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한순간의 선택 (2)
유년 시절.
플로라는 명문 아카데미를 다녔다.
로렌스의 이름값과 비옥한 토지로부터 비롯되는 재력은 그만한 힘이 있었고, 매일 아침 하인들의 수발을 받으며 귀족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그때의 기억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일련의 상황에, 불쑥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조엘(Joel) 가문의 사람이었지.’
조엘 가.
동북쪽 일대에서 존재하는지조차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름만 존재하는 허울뿐인 가문.
사실 가문의 위세로 보았을 때는 명문 아카데미의 입학이 불가능했어야 했는데, 운이 좋게도 조엘 가문의 사람이 플로라와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를 다녔다.
플로라는 ‘그’를 딱히 편견 여린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같은 학생으로서 곧잘 어울렸지만, 모두가 그녀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문의 울타리.
조엘은 돌연변이였고, 스스로가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를 대우해 줄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
조엘은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
명망이 높은 귀족의 자식들은 큰 사고를 치고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조엘은 별것 아닌 일을 가지고도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퇴학의 위기. 조엘을 바라보며 바락바락 소리치는 선생님들의 모습에, 조엘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색이 바랜 옷을 입고 나타나 고개를 조아렸다.
한 번만 봐달라고.
아들을 잘 간수하겠다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중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플로라는 냉혹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말았다.
‘안쓰러워.’
조엘 가문의 위상이 대단했다면.
그들에게 힘이 있었다면.
조엘의 가주가 고개를 조아렸을까?
아니.
애초에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아서 조엘의 아이를 대우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이 없기에 조엘의 가주는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분노를 표출하는 로메로 남작 앞에서, 플로라의 아버지는 조엘의 가주와 똑같았다.
“……로렌스의 가주로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드미트리 남작님이 한 말이 백번이고 맞습니다. 애초에 혼인의 의향을 물은 것도 우리 로렌스인데, 딸이 아직 철이 없어서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처음부터 그 점을 사죄드렸어야 했는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었던 것을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로렌스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드미트리의 분노.
로렌스는 그걸 감당할 힘이 없다.
바르코와의 분쟁을 해결해 줄 방법이 드미트리였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는 뜻이다.
로렌스 자작은 현실을 직시했다.
지금은 사죄할 때다.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부터 숙이는 그 모습에, 플로라는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구쳤다.
‘……다 나 때문이야.’
조엘.
불쌍한 아이다.
안쓰러웠고, 그래서 되도록 잘해 주고 싶었다.
한때 동정심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지금은 자신의 상황에 투영되었다.
멍청했다.
한심했다.
한때는 온실 밖에서도 세상이 자신에게 따뜻한 온기를 보여 주었지만, 로렌스 가문이 몰락하면서부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유년 시절의 기억.
먼발치에서 조엘 가문의 상황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아직은 본인의 선택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를 깨닫지 못했다.
‘나 하나로 인해 아버지가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어. 내가 잘못한 일이야. 차라리 책임을 로만 드미트리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내가 온전히 감당했다면, 드미트리의 분노를 감당할 일은 없었을 거야. 정말 한심하네. 로만 드미트리를 섣불리 판단한 것도 그렇고, 감당해야 할 현실을 외면한 것도 그렇고.’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문제의 시발점은 자신이다.
그렇다면 로렌스 자작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사죄해야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음을 알았다.
“드미트리 남…….”
탁!
“영주님.”
그때였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병사가 들어와 말했다.
“로만 도련님이 도착했습니다.”
순간.
세상이 엉망으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집무실로 들어서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에, 플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삼켰다.
‘……이 사람이 로만 드미트리라고?’
눈앞에.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사내가 있었다.
로만과의 첫 만남.
최악이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세간의 소문 때문에 더 나쁘게 본 것도 있지만, 관리되지 않은 외모와 지독한 향수는 플로라의 표정을 찌푸리게 했다.
물론 나중에야 향수가 자신을 배려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만 해도 편견에 찌들어 로만이라는 사람이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있었다.
로만의 걸음걸이에 따라 인위적이지 않은 향긋한 냄새가 풍겼고,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완전히 달랐다.
훤칠한 키.
트러블로 얼룩졌던 얼굴은 백옥처럼 하얗게 변했고, 피부 때문인지 검은 머리칼과 붉은 입술이 유독 도드라지게 보였다.
전에는 평범한 외모였다면 지금은 미남(美男)이라 불릴 만한 외모.
그러나 플로라를 진심으로 놀라게 만든 것은, 로만 드미트리가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마치 거인을 마주하는 기분이야.’
당당했다.
세상을 굽어보고, 조금도 움츠릴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분위기.
마치 날카로운 검(劍)과 같았다.
첫 만남에는 의외였고, 두 번째 만남에는 충격적이었다면, 세 번째 만남에는 넋을 잃어버렸다.
지금.
이런 생각이 한심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로만의 모습은, 한때 자신이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실루엣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였다.
탁.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로만은, 로메로 남작을 올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아버지를 뵙습니다.”
일주일.
폐관 수련의 결과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당황스러운 건 로메로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아들의 모습.
물어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지켜보는 시선이 있기에 애써 담담한 얼굴을 보였다.
“수련은 잘 끝냈느냐?”
“예.”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는 것으로 하고, 너를 이 자리에 부른 이유는 로렌스 가문에서 파혼을 무르고 정략결혼을 다시 진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비로서는 부부의 연을 가벼이 여긴 로렌스 가문과의 관계를 더 이상 이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나, 애초에 이 문제는 너의 결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네가 결정을 내린다면, 어떤 선택이든 이 아비는 네 선택을 따르겠다.”
만약 한 달 전이였다면.
로메로 남작은 결혼을 무르고, 대놓고 보복하겠다는 의도로 바르코 가문과의 혼인을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들을 믿었다.
블러드 팽을 시작으로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아들이라면, 본인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하리라 믿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주변의 분위기.
상황이 보였다.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직되어 있는 로렌스 부녀의 표정으로 보아 로메로 남작이 한바탕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로만이 알아본 드미트리 가문은 그만한 힘이 있다.
유세를 떠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드미트리는 결코 약한 가문이 아니다.
동북쪽 일대의 강자.
어떤 선택을 내리든, 드미트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
로만이 말했다.
“저는 드미트리와 로렌스의 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로렌스 가문이 일면식도 없는 저를 결혼의 상대로 생각한 것은,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을 원한 것이 아니라 드미트리의 재력이 필요했던 것이겠죠. 바르코 가문이 로렌스의 안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드미트리의 재력은 로렌스의 안전을 보장해 줄 테니까요.”
“……그 사실을 알고도 혼인을 바랐던 것이냐?”
“예. 그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만의 말.
로메로 남작이 의외라는 표정을 보였다.
그는 철없는 아들이 생각 없이 플로라와의 혼인을 바랐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정세를 설명한 적이 없건만, 바르코 가문과의 복잡한 관계를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바로 직전.
로메로 남작이 로렌스 자작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로만은 짧은 조사로 이미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본인이 해야 할 정답을 알았다.
“로렌스와의 결합은 드미트리의 희생이 따릅니다. 바르코 가문이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은 이상, 드미트리가 참전한다고 해서 물러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아내로 맞이할 플로라라는 여인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가문 간의 손익(損益)을 떠나서, 이 로만 드미트리가 평생을 헌신할 가치가 있는지를 말입니다. 한때는 로렌스의 꽃이라 불리는 플로라의 외모에서 그 가치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만난 날, 저에게 파혼을 언급하는 플로라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남녀는 서로를 모른다.
서로가 서로의 소문으로 이미지를 머릿속에 구상했으나, 그것은 실제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플로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배려를 위해서 뿌린 향수를 향락(享樂)의 증거라 생각했고, 얼굴에 일어난 트러블도 드미트리의 얼간이에 어울리는 외형이라고 생각했다.
플로라는 섣불렀다.
본인이 확인하지 않은 정보들을 믿었고, 설령 정말 그런 사람이라 했을지라도 현명하지 않은 태도로 관계를 망쳤다.
“파혼을 결정하기까지 플로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테고, 그런 사람과는 혼인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겁니다. 문제는 그 과정입니다. 가문의 중대사가 걸린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플로라는 현명하지 못했고,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한 사람을 소문으로만 판단해서 모든 것을 단정 지었습니다. 결혼은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일입니다. 단순히 이쁘다고, 가문이 대단하다는 이유만으로는 반려자와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혜입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닥칠 여러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결국 그 사람과 평생을 약속할 수 있는 믿음을 부여하는 것이죠.”
로만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하나하나를 말할 때마다.
플로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차마 로만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질 못했다.
아직 어리기에.
경험이 없기에 저지른 실수이나, 중대한 문제이니만큼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저는 드미트리 가문이 자랑스럽습니다. 대장장이로 시작해 가문의 뼈대를 세웠고, 남들은 감히 넘보지도 못할 신분의 벽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던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바랍니다. 세간에서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직접 보고 판단한 것을 믿고 따르는 그런 사람을 반려자로 맞이하길 바랍니다.”
답은 나왔다.
로만이 플로라를 보았다.
첫 만남에서 플로라가 일방적으로 통보했었던 것처럼, 로만은 타협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저는 약속했던 대로 파혼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물은 엎질러졌다.
그뿐이다.
바닥에 흩뿌려진 물은, 그 흔적을 남길 뿐 주워 담을 방법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