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615)

15화 기(氣)와 마나 (4)

소문은 발보다 빠르다.

로렌스로부터 시작된 소문이, 겨우 하루 만에 드미트리에까지 완전히 퍼졌다.

“그 소문 들었어?”

“로만 도련님이 블러드 팽을 토벌했다는 소문?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로만 도련님은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 반푼이잖아.”

“……그렇긴 한데, 직접 봤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너무 생생해.”

“원래 소문이라는 게 그래. 로만 도련님 정도 되는 사람이 사냥터에 나가서 멧돼지를 잡았어도, 소문으로는 전설의 드래곤을 때려잡은 것처럼 부풀려지는 것이 현실이야. 듣자 하니 로만 도련님이 로렌스의 영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뭘 보여 주기는 한 것 같은데, 아마도 드미트리 기사단이 판을 만들었겠지. 그날, 드미트리 기사단이 허겁지겁 성을 나갔었잖아.”

“그런가? 하긴,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사람들이 양치기 소년을 믿지 않는 것처럼, 드미트리에서 로만의 이미지는 신뢰와는 거리가 멀었다.

황당한 소문.

사람들은 그렇게 치부했다.

로렌스에서 넘어온 상인들이 침을 튀겨 가며 말해 봐도,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비웃음뿐이었다.

한참 사내들이 소문을 떠들고 있는 그때.

곁에서 짐을 정리하던 소년이 귀를 쫑긋 세웠다.

‘……로만 도련님이 블러드 팽을 토벌했다고?’

쿵.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케빈.

로만에게 도움을 받았던 그는, 이후에 한스가 구해 준 허드렛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로서는 로만을 만났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블러드 팽 일당에게 얻어맞으면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로만은 마치 천사처럼 나타나서는 악의 무리에게 심판을 내려 주었다.

블러드 팽 일당의 비명 소리.

입 안에 단검을 쑤셔 넣고 혓바닥을 잘라 내는 모습이, 케빈으로서는 너무나도 멋있게만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케빈에게는 꿈이 생겼다.

‘나도 로만 도련님과 같은 강한 사내가 되자. 어떤 위험에도 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강인한 사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척박한 세상에서, 우리 가족이 살아남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이를 악물었다.

언제 어디서 블러드 팽 일당이 다시 들이닥칠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그라도 힘을 내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들려온 소문.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모두 헛소문으로 취급했지만, 케빈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나뭇가지로 악당을 물리치던 로만 드미트리.

그라면 블러드 팽 일당을 홀로 쓸어 버리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고리대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자신의 영웅은, 겨우 며칠 만에 기적 같은 일을 현실로 만들어 냈다.

‘아아, 도련님.’

울컥했다.

로만 도련님이 정말 자신을 위해서 그런 위험한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평민에 불과한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은 감동으로 밀려왔다.

눈물을 닦았다.

일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울컥하는 감정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언제쯤 로만 도련님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혹시라도 그런 날이 찾아온다면, 케빈은 지금의 감정을 잊지 않고 반드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그렇게 마지막 작업을 끝내려는 그때.

툭.

“도, 도련님……?!”

“오랜만이구나.”

자신을 찾아온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케빈은 자신도 모르게 짐을 땅바닥에 놓치고 말았다.

잠깐은 넋을 잃었다.

이게 현실인가를 의심하던 케빈은, 화들짝 놀라더니 냅다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도련님 덕분에 저희 가족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울먹였다.

케빈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심 어린 말을 토해 냈다.

로만이 말했다.

“케빈,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아……!”

말문이 막혔다.

로만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다.

남들은 사소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케빈은 그것을 사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감격이었다.

목까지 차오른 울음에, 케빈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덕분에 정말 잘 지냈습니다. 블러드 팽 일당은 더 이상 저희를 핍박하지 않았고, 한스 씨가 구해 주신 일로 급한 생계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이라. 지금부터 나는 네게 하나의 제안을 할 생각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앞으로 너의 가족은 생계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찬 바람을 막아 주는 따뜻한 집에서, 매일 삼시 세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고단한 일로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취미 생활도 즐기는 그런 삶을 살게 되겠지. 그렇게 살아갈 방법은 간단하다. 앞으로 내가 그리 만들 생각이다.”

소름이 돋았다.

로만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케빈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중대한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고로, 날 위해 살아라. 네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나는 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할 것이다.”

로만의 발언.

머리에서 벼락이 쳤다.

로만 도련님과 같이 대단한 인물을 따를 수 있으리라고는, 케빈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꿈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로만이 먼저 제안했다.

자신의 사람이 되라고.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지만, 케빈은 로만의 제안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본능이었다.

케빈은, 엎드린 상태로 이마를 땅바닥에 강하게 박았다.

퍽!

“앞으로 로만 도련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로만 도련님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것이고, 누굴 죽이라고 한다면 그 녀석을 죽여 버릴 것입니다. 저희 가족을 돌봐 준다는 그 약속. 그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서는 핏방울이 흘렀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눈으로도 흘러갔지만, 케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미련한 녀석이었다.

충성심을 피로 보이다니.

‘미련함마저 광마를 닮았구나.’

광마도 이랬다.

자리를 지키라는 로만의 명령에, 수백의 정파인을 상대로도 자리를 지켰던 사람이 광마다.

그때 무명(無名)에 불과했던 그는 광마라는 별호를 얻었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공격에 전신이 상처로 뒤덮였고, 몸에서 흐른 피가 강을 만들었는데도, 광마는 신음 한번 흘리지 않고 정파인들을 막아섰다.

천마의 충신.

광마를 처음 거두었을 때도, 로만의 말 한마디에 자신의 머리를 박으면서 충성을 맹세했었다.

“제 삶은 지금부터 도련님의 것입니다.”

케빈의 목소리.

닮은 것 이상이었다.

케빈은, 광마보다도 더 극단적인 녀석이었다.

피식.

웃었다.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아이.

새로운 삶에서, 로만은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래, 너는 지금부터 내 것이다.”

아직은 아무도 로만을 주목하지 않았던 시절.

로만은 사람을 얻었다.

* * *

로만은 케빈을 데리고 왔다.

한스에게 당분간 케빈이 적응하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는, 한스가 알아본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내성에 있는 허름한 공방.

과거 로메로 남작이 사용하던 장소였다.

그래서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바깥 공간과의 차단도 확실해서 수련 장소로 적합했다.

“앞으로 나는 일주일간 공방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동안은 음식과 같은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으니, 절대 안으로 사람을 들이지 마라. 명심해라. 내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이라서 당장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나를 찾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신신당부했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공방 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바닥에는 한스가 미리 준비한 모양인지 지푸라기가 넓게 깔려 있었다.

세심한 디테일이었지만 지금의 로만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로만은 지푸라기들을 한편에 모두 치워 버리고는, 땅의 기운을 온전히 전달받을 수 있도록 가부좌를 틀었다.

천마신공.

기를 운영했다.

순식간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로만은, 단전에 쌓여 있던 마나를 천천히 움직였다.

‘천마신공 1단계.’

현재.

로만의 육체는 아직 천마신공의 걸음마도 떼지 못했다.

나약한 육체에 토대를 닦을 필요가 있었고, 1단계인 인(人)의 단계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동안은 마나를 쌓는 데만 만족했다.

그리고 지금. 로만은 최소한의 마나를 모았다.

천마신공으로부터 비롯되는 무공을 완벽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제 인의 단계에 돌입해야 했다.

‘인의 단계는 몸의 탁기(濁氣)를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화악.

마나가 움직였다.

혈관을 타고 묵직하게 움직이던 마나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벽에 막혔다.

쿵.

탁기였다.

로만은 20대 중반의 나이를 먹도록 단 한 번도 생산적인 삶을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이다.

몸에는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탁기가 쌓여 있었고, 시작부터 탁기에 막혀 버린 상황에 로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침착함을 잃지는 않았다.

애초에 예상한 상황이었고, 그렇기에 최소한의 마나를 모으고서 인의 단계에 돌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의 삶.

로만은 강해져야만 한다.

새로운 인연들을 맺은 만큼, 그들을 지키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이 필요했다.

인의 단계.

그것이 그 시작이었다.

자신을 준비하는 것.

로만은 차분하게 내부를 관조(觀照)했다.

‘단숨에 탁기를 모두 제거한다.’

쿵.

쿠르르르릉.

마나가 반응했다.

천마 백중혁.

한평생 무공에 매달려 살았던 만큼, 로만의 강한 의지에 따라 탁기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나의 힘은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마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100의 잠재력으로도 10위 위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면, 로만은 한계를 넘어서 150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

마나는 로만의 의지에 따라 강하게 휘몰아쳤고, 강력한 충격에 로만의 얼굴에서는 코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주르르륵.

희망적인 증상이었다.

주화입마(走火入魔) 따위가 아니라, 몸의 탁기가 밖으로 배출되면서 검디검은 코피가 흘러내렸다.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로만은 심법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얼굴은 땀으로 흠뻑 물들었고, 코로 흘러나오던 피는 이제는 모든 모공을 통해서 새어 나왔다.

차분하게 한 단계씩.

로만은 탁기를 배출해 냈다.

인의 단계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한번 천마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

그렇게, 로만은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었다.

* * *

한스.

그가 어디론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예정대로라면 저녁은 돼야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그에게 닥친 상황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도련님이 나오셨으려나.”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로만이 폐관 수련에 돌입하자마자, 로렌스에서는 드미트리를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파혼.

한 번은 직접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한스가 로메로 남작에게 로만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만남은 연기되었다.

그리고 오늘. 로렌스 자작과 그 여식이 아침 일찍부터 드미트리 영지를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렇다 보니 그로서는 로만을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세상에는 아직 파혼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왜 아직 로렌스 측에서 공개하지 않는지는 의문이었다.

각설하고.

로만이 필요한 자리였다.

공방에 도착한 한스는, 로만을 당장 불러야 하는 상황인데도 문 앞에 서서 가만히 로만을 기다렸다.

“명심해라. 내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이라서 당장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나를 찾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로만의 명령.

한스는 그것을 기억했다.

성에는 많은 사람이 로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한스로서는 자신의 주인인 로만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최근에 달라진 로만은 빈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자신을 부르지 말라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을 테니, 사람들에게는 당장에라도 로만을 불러올 것처럼 말해 놓고는 가만히 로만이 나오길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스를 찾으러 온 사람이 몇 있었다.

그들을 모두 돌려보낸 한스는, 중천에 떠오른 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야 안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는 익숙한 얼굴.

환한 얼굴로 로만을 반기려던 한스는, 순간 로만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흠칫 놀랐다.

“……도, 도련님?”

날카로운 눈매.

우윳빛의 피부.

그리고 남자답게 건장한 체격까지.

확실했다.

로만의 외형은, 조금 많이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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