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맹목적인 신뢰 (3)
눈앞에 닥친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케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대리 대련이 성사되는 분위기에, 케빈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저보고 크리스 기사님과 대리 대련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저는 기껏해야 검술을 수련한 지 일주일이 지난 애송이에 불과하지만, 크리스 기사님은 2성의 오라를 사용하는 실력자이지 않습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크리스.
그가 누구인가?
드미트리 기사단의 단장 조나단의 제자이자, 드미트리에서 인정하는 천재 검사이지 않은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케빈은 평소에 싸움에 소질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겨우 10대 소년에 불과하다.
아무리 싸움이라는 게 해 봐야 안다지만, 사람 사는 인생에는 결과가 뻔한 싸움도 있다.
로만이 말했다.
“나도 알아. 네가 불리하다는 걸. 하지만 대련에서 패배한다고 네가 잃을 것이 있나?”
“……없습니다.”
“지금부터 네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세상에는 너보다 강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너의 가족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했던 블러드 팽이 그러했고, 지금 눈앞에서 널 당장 잡아먹겠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는 크리스도 다르지 않다. 너는 그때마다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뒷걸음질을 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10대 중반의 소년.
케빈은 어리다.
아직은 정신적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지만, 검으로서의 쓰임새를 택했다면 앞으로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야 했다.
“대련은 실전이 아니다. 이 대련으로 인해 네가 잃을 것은 겨우 패배했다는 좌절감과 육체적인 고통뿐이다. 그렇다면 참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적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부딪칠 기회. 그 과정에서 육체적인 고통이 동반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팔을 잘라 내면서까지 강함을 추구하는 너의 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경계선이 있다.
평민의 삶.
귀족의 삶.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검사로서의 삶.
로만은 아직 10대 소년에 머물러있는 케빈을 바라보며, 그 경계선을 완전히 허물라고 말했다.
스스로 팔을 잘랐던 것처럼.
크리스라는 적을 직시하라고.
만약 이것이 실전이라 할지라도, 크리스를 상대로 악에 받쳐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라고.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이냐?”
꿀꺽.
케빈이 마른침을 삼켰다.
로만과의 인연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하나의 길을 강제하는 법이 없었고, 자신을 따라오기 위해서는 스스로 걷는 방법을 말해 주었다.
목이 탔다.
크리스.
기사들의 행렬을 보면서 우러러만 보던 상대와 싸워야 한다니.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으나, 팔을 자르는 순간부터 케빈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독기(毒氣)를 품었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는 케빈의 모습에, 로만은 옅은 웃음을 보였다.
케빈과 크리스.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체격에서부터 불리한 싸움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상황에, 크리스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초심자와 승패를 겨루어야 한다니.’
참담한 기분이었다.
상대를 보라.
케빈은 자세부터가 엉망이었다.
그래도 로만이 대리 대련을 제안한 이유라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바라보며 검을 쥐고 있는 모양새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검사로서의 경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허점투성이였고, 밸런스가 무너져 있는 하체는 수비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지난 일주일.
가르침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크리스의 생각처럼 케빈은 천재가 아니었고, 아직은 검사라고 말할 자격조차도 없었다.
그렇기에.
‘한심하네.’
자괴감이 일었다.
25살의 크리스.
어릴 때부터 조나단을 통해 검술을 익혔고, 일반 평민으로서 살아왔던 시간보다 검사로서 피땀을 흘렸던 시간이 인생의 대부분을 장식했다.
검은 그의 자존심이다. 타고난 재능에다 그 누구보다도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20대 중반의 나이에 2성의 경지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만약 30살 이전에 3성의 반열에 들어선다면.
변방의 재능이라고 평가받던 자신이, 한순간에 카이로 왕국의 신성으로 떠오를 수 있다.
그게 바로 크리스라는 사람이다.
드미트리에서 썩고 있다고 해서, 어디서 무시 받을 재능이 아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틀렸어. 변수에도 한계라는 것이 존재해. 만약 케빈을 상대로 내가 패배한다면, 나는 이번 대결을 끝으로 검사로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겠어.’
필사의 각오였다.
마음 같아서는 대련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서까지 검을 쥐고 서 있는 이유는, 자신을 바라보는 케빈의 눈빛 때문이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슬리네.”
독기에 차오른 눈빛.
케빈은 진지했다.
마치 크리스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것처럼, 진심으로 이 대련에 임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상대는 주제를 몰랐다.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미천한 존재인지를 모르기에, 검을 얼마 휘둘러 보지 않고도 십수 년의 세월을 검에 헌신한 자신을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로만은 인정했다. 직접 검을 맞부딪쳐 보았던 로만은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내였지만, 케빈은 눈빛만으로도 벌을 받아 마땅했다.
‘1분 안에 끝내주지.’
꽉.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시작.”
로만의 신호.
마침내 대련의 시작을 알리자, 크리스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이번 대련.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크리스는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들더니,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케빈의 허점을 공략했다.
빡!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케빈은 간발의 차이로 크리스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그뿐.
힘의 차이에 케빈의 양팔이 뒤로 튕겨졌다.
케빈은 당황한 얼굴로 드러난 가슴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크리스의 발차기가 어느새 복부에 작렬했다.
퍽!
“크악!”
비명을 질렀다.
현기증이 핑 돌아 버릴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고, 발차기 한 번에 케빈은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사실상 단 한 번의 공격에 승부는 끝났다.
크리스는 추가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힐끗 로만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확인했다.
‘확실히 승부를 보라는 건가.’
로만은 침착했다.
무언(無言)으로 승부의 룰을 설명해 주었고, 크리스는 시선을 거두고는 곧바로 케빈을 공격했다.
‘단번에 끝내자.’
상대의 팔을 노리는 검.
방금까지 고통에 신음하던 케빈은, 크리스의 공격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몸을 날렸다.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케빈의 귓가를 울렸다.
맞았다면 팔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에, 케빈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실력의 차이.
명백했다.
크리스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산이었으나, 케빈은 공격을 피한 직후에 나름 반격이랍시고 검을 휘둘렀다.
휙.
검의 소리가 달랐다.
느리고, 가벼웠다.
크리스로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을 흘려보내더니, 다시 한번 상대의 복부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퍼억!
“크억!”
신음을 삼켰다.
팔을 잘라 내는 고통도 참아 냈던 케빈이, 당장 터져버릴 것만 같은 얼굴로 몸을 비틀거렸다.
강력한 충격에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겨우겨우 걸음을 내디디며 후속 공격은 피했지만, 사실상 대련이 무의미할 정도로 케빈은 무력하고 약했다.
일방적인 대결.
이상했다.
로만은 마치 자신이 있는 것처럼 대련을 제안했으나, 케빈은 승자의 자격을 보여 주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지.’
열 걸음 옆.
로만은 상황을 지켜보았다.
대리 대련의 의미가 케빈을 아바타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딱히 육성(肉聲)으로 무엇을 지도하는 모습조차도 보여 주지 않았다.
결국은 예상했던 스토리대로였다.
만약 로만이 비장의 방법을 말해 주었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너무도 허무한 승부에 오히려 화가 났다.
파박!
연속 공격.
케빈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의지만으로는 크리스의 공격을 버틸 수 없었고, 자세가 흐트러지는 사이에 크리스의 타격이 케빈의 전신에 작렬했다.
그것은 크리스의 배려였다.
아무리 목검으로 진행하는 대련이라지만, 크리스는 상대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완벽한 기회에는 일부러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정도만으로도.
수준의 차이가 보였다.
케빈이 발악을 할지라도, 십수 년간 수련을 해 왔던 크리스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결국.
퍽!
“……끄르륵.”
복부에 작렬한 주먹에 피거품을 물었다.
케빈은 무릎을 꿇을 것처럼 비틀거렸고, 그런 케빈을 향해 크리스는 분노한 음성을 토해 냈다.
“이만 포기해.”
승부는 끝났다.
이미 끝낼 기회가 수차례 있었는데도, 크리스가 배려했을 뿐이다.
하지만.
케빈은 악으로 버텼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잡아 가며, 다음 공격을 막아 보겠다는 듯이 검으로 상대를 겨누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케빈의 모습.
처참했다.
땅바닥을 수차례 구르면서 옷은 넝마가 되었고, 찢겨 나간 상의로는 빨갛게 물든 복부가 보였다.
그리고 입으로는 핏물을 뱉어 냈다.
내부 장기에 큰 충격을 입은 모양인지, 진득하게 딸려 나오는 핏물은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한계였다.
이러다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
승패가 명백한데도 검을 겨누는 케빈의 모습이, 크리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격을 몇 번 받아 냈다고 네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지 마. 처음부터, 그리고 대련을 진행하는 내내. 나는 단 한 번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애초에 처음 공방을 주고받았을 때부터 네 두부 같은 머리를 박살 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이게 대련이기에 나는 손속에 사정을 두었어.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무슨 생각으로 이 대련에 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나도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이 이 정도 버틴 거면 너는 충분히 잘했다고생각해.”
진실을 말했다.
크리스와 로만의 대결.
그때와는 달랐다.
크리스는 진심을 다해도 로만을 쓰러트리지 못했지만, 케빈은 굳이 전력을 다할 필요조차 없었다.
일말의 힘.
그것만으로도 케빈은 처참하게 변해 버렸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크리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의 한계였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만약 더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신체 하나가 불구가 될 각오를 해.”
마지막 경고이자.
마지막 배려였다.
케빈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그에게 분풀이할 이유가 없었다.
이만 현실을 인정하라는 말에, 황당하게도 케빈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큭, 끅끅.”
웃었다.
마치 웃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케빈은 속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굳이 감추질 않았다.
그러더니.
히죽.
“끝까지 하시죠.”
검을 제대로 움켜쥐었다.
크리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일방적으로만 보이는 이 대련이, 케빈의 세상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케빈은 로만의 지시를 따랐고, 그렇기에 로만의 명령 없이는 이 승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