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기(氣)와 마나 (1)
마지막.
찰나의 순간.
조나단은 로만이 어떻게 반격하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말도 안 돼.’
딱 한 걸음.
그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지(死地)였다.
뒤로 물러나면 탄력을 받은 목검에 당해 버릴 것이고, 옆으로 빠진다고 해도 검의 영역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오라는 폭발적인 힘이다.
오라의 분출은 순간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데 특화되어 있고, 힘을 전달할 거리가 충분할수록 막아 내는 입장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연히 일반인에 불과한 로만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펼쳐진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공격의 영역을 허물었다.
한 걸음 나아간 것만으로 상대가 완벽하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얼굴을 살짝 틀면서 대담하게도 눈앞에서 공격을 피해 버렸다.
그건 정말이지 간발의 차이였다.
얼굴이 그대로 박살 나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로만은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크리스를 제압해 버렸다.
경악.
상식을 벗어났다.
조나단으로서는,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로만 도련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로만은 얼간이다.
그를 직접 가르쳐 본 경험이 있기에, 제대로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하던 그의 모습에 부정적인 감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눈앞의 로만은 달랐다.
로만은 포기를 모르는 승부사의 기질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검사로서의 기본기가 매우 탄탄했다.
한순간의 타이밍으로 상대를 무너트리는 반격은 럭키 펀치 따위가 아니다.
충분한 기본기와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남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승부수를 성공시킬 수 있다.
탄탄한 수비.
물 흐르는 듯한 공격.
확실했다.
로만의 실력은 한두 해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은 세월이 녹아들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성장하신 거지?’
기억을 더듬었다.
사실 당장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술에 취한 채 거리를 배회하던 로만의 모습을 보았다.
얼마나 한심하던지.
고성방가를 내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그의 모습에,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악명은 더욱 심해졌다.
한심한 인간.
분명히 조나단의 기억엔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블러드 팽 사건을 시작으로, 오라 기사인 크리스마저 쓰러트려 버렸다.
그때였다.
같이 대련을 지켜보던 로메로 남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나단 기사단장.”
“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크리스 부기사단장은 드미트리가 자랑하는 2성의 오라 기사이지 않은가.”
그도 똑같았다.
당혹스러운 순간.
로메로 남작은 설명이 필요했다.
자신의 아들이 급성장한 이유를, 조나단의 입을 통해 듣고자 했다.
잠깐의 망설임.
복잡한 눈빛으로 로만과 로메로 남작을 번갈아 보던 그는, 고민 끝에 제일 상식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로만 도련님이 검술의 천재인 것 같습니다.”
로만은 숨을 골랐다.
볼이 따끔했다.
손을 들어 통증의 부위를 만져 보니, 얇게 베여 나간 상처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심하네.’
크리스.
그는 나쁘지 않은 실력자였다.
공격적으로 상대를 밀어붙일 줄 알았고, 싸움의 흐름을 읽는 눈은 제법 날카로웠다.
문제는.
‘이 세상의 기준에서나 나쁘지 않다는 거지.’
벤 마일즈를 비롯한 블러드 팽 일당을 상대해 보았기에 강함의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의 실력이라면 그들 십수 명은 쓸어 버릴 실력자.
그간 만난 사람 중에는 조나단을 제외하고는 제일 강한 것 같았다.
그러나 백중혁의 기준이라면?
최하(最下).
마교의 말단무사도 크리스보다는 강할 것 같았다.
마지막에 오라의 분출은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무림에서 사용하는 방식에 비해서는 엉성했다.
‘상당히 엉성한 기의 분출이었어. 왜 그렇게 기를 사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한스가 말했던 마나의 힘인 것 같은데, 이 세상은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걸 활용하고 있어.’
호기심이 일었다.
오라.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라면, 그들이 어떤 힘을 활용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크하하하하하.”
로메로 남작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나단의 답변을 들은 그는, 아들이 천재라는 소리에 진심으로 행복한 얼굴을 보였다.
“내 아들이, 우리 장남이 검술의 천재라니. 조나단 기사단장, 그게 정말 확실한가?”
“예. 다른 이유로는 로만 도련님의 성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은 제 능력이 미천해서 로만 도련님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로만 도련님은 천재가 확실합니다.”
“그래? 정말 천재란 말이지.”
얼굴이 폈다.
로메로 남작은, 로만을 보며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아들아.”
“예.”
“최근에 오늘만큼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나는 네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단다. 조나단 기사단장의 말처럼 검술의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아들인 로만이 홀로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사실 자체에 박수를 보내 주고 싶다. 원하는 것이 있거든 지금 내게 말하거라. 상벌(賞罰)은 확실해야 하는 것. 우리 아들을 위해, 이 아버지가 특별히 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로메로 드미트리.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아들의 이탈에 분노하던 그였지만,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아들 바보였다.
그 또한 육아에 서툴러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는 진심으로 로만을 사랑했다.
보상.
판이 깔렸다.
보통은 아버지의 상을 웃으며 넘기기 마련인데, 로만의 반응은 달랐다.
상벌을 받는 것.
로만에게는 익숙한 삶이었고, 로메로 남작이 상을 언급한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로렌스 가문과의 혼인이 무산되면서 제 군 입대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수도로 떠난 두 동생이 병역의 의무를 감당할 수는 없기에, 6개월 뒤에는 제가 전장으로 떠나야겠지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데리고 갈 병력을 직접 선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액 또한 지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단도직입적이었다.
상당히 구체적인 제안에, 로메로 남작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
“……허어.”
병역의 의무.
생각만으로도 씁쓸한 현실이었다.
약소국(弱小國)에 속하는 카이로 왕국으로서는, 그런 방식으로라도 왕국의 위험을 나누어야만 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현실.
혼인한 귀족은 일시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으나, 현실을 받아들인 로만의 모습에 생각이 달라졌다.
아들을 믿고 싶었다.
로만의 삶.
아비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가 활짝 날아오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알겠다. 병역과 관련한 전권을 허락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네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면, 이 아비는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다.”
기대치가 바닥이었기 때문일까.
로메로 남작의 믿음은 맹목적이었다.
로만은 가볍게 웃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크리스를 보았다.
“앞으로 오라를 배워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개인 교습을 위해, 제가 상대했던 저 검사를 배정해 주십시오.”
새로운 문물.
지금은, 이 세상을 조금 더 알아가야 할 때였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크리스는 눈을 떴다.
새파란 하늘이 눈으로 쏟아지는 상황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크흑, 진짜 쪽팔리네.”
패배.
당혹스러운 현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미트리의 얼간이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쥐구멍에라도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현실인 것을.
로만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고,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참담했다.
미남자라고 불릴 정도로 훤칠한 외모를 자랑하던 크리스였는데, 거울에는 앞니 두 개가 빠진 얼간이(?) 한 명이 있었다.
패배만큼이나 절망적인 상황. 황급히 대련장을 확인해서 부서진 이빨을 확인했지만, 그걸 다시 제자리에 붙일 방법은 없었다.
“……죽을까.”
진심으로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예에???!”
“네가 어떤 기분인지는 잘 알아. 하지만 크리스. 영주님의 명령이시다.”
“기사단장님, 아니 스승님.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로만 도련님에게 패배해서 앞니 빠진 얼간이가 되어 버렸는데, 로만 도련님에게 오라까지 가르치라는 말입니까? 이건 진짜 아닙니다. 항명의 형벌로 제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바닥에 발라당 누웠다.
필사의 의지.
로만의 얼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악연이라고 할 만한 사이였기에, 로만에게 패배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조나단이 말했다.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마.”
“…….”
“로만 도련님을 가르친다는 핑계로 그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와라. 네가 이번 일만 잘 처리한다면,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비기(祕器)의 전수를 허락하도록 하겠다.”
“……진심입니까?”
“그래.”
“아씨.”
크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기.
조나단을 3성의 오라 기사로 만든 비결.
항상 그의 비기를 갈구했던 크리스로서는, 조나단의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습니다.”
짜증 섞인 음성.
결국.
크리스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 * *
다음 날.
크리스는 로만을 만났다.
그런데.
피식.
로만이 웃었다.
순간 크리스가 눈을 부릅떴다.
둘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얼굴을 보았을 뿐인데, 갑자기 웃는 것은 그 의미가 너무나도 명백했다.
‘에라이, 씨발.’
사라진 앞니.
그 사이로 바람이 숭숭 불었다.
벌써부터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후회되는 크리스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싫은 일도 감수해야만 했다.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크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부터 오라에 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오라.
마나의 한 갈래로, 기사들이 사용하는 힘을 뜻했다.
마법사들은 마나를 서클에 저장한다면,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마나를 전신에 퍼트렸다.
“오라를 발명한 사람은 선구자(先驅者)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르 황제입니다. 그는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마나를 전신에 퍼트림으로써, 최초로 인간의 육체를 강화하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오라는 이 마나를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힘을 말합니다. 평소에는 체내 곳곳에 퍼져 있던 마나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한순간에 분출함으로써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죠.”
“…….”
로만의 태도는 진지했다.
크리스의 설명에 딴지를 걸지도, 그렇다고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막상 수업을 받을 때는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에, 크리스도 어느 정도의 반감은 가라앉았다.
“사실 오라의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나는 선택받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고, 천에 하나가 오라 기사의 길을, 만에 하나가 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그 자질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라 기사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은 바로 마나를 느끼는 것입니다. 보통 이 단계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마나를 느끼는 데 반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사실 1년이 걸리더라도 마나만 느낀다면 평균 이상은 하는 겁니다. 고로, 재능의 영역이라는 말이죠.”
살짝 당당함이 묻어 나오는 발언이었다.
은근히 본인을 자랑했다.
조나단의 제자로서 반년 만에 마나를 느꼈을 때, 드미트리에서는 천재가 나타났다고 난리가 났었다.
크리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로만은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1년. 그 안에 가능성을 판가름한다는 의미군.”
“예. 마나를 1년 동안 느끼지 못한다면, 사실상 오라 기사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마나를 느끼는 것부터 진행하도록 하지. 네가 경험했던 방식을 설명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막상 마나 훈련을 시작하면, 로만과 자신 중에 누가 승자인지가 확실하게 가려질 터.
‘로만 도련님이 검술의 천재라 할지라도 마나의 재능은 별개의 문제. 이번 훈련으로 현실의 냉혹함을 맛보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겠죠. 크흐흐흐흐, 생각해 보니 이번 일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어.’
들떴다.
그간 마나 훈련에 절망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았다.
로만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는 속마음을 숨기고는, 마나를 훈련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마나 훈련법은…….”
크리스의 가르침.
로만은 점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13화 기(氣)와 마나 (2)
사실 이번 훈련의 전제는 애초에 잘못되었다.
로만은 이 세상의 마나를 이미 느껴 보았고, 천마신공을 통해 소량이지만 단전에 마나를 쌓았다.
그런데도 가르침을 받으려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가진 상식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퇴보의 지름길이다. 무림에서는 기(氣)라고 불리고, 이 세상에서는 마나와 오라라고 표현되는 힘을 직접 체험해 볼 필요가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세상의 방식으로. 설령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일단은 그들의 방식을 따르자.’
상식을 버렸다.
크리스의 가르침은 무림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로만은 정해진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수차례의 호흡.
크리스는 이 과정에서 피부를 간질이는 존재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게 바로 샐러맨더 대륙에서 말하는 마나인데, 로만으로서는 호흡을 몇 번 내뱉지 않았는 데도 주변에 마나가 몰려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평생을 자연의 기운과 동화(同化)하는 삶을 살았던 로만이기에, 그들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유도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다.
한 걸음.
크리스는 1년을 걸려도 성공만 하면 다행이라는 단계를, 겨우 1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성공했다.
이후부터는 마나의 유도였다.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질적이고 신비한 기운이 몸 안으로 들어오자, 로만은 혈관을 따라 그들을 몸 곳곳에 유도했다.
‘확실히 무림과는 방식이 달라. 무림은 운기를 통해 혈관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는 단전에 마나를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그런데 이 세상은 달라. 마나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 곳곳에 마나가 쌓이기를 바랄 뿐, 어떠한 구속력도 존재하지 않아. 특별히 이렇게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자연스럽게 안착하는 기운은 사람의 통제에는 잘 따르겠지만,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수련하면 100년이 지나도 절정의 경지를 넘어가지 못해.’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게다가 문제는 마나의 특성에도 있었다.
무림의 마나는 척박한 대신 무거운 느낌이라면, 이 세상의 마나는 풍부한 대신 조금은 가벼웠다.
받아들이는 만큼 그대로 빠져나가는 마나.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모두 움켜쥐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은 이 세상의 방식으로.’
욕구를 억눌렀다.
심법의 운용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로만은 강해지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일 때였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정도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오라를 발현할 수 있게 됩니다. 몸 곳곳에 퍼져 나가 있는 마나를 일점(一點)에 집중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오라의 발현인 것이죠. 오라의 발현은 여러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검에 오라를 덮어씌워서 파괴력을 상승시키는 방법도 있고, 육체에 적용해서 순간적으로 폭발력을 발휘할 수도 있죠. 확실한 것은 오라를 발현하는 단계를 우리는 1성의 오라 기사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크리스는 모를 것이다.
로만이 벌써 마나를 쌓는 단계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그로서는 쭉쭉 설명하는 것에 불과했는데, 로만은 그 설명에 따라 똑같이 마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마나를 받아들였다.
로만의 구속력(拘束力)은, 체내를 돌아다니는 마나가 그냥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마나.
로만이 오라 발현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화악!
몸이 파랗게 빛났다.
크리스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는데도, 마나를 일점에 집중시켜서 피부를 일시적으로 강화했다.
익숙한 현상.
로만은 비슷한 방법을 떠올렸다.
‘무림의 외공(外功)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외공은 겉을 단련함으로써 강해지는 방식이지만, 크리스가 말하는 방법은 이도 저도 아니야. 겉을 강하게 만들지도, 그렇다고 내부에 마나를 차곡차곡 쌓지도 못해. 일순간에 마나를 분출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한곳에 모여 있지 않은 마나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힘의 분출이 매우 비효율적이야. 크리스가 오라를 발현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떠올렸던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확실했다.
직접 경험해 보니, 단호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마나를 활용하는 이곳의 방식은 쓰레기다.’
크리스와의 훈련.
더 이상은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로만이 오라를 발현하는 그때.
크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어어?!”
이번 훈련.
마나를 느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간단하게 어떤 방식의 훈련인지 숙지만 하더라도 성공인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파랗게 빛나는 피부.
오라의 발현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눈앞의 광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상식 밖.
자신은 마나를 느끼는 데 반년의 시간이 걸렸고, 그것을 분출하기 위해서 3년의 시간을 노력해야만 했다.
그래도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조나단의 제자로서 착실하게 검술을 익혔고, 20대 중반의 나이에 2성의 경지에 들어선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천재였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로만의 발전은 사고 회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후우.”
로만이 눈을 떴다.
숨을 고르는 모습에, 크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방금 정말로 오라를 발현하신 겁니까?”
“직접 봤으면 잘 알 텐데.”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말이 되지 않잖아요. 누구는 3년 반을 투자해서 오라를 분출하는 것에 성공했는데, 로만 도련님은 겨우 30분 만에 그걸 성공했습니다. 솔직히 말씀하세요. 원래부터 오라를 사용할 줄 알았는데, 절 골탕 먹이시려고 일부러 장난치신 거죠? 아아, 이제야 이해가 되네. 애초에 2성의 오라 기사인 제가 도련님에게 패배한 것부터가 이상했습니다.”
제멋대로의 해석이었다.
로만이 30분 만에 오라를 분출하는 천재라는 전제보다는, 은둔 고수였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문제는 후자도 상식 밖이었다.
그렇다면 2년 전의 로만은 힘을 숨겼던 걸까?
대체 왜?
로만을 바라보는 크리스의 시선이 복잡해졌다.
“오라 기사의 강함을 구분하는 성(星)의 기준을 말해 줄 수 있겠나. 내가 지금 이루어 낸 경지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며, 현재 사람들이 최고라고 불리는 자의 실력은 몇 성이라 불리는지 말이다.”
“……일단 오라 발현에 성공하셨으니 도련님은 1성 오라 기사의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라를 물체에 발현한 상태에서 강철을 베어 내면, 그때부터는 2성의 오라 기사라고 불리지요. 진짜는 3성부터입니다. 오라의 강도와 파괴력에 따라 성의 구분을 나누는데, 3성의 기사는 왕국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습니다. 고로, 조나단 기사단장님은 왕국이 인정하는 기사인 셈이죠. 그리고 4성은 왕국에서 이름을 알아주는 정도고, 5성은 대륙에서 알아줍니다. 참고로 대륙 제일의 검사라고 불리는 분이 6성의 검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7성은 아직 그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없습니다.”
6성.
대륙 제일의 경지.
조나단을 만난 로만으로서는, 머릿속으로 상황이 어느 정도 그려졌다.
‘무림을 기준으로 조나단은 이류(二流)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정도. 6성의 기사를 아무리 고평가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기대하는 만큼의 수준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어쩌면 이 세상의 주류는 검술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오라가 천에 하나에게 허락되는 재능이라면, 마법은 만에 하나의 재능이라고 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을 직접 경험해 봐야만 알겠지.’
재밌었다.
무림과는 다른 방식.
세상으로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사실 성의 구분이 무력을 완벽하게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이 대륙에는 랭킹(ranking)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6성의 기사가 대륙 제일이기는 하나, 랭킹 10위 안에 있는 기사가 모두 6성의 경지에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도련님은 대체 언제부터 마나를 연마하신 겁니까? 제가 2성의 경지에 오르는 데 무려 1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천재라고 불리는 저조차도 이랬는데, 2년 전에 만났었던 도련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건 말이 되질 않습니다.”
크리스의 말.
마나를 느끼고, 오라를 분출하며, 검을 통해 발현시키는 것에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푸핫.”
웃음을 터트리는 로만.
정말이지, 이 세상의 수준은 기대 이하였다.
로만의 반응.
크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놓고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비웃는 듯한 모습에 크리스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웃겨서.”
“제 노력이 웃긴다는 의미입니까?”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크리스.
드미트리의 재능.
로만에게 패배했다고는 하나, 자존심마저 꺾인 것은 아니다.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이 달아오른 크리스의 얼굴에, 로만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너에게 하나만 묻겠다. 너는 그 경지에 오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훈련 방식에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간혹 착각하는 것이 있지. 아주 오래전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맹목적으로 옳을 것이라는 착각. 나는 네게 마나의 훈련법을 배우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보이는 이 방식을 네가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걸 몰라서? 아니면, 가르침을 내린 조나단 기사단장에 대한 신뢰가 강해서?”
“…….”
예상치도 못한 발언이었다.
화를 내려다가 한 대 얻어맞은 크리스는, 당황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훈련의 방식.
로만의 말처럼, 그것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해. 답습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지. 앞에서 이미 시행착오를 모두 경험한 방식은, 내가 손해를 볼 이유도 비난을 받을 이유도 없다. 네가 10년간 노력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네가 추구하는 방식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는 것이 웃길 뿐이지. 이 세상은 누군가가 완벽한 답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네가 맹목적으로 따르는 그 방식도, 결국 누군가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었던 한 갈래의 길일 뿐이지.”
천마라 불리던 시절.
로만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설령 마교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말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연구했다.
그러한 노력 끝에.
로만은 자신만의 천마신공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로만의 행보를 비난하던 교도들도, 완벽한 천마신공의 위력에 감탄을 내뱉었을 정도다.
로만은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의 삶.
주체는 타인이 아니다.
대대로 내려왔다고 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것이 정녕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지인지를 고민했다.
물론 그러한 물음들은 삶을 고통에 빠트린다.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하고, 실패한 결과물을 맞이했을 때는 남들의 비난과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변화는 필요하다.
선대에서 내려온 무언가도 처음에는 물음에서 비롯되었듯이, 로만은 항상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다시 묻겠다. 정말 너는 10년간 최선을 다해 노력했나?”
“…….”
말문이 막혔다.
지난 삶을 돌아보았다.
크리스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크리스의 수련 방식은 맹목적이었다.
조나단이 하라는 대로 행했고, 이번에도 그에게 비기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곡을 찔렸다.
세상의 상식을 반하는 발언에도,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지식을 답습하는 것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크리스는 이대로 착실하게 성장해서, 남들이 천재라고 불리는 것처럼 높은 경지에 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뿐이다. 본인의 삶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은 정점의 자리에서 군림할 수 없다. 크리스는 내가 경험한 이 세상의 사람 중에서는 강한 편에 속하나, 우물 안의 개구리는 결국 썩어 갈 수밖에 없지.’
로만의 조언.
선심이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았기에, 로만은 그의 현실을 직시하는 발언을 내뱉었다.
지금부터는 크리스의 몫이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예상한 기대치에서 끝날 것이다.
“이만 훈련을 끝내지.”
말을 끝냈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그렇다면 해답을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되돌아오는 물음.
걸음을 멈추었다.
크리스를 다시 보았다.
피식.
‘재밌네.’
자존심을 버렸다는 것.
그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크리스가, 지금은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