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615)

18화 한순간의 선택 (3)

파혼.

그 단어에 로렌스 자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정략결혼 대상자가 완고하게 주장해도 모자랄 판에, 로만은 진심으로 파혼하길 바라고 있었다.

‘끝났어.’

현기증이 일었다.

정략결혼은 로렌스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였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바르코를 막을 수 없다는 판단에, 금지옥엽의 딸을 이용해서라도 외부의 힘을 빌렸다.

가주로서는 가문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게 설령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인생을 망치는 일일지라도, 몰락하는 가문의 현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파혼의 낙인이 찍혔다.

플로라가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지만, 흠집이 난 여인을 위해 손해를 감수할 가문은 없다.

똑같은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

앞으로는 로렌스 가문의 힘만으로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게다가.

‘드미트리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 그들이 복수의 방법으로 바르코와 손이라도 잡는 날에는, 결사 항전의 방법조차도 통하지 않는다.’

드미트리.

로메로 남작의 분노가 대단했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열기를 토해 내던 로메로 남작이라면, 이번 혼사를 무르면서 바르코로 갈아타는 모습이 그리 이상하지가 않았다.

그것은 로렌스의 몰락을 의미했다.

동북쪽 일대의 강자인 바르코와 드미트리가 힘을 합친다면, 공세를 버텨 낼 방법이 없다.

참담했다.

마음 같아서는.

딸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항상 딸을 위한 선택을 하던 아버지이지만, 가문의 미래가 걸린 상황에서는 조엘 가문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귀족의 신분인데도 선생님에게 고개를 조아렸던 것처럼.

로렌스 자작은 파혼이라는 현실 앞에서,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 문제는 전적으로 로렌스의 잘못입니다. 고로 파혼의 책임은 로렌스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사죄의 의미로 당분간은 로렌스로 통하는 드미트리 상단의 통행료와 세금을 받지 않겠습니다. 물론 철광의 대부호에게 이런 푼돈은 의미가 없겠지만, 가문의 중대사를 안일하게 처리한 로렌스 가문의 진심 어린 사죄라고 생각하십시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습니다. 드미트리는 장자의 미래가 걸린 문제로 이득을 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세간에는 플로라 로렌스의 개인적인 문제로 파혼했다고 알리는 선에서 이번 문제를 마무리하시지요. 그렇게만 한다면, 드미트리가 바르코에 붙을 일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메로 남작의 반응.

그 진심에, 로렌스는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가슴이 쓰라렸다.

‘드미트리와의 혼인은 어쩌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지였을 수도 있겠어.’

아들을 사랑하는 아비.

그리고 소문과는 다른 드미트리의 장자.

볼수록 아까웠다.

사람들이 로만을 왜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한 로만은 범상치 않은 사내였다.

블러드 팽을 토벌한 무력. 자신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는 대담함.

특히 파혼을 맞닥트린 상황에서도 가문을 위한 선택을 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그에게 빠져 버렸다.

로만은 잠룡(潛龍)이었다.

앞으로 그가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다면, 플로라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파혼이란 그렇다.

플로라의 인생에서 로만은 이제 뗄 수 없는 꼬리표가 되었다.

‘대체 우리 딸이 로만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조금이라도 일찍 로만의 진가를 알았다면, 플로라가 섣부른 선택을 내리지 못하도록 막았을 텐데. 이건 나 또한 큰 실수를 했어.’

아쉬움을 삼켰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로렌스 자작은 거듭 사죄의 말을 건넸고, 로메로 남작의 표정이 누그러지자 그제야 자리를 떠났다.

드미트리 부자(父子)만이 남은 자리.

로메로 남작의 시선이 로만을 향했다.

대화하는 내내.

그는 머릿속을 간질이는 하나의 의문에, 도저히 이 자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들아. 대체 일주일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로만의 모습.

그건, 설명이 필요한 문제였다.

폐관 수련에서의 시간.

로만은 인(人)의 단계에 돌입했다.

인의 단계는 천마신공을 발휘하는 토대를 만드는 과정인데, 사실 무림의 기준으로는 그리 대단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달랐다. 자연에 떠도는 마나가 워낙 풍부한 데다, 로만의 육체는 노폐물이 심각한 수준이어서 토대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 효과가 극적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로만의 단전에는 천마신공이 꽈리를 틀었다.

환골탈태로 인해 외형의 모습이 변한 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로만이 말했다.

“홀로 수련하던 도중에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육체에서 마나 순환(循環)이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마나 순환이라고 했느냐?”

“예.”

“허어.”

로메로 남작이 놀랐다.

마나 순환.

마나를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희귀한 현상인데, 자연의 마나가 체내를 순환하면서 육체를 이상적으로 만드는 현상을 말했다.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행운. 로만으로서는 가장 최선의 대답을 말했지만, 로메로 남작은 로만의 발언에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마나 순환이라니.’

최근.

로만의 변화는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던 아들이 뜬금없이 파혼을 선언하더니, 블러드 팽을 시작으로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특히 크리스를 상대로 대련에서 승리한 일과 지금 언급한 마나 순환의 경우에는, 상식적인 영역에서도 선뜻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모르지 않았다.

아들이 어떻게 자랐으며, 어떤 것들을 할 줄 아는지.

단순히 천재라고 치부하기에는, 로만에게서 일어나는 변화가 상식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만.

‘그래도 내 아들임에는 분명하다.’

아들의 얼굴.

아들의 눈빛.

그리고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목소리.

의문은 묻어 두었다.

로만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메로 남작에게는 로만이 드미트리의 장자라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로메로 남작이 말했다.

“앞으로 살아가며 이 사실 하나만은 명심하거라. 나는 너의 아버지다. 너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 한들, 나는 로만 드미트리의 아버지로서 그 어려움을 외면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너의 발전에 같이 기뻐해 줄 사람 또한 이 아버지다. 그러니 네 이름이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나 로메로 드미트리가, 한발 뒤에서 항상 너를 지지하고 있겠다.”

아비의 말.

오묘했다.

그리고 낯설었다.

로만이 기억하는, 아니 백중혁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잔인하고 냉정하며 아들을 사지에 몰았다.

그런데 이런 아비라니.

‘나쁘지 않구나.’

부정(父情)이란 이런 걸까.

로만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

로만은 익숙한 상황을 맞이했다.

당황한 얼굴로 “당신 미쳤어요?”를 말하던 여인은, 그때와는 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요. 당신을 섣부르게 판단한 것도, 가문의 중대사를 제가 멋대로 결정한 것도요.”

플로라였다.

일련의 상황에, 그녀는 로만을 똑바로 바라보질 못했다.

“사과 따위 필요 없습니다.”

로만의 반응은 냉정했다.

복수?

그따위 감정이 아니었다.

로만은 진심으로 사과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결과론적인 얘기일 뿐, 플로라의 선택이 틀리지만은 않았다.’

만약.

로만의 몸에 백중혁이 빙의하지 않았다면.

로만은 소문대로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사내였을 테고, 조금만 궁지에 몰리면 자살을 택할 정도로 의지도 나약했을 것이다.

드미트리와의 결합이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한 여인으로서, 로만과도 같은 사내와 평생을 약속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그렇기에.

플로라를 이해했다.

게다가 모든 책임을 떠안기로 결정한 여인에게, 분노를 표출할 이유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플로라로서는 로만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했다.

“당신이 분노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해요. 화가 날 수밖에 없겠죠. 아무리 당사자 간의 의지가 중요하지 않은 정략결혼이라지만, 일방적으로 약속을 어겨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하나만은 말해 주고 싶었어요. 내가 파혼이라는 결정을 내린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요.”

“…….”

반응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빤히 쳐다보는 로만의 눈빛에, 플로라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그게 헛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블러드 팽을 직접 토벌하고, 항상 중심을 잃지 않는 사내에게 어울리는 소문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본인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소문의 근원은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이 주체하는 사교 모임에서였어요. 제가 드미트리와 정략결혼을 한다는 소문이 돌자, 평소에 알고 지내던 귀족들이 로만 드미트리가 마약을 즐겨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어요. 중독되었을 경우 이지(理智)를 상실시키는 종류의 마약이라, 그 얘기를 저로서는 흘려들을 수가 없었어요.”

약.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담담했다.

로만은 당황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한 리액션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로만이 말했다.

“어떠한 이유로 저에게 파혼을 통보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플로라. 당신은 나와의 혼인을 원하지 않았고, 그 결과가 파혼일 뿐입니다.”

처음도.

그리고 지금도.

로만은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간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이상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차갑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기는 로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플로라라는 사람은, 로만의 울타리에 들어올 자격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만은 생각에 빠졌다.

플로라와 로렌스.

귀찮은 관계들은 정리했지만, 플로라는 마지막에 자신으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를 던져 주었다.

‘……마약이라.’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약.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백중혁으로 살아가던 시절, 로만은 마약에 찌들어 사는 마인들의 말로를 보았다.

그들은 단순히 본인의 삶만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질병처럼 주변을 모두 오염시켜 버렸다.

로만이 그런 위험한 물건에 손을 댔다니.

그렇다면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던 로만의 자살을,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이유로 해석해야 했다.

‘로만은 단순히 군입대를 기피하기 위해 자살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처음부터 의아한 부분이 많았었지. 로렌스 가문과 정략결혼을 한다면 군입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았을 텐데, 너무 이른 시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어. 고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씰룩.

웃음이 나왔다.

로만은 최근에 환골탈태를 진행했다.

그렇기에 플로라가 어떤 말을 하든, 로만의 육체에는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할 만한 성질의 기운이 없음을 알았다. 딱 하나. 자살할 때 복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불순한 기운이 있었으나, 그것은 환골탈태하는 과정에서 말끔히 없애 버렸다.

그 말인즉.

플로라가 들었다는 소문은 음해(陰害)의 증거였다.

“재밌게 됐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로만이 한스를 울타리에 받아 주었던 것처럼.

천마가 사람을 다스리는 모습에, 그가 어쩌면 성군(聖君)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자신의 영역을 넘보는 적이라면.

로만은 그게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확실하게 짓밟고 단죄를 내렸다.

공명정대함과는 거리가 멀다.

약육강식의 세계.

위에서 아래를 찍어 누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뼈에 새긴 공포는 무림 정벌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아무래도 사실 확인이 필요하겠어.”

딸랑딸랑.

곧바로 종을 울렸다.

그러자.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울타리에 들어온 사람.

한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