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맹목적인 신뢰 (2)
드미트리 성 밖.
케빈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허름한 판잣집에서 생활했고,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일손을 보탰다.
간단한 심부름부터 시작해서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빈민(貧民)의 삶이란 그러했고, 남아로 태어나 큰 꿈을 펼치겠다는 목표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남들처럼만 살고 싶었다.
동화에서나 나오는 영웅의 삶이 아니라,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 수준의 삶을 바랐다.
그렇기에.
덜덜덜.
“후욱, 후욱.”
손이 떨렸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자신의 팔을 바라보는 시야가 현기증에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팔.
자르는 게 맞을까?
로만은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한스를 따라다니는 선택지는 자신의 꿈에 부합하는 삶이나, 케빈의 머릿속에는 로만을 처음 만났던 날을 도무지 떨쳐 낼 수 없었다.
로만은 강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내였고, 자신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블러드 팽이라는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토벌해 버렸다.
대단했다.
힘이 있다는 것.
항상 빼앗기는 게 익숙했던 삶을 살았기에, 케빈을 이 순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로만 도련님은 내게 새로운 삶을 약속해 주셨어. 그러니까, 도련님에게 필요한 사람이 돼야만 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콰득!
“크악!”
팔을 찍어 버렸다.
날카로운 검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에, 나름 고통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정신이 단번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문제는 아직 팔을 다 잘라 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로만이 던져 준 검은 날이 무뎠고, 완력이 약한 어린 소년으로서는 단단한 뼈를 잘라 내기 위해 수십 번의 톱질이 필요했다.
까드득, 까드득.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뼈를 잘라 내는,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소리였다.
케빈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이 붉게 달아올랐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 인식조차 못 했다.
다만.
행할 뿐이었다.
로만은 말했다.
강해질 수 있다고.
처음으로 ‘꿈’이라는 게 생겨나는 상황에, 케빈은 고통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툭.
팔을 잘라 냈다.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 버렸고, 케빈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피 웅덩이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모든 게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바닥에 흥건했던 피.
그 위를 굴러다니던 팔.
그리고 머릿속을 난도질하는 고통마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신이 세 번째 선택지를 통과했다는 것이었다.
“너는 지금부터 날 대신할 하나의 검으로 살아갈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
케빈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정신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로만을 향해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주군의 명을 따릅니다.”
로만.
그를 따르는 것만이,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인생의 방향이었다.
케빈과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온 로만의 모습에, 한스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 나왔다.
“아니, 도련님! 어디 다치신 겁니까? 검에, 검에 피가 묻었습니다!”
“별일 아니다.”
“하지만…….”
“한스.”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만의 몸 곳곳을 살펴보던 한스는, 단호한 음성에 슬그머니 손길을 치웠다.
로만은 강인한 사내다.
블러드 팽을 토벌하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로만이기에, 자신이 괜한 호들갑을 떨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상처가 딱히 보이지도 않았다. 그 말인즉, 로만의 검에 묻은 피는 타인의 것이었다.
피식.
‘지독한 녀석.’
로만이 웃었다.
케빈과의 일.
로만은 케빈의 팔을 진짜로 자를 생각이 없었다.
일시적인 환영(幻影)으로 의지를 시험해 볼 요량이었는데, 케빈은 환영에 빠져들기도 전에 자신의 팔을 내리찍어 버렸다.
그 결과가 검에 묻은 피였다.
다행히도 간발의 차이로 검이 살을 완전히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환마의 술이 조금만 약했어도 팔이 완전히 잘려 나갈 뻔했다.
독종이었다.
흔히 말하는 천재의 부류는 아니나, 그 의지만큼은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하는 케빈의 모습에, 로만은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앞으로 너에게 알려 줄 마나 심법은 매우 위험한 힘이다. 성취가 낮을 때는 고통이 심하지 않으나,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방금 네가 경험했던 고통을 감당해야만 하지. 그런데도 너에게 이 방법을 알려 주는 이유는 단 하나다. 마나의 기본조차도 모르는 10대 중반의 소년이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이며, 이 심법을 극성으로 익혔을 경우 너는 주변을 지킬 힘이 생길 것이다.”
귀혼마공.
이 세상의 설명으로는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기에, 마나 심법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웠다.
그 말에.
케빈은 감격했다.
이 세상에서 마나 심법은 하찮은 평민이 접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리스크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로만이 직접 심법을 알려 준다는 말에 케빈으로서는 현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로만은 좋은 사람이었다.
구타를 당하고 있는 자신을 구해 주었고, 블러드 팽을 토벌했으며, 일개 평민에 불과한 자신에게 이전까지는 상상치도 못한 미래를 제시했다.
대체 왜.
어째서 자신을 믿는 걸까.
심법을 배우고 도망칠지도 모르는데, 로만이 자신을 맹목적으로 믿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저를 왜 신뢰하십니까?”
로만이 웃었다.
케빈의 말.
광마와도 같았다.
한때 광마도 평범한 소년이었고, 그에게 고대의 무공을 접할 기회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 또한 로만을 통해 귀혼마공을 터득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로만의 배려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흘러 무림을 정벌한 이후에 광마는 맹목적인 신뢰의 이유를 물었다.
그 대답은 단순했다.
‘맹목적인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상대를 믿어야 한다. 설령 배신당한다고 할지라도.’
믿음이라는 것.
그것은 맹목적이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믿어 주기에 믿는 것이다.
하지만 로만은 케빈에게 그것을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맹목적인 신뢰는 미사여구가 붙는 순간 그 가치를 상실해 버린다.
그리고 로만은 살면서 배신을 걱정해 보지 않았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들의 머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천마 백중혁이라는 사람을 배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를 알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그냥, 이라는 말로 대화를 끝냈다.
그리고 지금 로만은 칼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를 묻은 검에서 광마를 보았고, 지금부터는 광마를 닮은 케빈이라는 아이와 연을 맺을 것이다.
“앞으로 바빠지겠어.”
파티까지 2주.
전쟁까지는 약 6개월.
지금부터, 케빈에게 가르칠 것이 아주 많았다.
* * *
시간은 상대적이다.
케빈은 치열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반면, 크리스는 이래도 되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따분한 나날을 보냈다.
“지루해.”
하품만 수십 번째다.
크리스는, 먼발치에서 로만과 케빈의 모습을 보았다.
“모든 일은 기초가 중요하다.”
“하나를 하더라도 올바르게 행하라.”
“집중력을 잃지 마라.”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뭘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걸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체 왜 어디서 이상한 애를 주워 와서는 검술을 가르치는 거야?’
대단한 천재라면 이해라도 했다.
그런데 케빈은 대단한 천재도, 그렇다고 청탁을 받아서 가르칠 만큼 신분이 어마어마하지도 않았다.
일개 평민.
게다가 검술에 무지하기까지.
한숨이 나왔다.
로만을 따라나설 때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그림은 상상치도 못했다.
‘로만 도련님을 따라다니면 단시간에 강해지는 비결을 배우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뭐야? 케빈처럼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고,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잖아. 이럴 거면 스승님 곁에서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게 이득일 거야.’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늘하늘 불어오는 바람이 이빨을 관통할 때는, 로만에게 달려가 고래고래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래도 참았다.
따르기로 했기에.
참고 기다리면, 자신을 바라봐 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라이, 씨발.”
탁!
땅바닥에 장갑을 내던졌다.
벌써 일주일째.
자신을 버리고 케빈만을 가르치는 모습에, 화를 억누르지 못한 크리스가 로만에게 다가가 말했다.
“로만 도련님.”
“……?”
“제가 로만 도련님을 따르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이주가 넘었습니다. 그중 일주일은 폐관 수련을 하느라 날렸고, 나머지 일주일은 케빈에게 밀려 수련을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혹여 처음에 버르장머리 없게 군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거라면 진심으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케빈처럼 뭐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어떤 가르침이든 정말 열심히 배울 자신 있습니다.”
의지가 대단했다.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는 모습에, 로만은 케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크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내 주변에서 보고 배우라고.”
“……설마 정말로 ‘보고’ 배우라는 것이었습니까? 특별한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는 게 아니라?”
크리스가 경악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주변에서 배우라는 게 가르침을 의미하는 줄 알았던 그는, 이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도련님! 제가 대련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고는 해도, 스물 중반의 나이에 2성의 경지에 오른 사람입니다. 세간에서 천재라고 부르는 제 재능을 이렇게 썩히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반발이 격했다.
크리스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 로만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예상대로였다.
크리스가 언제까지고 방치를 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만이 말했다.
“사람에게는 각자만의 방법이 있다. 케빈은 무지하기에, 일정 수준에 오를 때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른 틀을 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너는 달라. 내가 어떠한 가르침을 준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널 이긴 사람이기에 그것을 억지로 삼키려 들겠지. 그리고 네 재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아 버릴 테고.”
“……그러니까 계속 지켜보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로만은 기다렸다.
크리스가 반발하길.
지금은, 자신을 따르기로 한 이들에게 현실을 보여 줄 때다.
“현실을 수긍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결과가 필요하지. 어때? 케빈과 대리 대련을 해 보는 것이. 대리 대련을 하고도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부터는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도록 하지.”
로만의 제안.
그것은, 상식 밖의 것이었다.
대리 대련.
생소한 단어였다.
크리스의 의문은, 로만의 설명으로 금방 해소되었다.
“대리(代理) 대련의 의미는 간단해. 케빈이 대련 상대로 나서되, 나는 대련이 진행되는 동안 케빈에게 너를 쓰러트릴 방법에 대해서 말해 줄 거야. 그러니까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인 케빈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네 의지를 증명해 봐.”
로만의 말.
황당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이 새끼가 날 진짜 병신으로 아나?’
로만에게 패배한 건 인정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바라볼 때면, 휑하니 비어 있는 이빨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수도 없이 되새겼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상대는 기초도 모르는 초짜.
대리 대련이든 뭐든 간에, 자신의 패배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 내 이빨을 부러트린 것으로도 모자라 날 완전히 길들이겠다 이거지? 네가 바라는 건 맹목적인 충성심이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드미트리 영주님의 장자인 네 얼굴을 들이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따위 대우를 받고도 참아 넘길 수는 없어.’
눈썹이 홱 올라갔다.
잘해 보고 싶었다.
스승님에게 비장하게 말하고 기사단을 나왔으니, 뭐라도 이루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리고.
2주를 아무 소득도 없이 보냈다.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불만이, 로만의 적반하장에 폭발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어디 한번 붙어 봅시다. 제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란 걸, 이번에 확실히 보여 드리죠.”
크리스는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지난 대련과는 다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