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615)

16화 한순간의 선택 (1)

그 시각.

하인의 안내에 따라, 로렌스 자작과 플로라는 접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플로라.”

“예, 아버지.”

“이번 만남은 우리의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다. 특별히 언행(言行)에 조심하거라.”

“……알겠습니다.”

플로라가 힘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만이 블러드 팽을 토벌한 날.

플로라의 세계를 구성하던 상식이 무너지고 말았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던 로만 드미트리는 생각보다 대단한 남자였고, 로렌스 가문은 드미트리에게 매달려야 할 만큼 상황이 매우 절실했다.

한순간의 선택.

플로라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옳은 일이라 생각했던 그 선택이 모든 걸 망쳐 버렸다.

이제는 현실을 깨달았다.

항상 다정하기만 했던 아버지.

플로라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 줄 것 같았던 아버지가, 로만의 평판을 듣고도 혼사를 진행한 데는 이유가 있었음을.

정말 한심했다.

로만이 소문과는 다른 남자라는 사실에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어려움을 직시하지 못하고 일을 저질러 버린 자신의 행동이 미웠다.

그간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실을 토해 내며 호통을 치는 아버지의 모습에, 어렵사리 정략결혼을 말하던 모습이 겹쳐서 보였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강요하지 않았다.

선택지를 주었고, 플로라는 선택하고도 책임지지 못했기에 아버지의 분노한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로만 드미트리가 평판과는 다른 남자라서가 아니라, 바르코 가문과의 분쟁에서 로렌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드미트리의 힘이 필요해. 그러니까 현실을 받아들이자. 나는 성인이고, 언제까지고 로렌스의 꽃으로만 남을 수는 없어.’

이를 악물었다.

그사이 접객실에 도착했다.

환대하는 주인은 없었다.

넓은 접객실에는 싸늘한 바람만이 불었고, 하인은 차를 내주겠다고 말하고는 접객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기다림이 필요할 것 같구나.”

이번 만남.

아침에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고는 하나, 자작의 작위와 정략결혼의 대상자라는 사실은 손님을 곧바로 맞이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했다.

그런데 주인도 없는 접객실로 안내했다는 것.

그리고 차를 먼저 내오겠다는 하인의 말은, 로렌스의 방문이 달갑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었다.

털썩, 소파에 앉았다.

애초에 각오했다.

로렌스 자작도 플로라도.

드미트리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알기에, 침묵이 맴도는 공간에서 차를 마시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림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예상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흘러가는 상황에, 로렌스 자작의 표정은 갈수록 딱딱하게 굳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확실한 건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도 전에 드미트리에 도착했건만, 지금은 접객실 창문 밖으로 해가 저물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명백한 무시였다. 플로라가 먼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접객실에 손님을 앉혀 놓고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옳지 않았다.

결국.

‘이건 아니야.’

한계에 도달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에, 로렌스 자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직접 드미트리 남작을 찾아가야겠다.”

* * *

로메로 남작의 집무실.

단단하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분노로 달아오른 얼굴의 로렌스 자작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더니 책망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미트리 남작! 손님을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은 대체 어느 가문의 예의입니까? 우리의 방문이 못마땅했다면 처음부터 돌려보내면 될 것을, 드미트리 가문이 이 정도로 치졸할 줄은 몰랐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

마음이 제대로 상해 버렸다.

드미트리가 일부러 보복한다는 생각에, 로렌스 자작으로서도 좋게 말할 수가 없었다.

툭.

로메로 남작이 펜을 내려놓았다.

방금까지 결재 서류를 살펴보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로렌스 자작을 보았다.

“왜 분노하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오늘의 만남이 사전에 약속되었습니까?”

“우리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일주일 전에 만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그 제안을 거절하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이리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만남을 거절하고 문전박대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가 어떻게 자작님을 문전박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약속되지 않은 만남이었기에 생긴 문제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일주일 전.

로만은 폐관 수련에 돌입했다.

의도적으로 만남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로메로 남작으로서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런데 말입니다.”

로메로 남작의 표정이 굳었다.

차분했던 목소리가 일그러지며, 애써 억눌렀던 분노가 불쑥 튀어나왔다.

“해가 저물도록 기다렸다는 사실에 그토록 화가 나신 겁니까? 로렌스 가문의 여식이 드미트리를 방문한 날. 로만이 절 찾아와서 파혼 의사를 밝혔습니다. 당시에는 로만에게 호통을 내지르며 책임을 물었지만,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플로라 로렌스의 방문이 파혼과 연관되었음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문제를 그냥 넘어갔습니다. 로만이 그렇게 처리하기를 원한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닫고 아무것도 모르는 얼간이처럼 그냥 넘어가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로만은 블러드 팽을 토벌했다.

그 사실에 마냥 기뻤을까?

아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혹시라도 아들이 다쳤을까 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전달받기 전만 하더라도, 로메로 남작은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원흉은 바로 로렌스였다.

플로라 로렌스.

그녀가 직접 파혼 사실을 밝혔더라면, 로만이 위험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파혼 통보를 받았습니다. 혼사를 먼저 원한 것도 로렌스건만, 우리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는 파혼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렌스 자작님은 기다림이 오래되었다는 그런 같잖은 이유로 저를 찾아와 책망하고 계십니다. 애초에 사전에 약속되지도 않은 만남인데도, 본인들의 실수는 새카맣게 잊고 적반하장으로 나온다 이 말입니다!”

쾅!

책상을 내리쳤다.

로메로 남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그 거대한 풍채가 로렌스 자작과 더불어 그 뒤에 도착한 플로라를 압도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사나운 얼굴.

그건 명백한 적의(敵意)였다.

분위기가 차갑게 변했다.

로메로 남작.

그가 선을 넘었다.

작위는 엄연한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인데도, 그는 분노를 표출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로렌스 자작님은 이번 혼사가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에 의한 결혼? 두 가문의 결합? 그런 허울 좋은 단어들은 이번 혼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남작의 작위.

로메로 남작은 귀족의 세계에 간신히 발을 걸친 사내다.

그러나 카이로 왕국 동북쪽에 터전을 잡은 귀족 중에, 로메로 남작을 대놓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이 그렇다.

신분을 넘어서는 힘.

철광의 대부호(大富豪)는 재력을 보유했다.

그렇기에 로렌스 자작으로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상대의 말이 옳았다.

로렌스 자작은 드미트리가 힘이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먼저 드미트리에게 혼인을 진행할 의사가 있음을 물어보았다.

만약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아니라 차남과의 혼사가 진행되었다면 정말 금상첨화였겠지만, 그게 아니라 할지라도 드미트리와의 결합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문제였다.

고로.

로메로 남작의 분노는 당연했다.

처음에는 잔잔했던 목소리가, 지금은 로렌스 자작을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변했다.

“자작님과 저는 정략결혼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양 가문의 자식들이 부부의 연을 맺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바르코 가문은 호시탐탐 로렌스 가문의 비옥한 토지를 노리고 있고, 중앙 정부의 승인으로 인해 두 가문은 언제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저는 바르코 가문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로렌스를 대신해서 바르코의 직계(直系)와 혼사를 진행한다면, 중앙 정부에 연줄을 대 주는 것은 물론이고 로렌스의 토지 일부를 내어주겠다고요. 그런데도 저는 바르코 가문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자작님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체 왜 거절한 겁니까? 바르코 가문의 제안이 드미트리에게 더 이득이었을 텐데.”

“이유는 단순합니다. 드미트리 가문에는 힘이 있고, 그렇기에 원하는 것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바르코.

위험한 적이다.

그들과 손을 잡는 것은 평화로운 미래를 의미하나, 힘을 가진 사람들의 선택은 타협만을 바라지 않는다.

“로만이 플로라를 원했습니다. 세상에서 그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면서 철없이 말하는 모습에, 단순히 드미트리의 장자가 로렌스의 여식을 흠모한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바르코 가문과의 전쟁을 결심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드미트리가 많은 피를 흘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드미트리의 장자가 원하는 걸 쟁취하길 바랐습니다.”

이번 거래.

일방적으로 드미트리의 손해였다.

세간에는 드미트리가 귀족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는 말이 많았고, 실제로 로메로 남작도 로만을 다그칠 때 비슷한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진실은 달랐다. 만약 로만이 바라는 혼인이 아니었다면, 드미트리는 결코 손해를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실을 알고도 맞잡은 손.

처음부터 로렌스 가문은 을(乙)의 위치에 있었지만, 온실 속의 화초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물을 엎질렀다.

파혼.

크나큰 실수였다.

플로라 로렌스가 로만에게 파혼을 언급한 그때부터, 로렌스 가문은 진창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우리가 큰 실수를 했구나.’

로렌스 자작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

끝까지 참았어야 했다.

드미트리가 만남을 거부하고, 접객실에서 해가 저물도록 기다리게 했을지라도 로렌스 자작은 끝까지 을의 태도를 유지해야만 했다.

애초에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혼사를 통해서 바라는 목적이 있는 쪽은 로렌스 가문이었고, 게다가 파혼까지 먼저 언급했기에 화를 낼 자격 따위는 없었다.

어리석었다.

알량한 자존심에, 로렌스 자작은 드미트리가 로렌스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플로라에게 언행을 조심하라 말해 놓고 내가 실수를 저지르다니. 드미트리의 분노는 당연해. 일방적으로 그들을 농락해 버렸으니, 드미트리가 어떻게 나오던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었어야만 했어.’

참담한 현실.

로메로 남작이 그 진실을 말해 주었다.

“로렌스의 꽃, 드미트리의 얼간이. 두 남녀의 평판이 어울리지 않음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는 드미트리가 어떤 곳인지를 명심했어야 합니다. 로렌스 가문의 여식이 만인이 바라는 꽃이라 할지라도, 로만의 성(姓)에 드미트리가 붙은 순간 그 가치는 달라집니다. 고로, 이 혼사에 목을 매고 간절해야 할 쪽은 우리가 아니라 로렌스라는 말입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대장장이 가문.

귀족들은 드미트리의 근본을 우습게 보지만, 그러한 사실을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고?

드미트리에게는 힘이 있으니까.

남작 위라 할지라도, 드미트리는 동북쪽 일대의 갑(甲)이었다.

심기가 뒤틀렸다.

로메로 남작은, 차가운 눈빛으로 로렌스 자작을 거쳐 말없이 서 있는 플로라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한순간의 선택.

그로 인해.

로렌스의 초라한 현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