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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615)

22화 맹목적인 신뢰 (4)

처음 대련이 시작되었을 때.

케빈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을 들어 앞을 막아라. 크리스가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도할 것이다.

로만의 목소리였다.

마나를 통해 음성을 전달하는 전음(傳音)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케빈으로서는, 순간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찰나의 망설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로만이라는 사실에 일단 본능적으로 그 말에 따라 움직였다.

그 순간.

빡!

“……!”

손에 얼얼한 충격이 일었다.

로만이 시키는 대로 앞을 막았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게 크리스의 선제공격을 막았다.

-일 보 옆으로. 그리고 발차기를 시도하는 크리스의 가슴팍을 노려라.

다음 명령.

케빈은 로만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의 반응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고, 로만이 예고했던 크리스의 발차기는 어느새 자신의 복부를 강타하고 있었다.

퍽!

“크악!”

비명을 질렀다.

순간 숨이 턱 막히며, 바닥을 나뒹군 케빈이 복부를 부여잡았다.

입에서는 진득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불과 일주일 전에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랐던 케빈이지만, 고통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머릿속을 파고드는 목소리.

케빈은 살기 위해서 그 말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통을 억지로 삼켜 내며 몸을 날렸고, 예상대로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크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상대의 왼쪽 가슴을 공략해.

틈이었다.

크리스는 검을 크게 휘두르면서 허점을 노출하였고, 케빈이 보기에도 그곳을 공략하면 일격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케빈의 역량 부족으로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고, 스텝도 엉켜서 공격 거리가 짧았다.

완벽한 실패.

크리스는 상대가 자신의 허점을 노렸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그만큼 가볍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고, 크리스의 반격에 케빈은 다시 한번 복부를 얻어맞고 말았다.

퍼억!

“크억!”

일방적인 대결이었다.

케빈은 이렇다 할 반격도 못 한 채 엉망으로 당해 버렸고, 역한 핏물이 올라올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당장 주저앉고만 싶었다.

그런데도 대련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로만이 그만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나,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너무나도 웃겼다.

‘로만 도련님은 전능해. 크리스가 마치 꼭두각시처럼, 로만 도련님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잖아.’

로만의 음성.

그것은 예언이었다.

크리스가 오른쪽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하면 현실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고, 로만이 말하는 허점은 실제로 크리스를 무너트릴 틈으로 보였다.

다만, 그것을 이행하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 뿐이었다.

로만의 조언대로라면 진즉에 크리스를 쓰러트렸어야 할 싸움인데, 하찮은 몸뚱이는 말을 들어주질 않았다.

웃긴 일이다.

2성의 오라 기사.

자신과 같은 일반인들은 우러러보는 대상을, 로만은 마치 장난감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농락했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을 왜 대련에 내보냈는지를.

로만은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게 바로 로만 도련님의 수준이야. 드미트리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크리스조차도, 도련님의 진짜 능력에는 발끝에도 따라가질 못해. 그런 사람이 앞으로 내가 평생을 충성할 주군이고, 설령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도련님 말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라야 해.’

앞으로의 길.

앞으로의 목표.

눈앞에 로만의 모습이 떠올랐다.

로만의 말만 믿고 자신의 팔을 잘랐던 것처럼, 그를 따라간다면 강해진다는 맹목적인 확신이 생겼다.

한 번의 대련.

로만은 믿음의 근거를 주었다.

자신을 따라야만 하는.

동시에 경외심(敬畏心)을 품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를.

케빈은 육체적인 고통을 떠나서 대련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렇기에 크리스의 경고가 먹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하지. 만약 더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신체 하나가 불구가 될 각오를 해.”

마지막 경고.

케빈이 히죽 웃었다.

‘대련을 포기하라고?’

그럴 수는 없다.

상대는 진실을 모른다.

자신이 꼭두각시임을.

크리스와 같은 대단한 기사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도련님인데, 그렇다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10대 중반의 소년은 무엇으로 로만의 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신뢰.

충성심.

몸뚱이가 나약하다면, 정신력이라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끝까지 하시죠.”

그 말.

케빈의 결심이었다.

이 대련이 피로 점철되는 한이 있을지라도, 케빈은 자신의 유일한 가치만큼은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서로의 시각.

서로가 바라보는 세상.

크리스는 케빈의 결심을 몰랐고, 그렇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케빈의 모습에 폭발하고 말았다.

툭.

인내심이 끊어졌다.

상대를 안쓰럽게 여기던 마음이 분노에 뒤덮였다.

“주제도 모르는……!”

타닥.

땅을 박찼다.

크리스는 케빈이 이번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십수 년간 검에 헌신한 세월을 무시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사(鬪士)의 정신을 보여 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확실하게 끝낼 필요가 있다. 본인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신체 하나가 불구가 되는 처참한 결과로서 케빈은 평생 자신의 실수를 뉘우칠 것이다.

크리스는 빨랐다.

한 줄기의 빛.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들었고, 케빈이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검을 휘둘러 상대의 어깨를 노렸다.

팔 하나.

실수의 대가다.

목검이 팔을 가르려는 순간, 케빈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한 발 앞으로.

탁.

“……!”

크리스가 눈을 부릅떴다.

한 발 앞.

그곳은 사지(死地)다.

목검이 떨어지는 자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었고, 로만이 크리스를 쓰러트렸을 때와 비슷한 양상의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케빈은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한 발을 내디딤으로써 상대보다도 먼저 공격을 시도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했다.

그리고는.

-전력을 다해 공격해.

마지막 명령을 따랐다.

케빈은 이를 악물고는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고, 조잡한 일격은 바람을 갈라 상대를 노렸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서로의 몸이 뒤엉켰다.

그 결과.

빠악!

무엇인가 부서지는 타격음이 들렸다.

흩날리는 핏방울과 함께, 실이 끊긴 인형처럼 한 사내의 육체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찰나의 승부.

그 승자는 바로.

“지독한 새끼.”

크리스였다.

질린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야에, 케빈의 주변으로 피가 흐르는 모습이 보였다.

대련은 끝났다.

다행히도 케빈은 생명에 문제가 없었다.

간발의 차이로 크리스가 휘두른 목검이 이마를 스치면서 피부가 찢겨 나갔을 뿐, 후속 공격은 목검으로 막아서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목검은 강력한 일격에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복부를 파고드는 발차기 공격에, 고통이 누적되어 버린 케빈은 흰자를 드러내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독종이었다.

조잡한 수준으로도 끝까지 승부를 보려는 의지에, 케빈을 바라보는 시야에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크리스의 승리.

로만은 케빈을 챙기며 말했다.

“약속대로 네가 원한다면 당장 내일부터 가르침을 주도록 하지. 지금부터 선택은 네 몫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로만은 크리스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케빈의 상처를 치료하느라 바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었다.

케빈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로만인데, 로만은 케빈을 소중한 사람처럼 대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난 대체 왜 싸운 걸까.”

숙소로 돌아온 크리스.

그는 상념에 빠졌다.

처음에는 케빈을 쓰러트림으로써 로만의 관심을 받아 보려는 의도였으나,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이번 대련은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손해인 싸움이었다.

승리해도 본전도 찾지 못할 싸움에서, 크리스는 한순간이나마 케빈의 독기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특히 마지막 공방.

그때의 순간에, 크리스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로만 도련님과 같았어. 사지로 발을 들이는 판단은, 완벽한 공격임과 동시에 방어의 수였어.’

만약.

로만에게 똑같이 당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크리스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지만, 케빈의 공격을 마나 없이 완벽하게 피했으리란 확신이 없었다.

과거의 기억은 경험이 되었다.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되새겨 보았던 상황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고, 크리스는 케빈의 공격을 역으로 피해서 반격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묘한 전율이 일었다.

상대는 겨우 일반인에 불과한데도, 크리스는 자신이 과거보다 발전했다는 사실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만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발전하고 있었다.

로만과 싸웠던 단 한 번의 경험.

그것은 어느새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고, 똑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대응할 수 있는 검사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와서 되새겨 보면 케빈의 판단은 하나하나가 매우 적절했어. 나는 로만 도련님이 케빈에게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던 거지. 케빈이 일반 평민이 아니라 조금만 더 빠르고 강했더라면, 그 판단 하나가 날 패배자로 만들었을지도 몰라.’

대련의 기억을 되새겼다.

기습적인 선제공격에 실패하고 반격을 당하는 상상에, 크리스는 그걸 대처할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그때의 순간들.

그것을 분석했다.

낱낱이 살펴보면서, 로만이 자신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로만 도련님이 세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도련님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이번에 케빈과 대리 대련을 하면서 확신이 생겼어. 로만 도련님은 단순한 천재가 아니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는 내 스승이신 조나단 기사단장님조차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서 있어.’

로만의 경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단순히 육체적인 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만의 정신이 닿아 있는 무의 세계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무엇을 보는 걸까.

로만과 한번 검을 섞어 보았던 것만으로도, 그리고 대리 대련을 통해서 로만의 판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은 수많은 가르침으로 뒤섞였다.

그건 우물 안에 있을 때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계.

자신의 경험을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크리스는 순수한 감탄만 나왔다.

로만.

그가 했던 말의 의미가 보였다.

단순히 자신의 곁을 지키라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며 스스로 강해질 방법을 찾아내라는 의미였다.

“내가 이렇게 멍청한 놈이었나?”

피식.

실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로만은 많은 힌트를 주었다.

케빈을 가르치는 과정에서도 크리스에게 들으라는 듯이 한 말이 많았지만, 기초를 가르치는 상황에 크리스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편견에 의한 거부감이었다.

자신은 일정 수준에 오른 검사이기에, 배우려고 고개를 숙였는데도 불구하고 가르침을 받을 자세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알았다.

로만을 지켜보며 스스로 깨우치고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다른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나 크리스는 아직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내가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릴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이지만, 최근 당신이 보여 준 모습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건 내가 당신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지금부터는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넘어설 때까지 나는 모든 것을 훔쳐보고 배울 것입니다.”

스스로의 다짐이었다.

혼잣말로 말하며, 크리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다음 날.

크리스는 로만을 찾아가 말했다.

“가르침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로만 도련님을 따라 강해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날.

크리스는 생각했다.

로만을 넘어설 때까지는, 로만의 검으로 살겠노라고.

그런데 그는 알까?

혈기로 내뱉은 이 발언이, 자신이 평생을 따를 주군을 결정하는 평생 서약이었음을.

훗날.

대륙에 명성을 떨칠 카이로의 섬광(閃光)이, 이른 나이에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 뒤.

바르코의 사교 파티 당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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