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변화 (3)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로만.
그가 직접 블러드 팽을 처리했다니.
보고하는 사람이 조나단 기사단장이 아니었다면, 로메로 남작은 본인을 능욕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사실은 로만 도련님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로만 도련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블러드 팽의 리더인 벤 마일즈를 처단했습니다. 그리고 로렌스 자작을 대면하는 자리에서도, 본인이 무엇을 위해 그런 행동을 벌였는지 당당하게 설명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만 도련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조나단은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다.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 들은 로메로 남작은, 그간 포기했었던 장남에 대한 기대감이 살아났다.
‘로만이 정말 달라졌을까.’
로메로의 세 아들.
그중 로만은 아픈 손가락이다.
자신과 같이 평민이었던 시절을 경험한, 그래서 하나라도 더 챙겨 주려다가 삐뚤어져 버린 아이.
그를 바라볼 때면 마음이 아팠다.
예전에.
로메로 남작은 인력을 대거 투입해서 철광산(鐵鑛山)의 갱도(坑道)를 확보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로메로 남작의 인생이 걸렸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고, 하루 종일 철광산에서 살았을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그때 로만의 나이는 겨우 3살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걸음으로 아장아장 다가와서는, 그는 아버지에게 주겠다고 작은 과자 하나를 건넸다.
그게 얼마나 귀여웠던지.
갱도 작업으로 얼굴이 새카맣게 변했던 로메로 남작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로만을 안아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로만이 행복하게 살길 바랐다.
다른 두 아들과는 다르게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모습에, 어디에서 무시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용돈을 두둑하게 챙겨 주었다.
그것이 비행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로만은 마음속에 쌓여 있었던 불만을 사치로 풀었고, 그때부터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로메로 남작은 미숙한 아빠였다.
아들의 이탈에 속이 썩었고, 로렌스와의 혼인은 손해를 보면서까지 진행한 아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달라졌단다.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로만이 본인의 재력으로 사람들을 고용해 블러드 팽을 무너트린 것일지라 할지라도, 로메로 남작은 로만이 무엇인가를 주도적으로 실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아들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로메로 남작은 언제든 아들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었다.
“아버님을 뵙습니다.”
로만.
그가 얼굴을 보였다.
방금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게 가라앉은 표정은 너무나도 침착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로만이 변했음을.
로만의 걸음걸이, 로만의 태도, 로만의 표정.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아들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을 상대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을 때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네가 블러드 팽을 직접 처리했다고?”
툭 튀어나온 말.
본능적으로 알았다 할지라도.
로메로 남작은, 로만에게 직접 진실을 확인하길 바랐다.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Yes or No.
진실을 말하면 그만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본인이 겪었던 일을 고스란히 말한다면 이번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덤으로 아버지의 신뢰까지.
로만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는 부메랑이 돼서 돌아오겠지.’
로만에 대한 기대치는 0이었다.
그런데 1을 보여 주어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사람이, 10의 성과를 보였으니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앞으로의 미래.
어떻게 할까.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본인을 숨길 것인가.
무림에서 낭중지추(囊中之錐)는 위험한 단어다.
툭 튀어나올 정도로 빼어난 재능을 보이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망치에 머리가 부서지는 결말을 맞이했다.
만에 하나.
주변의 관심에도 살아남는 사람들을, 무림에서는 고수라고 불렀다.
‘나는 아직 이 세상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녀석은 백중혁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발에 밟히는 개미처럼 하찮은 무력을 보유했고, 나를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은 내 안위를 위해서는 그리 좋지 않은 일이겠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자각하고 충분히 성장할 시간이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명성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매우 적절하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성적인 판단.
무엇이 옳은지를 알았지만, 애초에 블러드 팽과 대립하면서부터 그러한 전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
로만은 감추는 법을 몰랐다.
“예, 제가 했습니다.”
천마 백중혁.
그는 평범하게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부모의 보호를 받았던 유년기 시절이 있다.
그러나 로만.
아니, 백중혁은 달랐다.
백중혁이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힘을 얻었을 때, 그는 차가운 동굴 바닥에 그대로 버려졌다.
어두컴컴한 동굴 안.
백중혁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천마(天魔)의 아들이다. 네가 정녕 나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가운 밑바닥에서부터 그 자질을 증명하고 살아남아라. 아들아. 나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다. 너 하나가 죽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으며, 열둘의 아들이 모두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또 다른 아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니 기억하라. 군림하는 것만이 너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12굴.
막내였던 백중혁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절했다.
동굴에서 같이 생활하는 아이들은 천마의 아들이라고 해서 배려해 주지 않았고, 서로의 것을 빼앗고 경쟁하는 약육강식의 삶을 살았다.
그때의 백중혁은 너무나도 약했다.
왜소한 체격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에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백중혁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설령 힘이 약할지라도, 몸을 크게 부풀리고 독기(毒氣)를 보여 주면 군림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
백중혁은 가장 강한 아이와의 싸움에서 돌로 그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수차례 내려치는 바람에 돌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졌고, 주변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백중혁을 보았다.
12굴의 왕.
백중혁의 위치가 정해졌다.
백중혁은 항상 자신을 드러냈고, 수많은 위협에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천마는 역경을 통해 탄생했다.
만약 가시밭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백중혁은 본인이 천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음을 알았다.
‘세상에 만반의 준비란 없다. 나에게 닥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을 증명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백중혁의 삶.
관심은 익숙하고,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새로운 삶이라고 해서 평범하길 바란다?
웃긴 소리다.
그간 살아온 삶은 지금의 백중혁을 만들었고, 이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로만.
새로운 이름.
그는, 자신을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이번 일.
약간의 설명이 필요했다.
로만은 한스로부터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말했다.
“사실 그동안 따로 검술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지? 이 아비에게 말했다면, 분명히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 주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부릅니다. 저로서는 혼자서도 해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고, 독학이지만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애매한 답변이었다.
혼자 검술을 익혔다니.
로만이 블러드 팽을 처리한 힘이라기에는, 의문이 속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았다.
“블러드 팽은 어떻게 처리했지?”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블러드 팽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강한 집단이 아닙니다. 사채로부터 시작한 협박과 회유로 점조직의 형태를 이루었고, 소수의 수뇌부가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래성이고,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이었습니다. 머리만 잘라 내면 단번에 와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거짓 정보로 유인하고 곧바로 벤 마일즈를 직접 공격했습니다.”
“벤 마일즈를? 그를 유인해 냈다는 말이냐?”
“예. 블러드 팽은 그간의 행보로 확실한 행동 패턴을 보여 주었습니다. 힘이 강한 귀족 가문이 조직원을 건드렸을 때는 입을 다물다가, 만만한 귀족과의 마찰에는 반드시 보복하는 모습으로 본인들의 악명을 지켰습니다. 조금 민망한 말이지만, 저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저를 노리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미끼로 사용했고, 병력이 분산되었을 때 벤 마일즈를 공격해서 그들의 머리를 확보했습니다.”
“너무 위험한 계획이다. 그들이 복수를 작정했다면, 벤 마일즈의 안위를 포기하고 널 죽일 수도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로만의 계획.
위험천만했다.
아들이 그런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에, 로메로 남작은 감정을 숨기지 못해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로만이 말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위험한 계획입니다. 그래서 사실 아버지가 제 움직임을 파악한다면, 드미트리 기사단이 움직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는 블러드 팽에게 곧바로 전달되었겠지요.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묻겠습니다. 아버지가 블러드 팽의 일원이라면. 드미트리 기사단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리더인 벤 마일즈를 구출하겠다고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이 계획의 전제는 그들이 모래성이라는 데 있습니다. 협박과 강요로 조직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제와 비슷했다.
로만은 블러드 팽을 공격했다.
유인 따위는 없었고, 공간을 가득 메운 적들을 모두 도륙하고는 도망치려던 벤 마일즈를 확보했다.
이후의 상황.
블러드 팽의 조직원들은 벤 마일즈를 버렸다.
로만이 설명한 것처럼, 드미트리 기사단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약간의 진실과 대부분의 거짓.
로만은 상식적으로 상황을 풀어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순수 무력으로 블러드 팽을 처단했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실적인 답변을 말했다.
상대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으면서도, 이 일을 본인이 해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설명이 끝났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몇 번이고 되물었던 로메로 남작은, 어느 순간부터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아들아.”
감격스러웠다.
로만.
아픈 손가락.
무엇 하나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이토록 계획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 주다니.
로메로 남작은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 마음이.
아들의 뺨을 날리면서까지 인생을 바로잡으려고 했던 행동이.
로메로 남작의 진심을 드러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 이 근방에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우리 아들이 해내고 말았구나.”
흥이 올랐기 때문일까.
그는, 아들의 변화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니?”
“말씀하십시오.”
“네 검술 실력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구나. 내 아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떤 검술로 블러드 팽을 처리했는지를. 조나단 기사단장. 지금 당장 대련을 준비해 줄 수 있겠소?”
“가능합니다.”
다시 로만에게로 향하는 시선.
아비의 마음.
충분히 이해했다.
얼간이라고 불리던 아들이 무언가를 이루었다는데, 당연히 직접 보고 싶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새로운 삶.
로만은 현실에 충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