들을 소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었지만, 쥐새끼같이 은밀하고 반드시 보복하는 그들의 행동력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플로라에게 블러드 팽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았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문제가 없을 테니, 되도록 그들과 연관되지 않으려고 했다.
파혼을 말하던 날.
로만은 그런 그들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자신과 파혼한 책임으로 떠맡은 일이기에, 플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로만을 말렸다.
그때.
“우리는 이제 남남입니다. 그러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로만은 선을 그었다.
정략결혼이라는 연결 고리가 사라진 이상, 서로의 인생에 관여하지 말자고 확실한 입장을 밝혔다.
황당했다.
화도 났고, 상대가 이해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까?
자신에게 파혼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이렇게라도 까칠하게 나와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생각이 많았다.
당연히 로만이 뱉은 말을 실행에 옮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블러드 팽을 소탕했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남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로만은 겨우 며칠 만에 처리해 버린 것이다.
상식이 무너졌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그건 잘못된 소문이었다.
만약 조나단 기사단장이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로만이라는 사람은 얼간이라고 불릴 만큼 하찮은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이 행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았으며, 내뱉은 말을 지키는 행동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블러드 팽의 리더인 벤 마일즈를 직접 처단했을 정도면, 검도 휘두르지 못하는 반푼이라는 소문 또한 거짓일 확률이 높았다.
대체 왜?
로만은 세상의 평가에도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그의 진짜 모습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플로라는 로만을 알아 가려는 노력이라도 했을 것이다.
후회는 이미 늦었다.
물은 엎질렀고, 플로라는 아버지에게 불려 갔다.
로만을 칭찬하는 아버지.
집무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만에게 흠뻑 반한 아버지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저희 파혼했습니다.”
플로라의 발언.
로렌스 자작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플로라.
로렌스 자작의 금지옥엽이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평생을 소중하게 키웠던 딸이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미 파혼을 통보했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로렌스 자작.
처음 보는 아버지의 분노에 플로라는 가슴이 뛰었지만, 애써 침착한 얼굴로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예. 지난번에 드미트리 영지를 방문했을 때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문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존중할 수 없는 사람과의 결혼은…….”
“플로라. 나는 네가 정말 현명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말을 툭 끊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이 아비가 전에 말했었지. 영지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지금 바르코 가문은 우리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골든 뱅크에 거액의 돈을 빌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 더 이상 바르코 가문과의 타협은 없다. 그들은 이번 문제를 빌미로 우리를 무릎 꿇릴 것이고, 정당한 명분도 있기에 모든 것을 앗아 가겠지. 그것은 단순히 금은보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땅, 우리의 명예, 그리고 로렌스의 꽃이라 불리는 너까지도. 그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의미다.”
“로렌스는 약하지 않습니다. 바르코라 할지라도,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바르코 가문만 나섰더라면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 있겠지. 문제는 진위 여부도 확인되지 않은 문서를 ‘중앙 정부’에서 승인해 주었으며, 특별한 담보도 없는 바르코 가문에게 골든 뱅크가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두 가문만의 싸움이 아니다. 바르코 가문에게 힘을 빌려준 세력들은, 본인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만들겠지.”
“…….”
플로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똑똑했다.
어렸을 때부터 영재라 불렸으며, 아카데미 과정을 일찍 수료할 정도로 명석한 머리를 자랑했다.
그러나 그건 방구석 지식일 뿐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그리고 도서관에서.
차가운 현실이 아니라,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학습한 내용.
그녀가 판단하기에 로렌스는 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이상적이지 않았다.
로렌스 자작이 말했다.
“드미트리 가문과의 정략결혼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북쪽에 위치한 가문에서 바르코 가문의 마수를 해결할 만한 힘을 보탤 가문은 그들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 아비는 너에게 허락을 구했었다. 가문의 위기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느냐고. 당연히 네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었어도, 그때 거절했다면 지금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명망 높은 가문 중에서 네가 마음에 드는 결혼 상대를 고르면 되는 일이니, 한발 뒤로 물러났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전에는 네가 모두가 흠모하는 로렌스의 꽃이었다면, 지금은 파혼이라는 선택으로 흠집이 남았다. 다른 가문들은 사태를 지켜보려고 하겠지. 단순히 너와의 결혼을 위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택일 테니까.”
권력의 세계.
선택은 큰 대가를 따른다.
정략결혼을 통해 드미트리라는 배경을 얻었던 로렌스는, 파혼으로 인해 더한 것을 잃고 말았다.
조금 전.
로렌스 자작은 로만을 만났다.
괜찮은 사내였다.
눈빛은 날카로웠으며, 자신을 마주하고도 주눅 들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사내.
그리고 영지민들을 위해 블러드 팽을 처리한 것을 보면, 자신의 사람들은 특별히 아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정략결혼이라 할지라도.
상대가 소문처럼 얼간이가 아니라서 말이다.
로렌스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그 선택지가 최악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물을 엎질러 버렸다.
덕분에 바르코 가문을 상대하려고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예전에 바르코 가문은 우리에게 정략결혼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우리의 비옥한 땅이 탐이 났던 것이겠지. 그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주든 간에, 바르코 가문의 장자는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사실이 거절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너는 드미트리가 아니라 바르코 가문의 여자가 될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적어도 전쟁을 치르기 전에는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바닥에 추락했을 때는 상황이 다르다.”
정략결혼의 이유.
찢어지는 마음에도 그런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상대가 바르코이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호시탐탐 로렌스를 노려 왔던 그들에게 패배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에, 로렌스 자작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플로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각.
그 세상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없었다.
바르코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그리고 드미트리와의 혼인으로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그녀는 순진했다.
잔인한 세상에서 순수한 마음을 가졌기에 파혼을 택했고, 그 결과가 어떨지를 예상하지 못했다.
차가운 현실.
로렌스 자작은 숨을 들이켰다.
아직은, 물을 주워 담을 시간이 있었다.
“당분간은 네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거라. 나는 드미트리와 다시 약속을 잡고, 파혼을 없던 일로 할 것이다. 내 딸아. 우리는 귀족이다. 평민들처럼 하루 먹고사는 것을 걱정하는 처지가 아니라,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만큼 그만한 책임이 뒤따르는 위치에 있다. 그러니 부디 이번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하고 있거라. 만약 드미트리가 우리를 매몰차게 거절한다면, 그때는 바르코 가문과의 전쟁에서 우리의 승산이 희박해지겠지.”
다행히 세간에는 파혼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실수를 무르기 위해서는 지금밖에 없을 터.
로렌스 자작은, 충격을 받은 플로라를 뒤로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지금부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 시각.
로만은 드미트리 기사단과 같이 로렌스를 떠났다.
이동하는 길.
기사단장 조나단은, 힐끔힐끔 로만의 모습을 확인했다.
‘정녕 내가 아는 로만 도련님이 맞는 걸까.’
로만.
자신이 아는 로만은, 로렌스 자작을 똑바로 바라볼 정도의 심장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블러드 팽을 처리한 일까지.
의문투성이였다.
평소에는 로만과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사이지만, 지금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을 수 없었다.
“도련님, 굳이 로렌스 자작을 그렇게 도발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크게 문제 삼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만약 로렌스 자작이 분노하고 화를 냈다면 도련님이라 할지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문책을 당하는 자리에서.
로만은 오히려 상대를 비난했다.
그때 조나단은 얼마나 놀랐는지, 도중에 로만을 말리려고 다가갔을 정도였다.
“그럴 필요가 있었냐라.”
로만이 웃었다.
필요?
없었다.
그 자리에서는 좋게 푸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자신을 문책하는 분위기에 일부러 태도를 바꾸었다.
“로렌스는 이번 일에서 책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안일한 태도가 블러드 팽을 방관했고, 그로 인해 드미트리의 영지민들이 피해를 받았다. 그래서 사실을 되짚어 주었을 뿐이다. 그 자리에서 나를 상대로 문책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만약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할지라도, 로렌스 자작은 나를 처벌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위기로 보아 그는 아직 파혼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고, 곧 결혼할 가문의 자식을 처벌하는 멍청한 판단을 내리진않겠지.”
“……!”
로만의 행동.
대책 없는 언행이 아니었다.
로만은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었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발언을 내뱉었다.
“애초에 파혼과 같은 중대사조차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가문이다. 그런데도 그에게 잘못을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나는 해결했고, 나는 치하를 받으면 받았지, 문책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당당한 태도와 확신에 찬 목소리.
그 순간.
조나단은 확신했다.
‘도련님이 달라지셨어.’
로만 드미트리.
그는 예전의 그 얼간이가 아니었다.
* * *
로만은 집에 도착했다.
곧바로 욕조에 몸을 담근 그는, 따뜻한 물로 몸에 찌든 핏물을 흘려보냈다.
‘새로운 삶에서도 내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을 죽였다.
적어도 수십 명.
블러드 팽은 그렇게 몰살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로만, 아니 백중혁.
그는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에서 살았다.
만약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 망설이는 나약함을 보인다면, 백중혁의 삶은 어렸을 때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면 반드시 행동으로 옮겼다.
길을 막아서는 자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베어 버렸고, 필요하다면 고문을 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것이 백중혁의 삶이었다.
로만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자신에게 살의(殺意)를 드러내는 존재가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백중혁이 그간 살아오던 방식이다.
만약 앞으로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로만은 언제나 같은 판단을 내릴 것이다.
상대가 블러드 팽이든.
아니면, 그 이상의 누군가든.
로만은 누군가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포식자의 삶을 살았다.
“도련님, 영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샤워를 끝냈을 때였다.
한스의 말에, 로만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한 집무실.
그런데, 무모한 행보를 비난하리라고 생각했던 로메로 남작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기대감을 숨길 수 없다는 표정.
로메로 남작이 말했다.
“그래, 네가 블러드 팽을 직접 처리했다고?”
옆에 서 있는 조나단.
그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을 터.
물음의 의미는 명백했다.
로만의 아버지.
드미트리의 영주이기 전에 한 아들의 아버지인 그는, 장남이 달라졌다는 사실에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