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사교 파티에서 생긴 일 (2)
이 자리.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은 로만을 만나 본 경험이 있다.
한때 바르코와 어울리면서 파티 자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항상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사를 부리는 모습에 한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로만의 흉을 보았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떠한 이유로 파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 행실을 보았을 때 로만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로만의 등장에 다들 숨을 죽였다.
드미트리라는 배경에 움츠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던 로만과는 다른 사람이 눈에 보였다.
‘저게 로만 드미트리라고?’
‘전과는 너무 다른데?’
그들의 기억.
로만은 볼품이 없는 사내였다.
그다지 크지 않은 키는 작은 체격으로 인해 더 작아 보였고, 더러운 피부는 로만의 이미지를 완전히 깎아 버렸다.
게다가 걸음걸이까지 경박했었다.
드미트리의 차남은 로만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기에, 한때는 로만의 출신이 천해서 그 천박함을 숨기지 못한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로만의 걸음걸이는 차분했고, 훤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떡 벌어진 어깨와 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근육들이 눈에 보였다.
특히 피부가 정말 깨끗했다.
옛날에는 얼굴에 트러블이 많아서 시선이 많이 분산되었는데, 우유처럼 하얀 피부에 검은 눈동자와 빨간 입술은 포인트를 준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화려한 옷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었다.
검은색 바탕에 황금색 수실로 포인트를 준 옷은, 로만의 카리스마를 한껏 부각시키는 느낌이었다.
웅성웅성.
“로만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절대 아니야. 그때는 키가 나보다 작았었는데, 지금은 언뜻 봐도 키부터 차이가 나잖아.”
귀족들이 숙덕거렸다.
예전에도 로만은 자신을 열심히 꾸미며 사람들의 환심을 사 보려고 했지만,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는 못했다.
단순히 외관의 차이가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쌓여 온 분위기의 차이였고, 어떤 것 하나 이루지 못했던 로만의 삶은 외관에서도 그 경박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로만과 백중혁.
둘은 다른 삶을 살았다.
정점의 자리에 올라서 남을 굽어보던 백중혁의 분위기는, 외관을 떠나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사람의 외관.
중요한 요소였다.
처음에는 다들 로만을 멀리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달라진 모습에 말이라도 한번 걸고 싶어졌다.
그래서일까.
몇몇 귀족들이, 로만을 향해 먼저 다가갔다.
처음 다가간 귀족은 여성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게 로만에 관해 물어보았던 그녀는, 평판과는 다른 모습에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셀(Grisel) 가문의 소피아라고 합니다.”
탁.
로만이 걸음을 멈추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소피아를 향하자, 소피아는 살짝 부끄럽다는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아마 그리셀 가문의 이름이 그리 익숙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 아버님이신 그리셀 남작님은, 대대로 카이로 왕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대단한 가문은 아니나 그렇게 역사가 짧지는 않습니다.”
소피아는 하급 귀족의 여식이었다.
변방의 자그마한 땅에 터전을 잡았고, 사람들은 그리셀이라는 가문이 대대로 남작 위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왕국 내에서의 입지가 떨어졌다.
그런데도 바르코 가문의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피아의 외모가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귀족의 여식이라는 조건은, 바르코 장자의 초대장을 받을 만한 이유로 부합했다.
그래서일까.
소피아는 가문에 관해 설명했다.
하급 귀족의 출신이라는 사실은 자존감을 떨어트렸고, 누굴 만나든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반해.
바르코와 드미트리는 다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카이로 왕국 동북쪽 일대에서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귀족의 자격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그때였다.
“그리셀 가문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카이로의 귀족으로서, 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가문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지요.”
“……정말 그리셀 가문을 아세요?”
로만의 말.
소피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순히 로만과 대화를 한번 나누려는 생각이었는데, 설마 로만이 그리셀 가문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아는 척을 해 보는 건가?’
의구심이 일었다.
간혹 있다.
귀족 가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실례가 되는 행위기에, 몰라도 아는 척 일단 말하고 보는 족속.
로만도 같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변방에서 이름 한번 떨친 적이 없는 그리셀 가문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데.
“예전에 아버지가 그리셀 가문에 관해 설명했던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동북쪽 일대에서 오랜 세월 터전을 잡은 가문이고, 그들이 생산하는 목재는 카이로 왕국에서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하다고요. 그래서 가문의 문양도 가지를 넓게 뻗은 거목(巨木)이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최근에 동생분이 마나 감응에 성공하셨다고 했는데, 진심으로 동생분의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아!’
순간.
소피아의 의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로만이 진정으로 그리셀 가문에 대해 알고 있고, 자신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로만이 그리셀 가문을 알아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피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로만 드미트리가 소문과는 다른 사내일지도 모르겠어.’
사교 파티에서의 첫 대화.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 * *
지금으로부터 2주 전.
사교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로만은 한스에게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부탁을 했다.
“한스. 지금부터 동북쪽 일대에 위치한 가문의 정보를 모두 가져오너라. 카이로 왕국 동북쪽 일대에는 어떤 가문이 있는지, 그리고 그 가문의 문양은 무엇이며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모두. 사교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만날 사람들의 배경을 알고자 한다.”
의외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한스는 늘 그랬듯 반문하지 않았고, 로만이 원하는 대로 주변 일대의 정보를 모조리 대령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정보를 읽었다.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가문의 문양을 익히고, 만나 보지도 않은 사람들의 정보를 읽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데도 로만은 이게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일반 평민이 아니다.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로서, 가문을 대표해 바르코의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 내가 만날 사람들이 어떤 가문의 소속인지, 그리고 그 가문은 어떤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 왔는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평가받는 나로서는, 타인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교의 정점에 올랐을 때.
백중혁은 군림하는 자의 역할을 공부했다.
약육강식(弱肉強食)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무력이 제일의 가치지만,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간의 경험이 말해 주었다.
수천, 수만의 수하들.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았던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백중혁에게 목숨을 바쳤다.
웃긴 일이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백중혁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로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 간의 관계는 아주 사소한 것에부터 시작된다. 나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시작 단계부터 편견이 있겠지만, 그들의 이름을 내가 기억하고 알아준다면 그들의 태도는 달라지겠지. 사람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오히려 관심을 먼저 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고, 나는 로만 드미트리로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그만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소피아 그리셀.
로만은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본인을 그리셀이라고 밝혔을 때, 로만은 모든 것이 기억났다.
‘그리셀 가문은…….’
그들의 문양.
그들의 역사.
그리고, 최근에 그들에게 있었던 대소사까지.
로만과 소피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그때부터는 망설이던 귀족들이 로만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파티가 시끌벅적해졌다.
그 중심에는, 바로 로만이 있었다.
“볼트(Bolt) 가문의 장자를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볼트 가문에 대해서는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볼트 자작님이 전장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그때의 일을 책으로 읽으면서, 저도 나중에 볼트 자작님처럼 전장에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최근에 지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날씨가 쌀쌀할수록 건강을 잘 챙기셔야 합니다.”
“한 10년 전이었던가요. 헤로스(Heros) 가문과의 거래로 드미트리가 큰 이득을 보았습니다. 아버님은 항상 헤로스 가문이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해 주었는지를 말해 주었기에, 저 또한 헤로스 가문에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로만.
그는 마교의 정점이었고, 한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축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강력한 무력 덕분이라고들 말했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완벽하게 지배할 수 없다.
권력자의 덕목.
로만은 사교의 중요성을 알았다.
단순히 상대를 기억하고 상대가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권력의 뼈대를 얼마나 단단하게 만드는지를 말이다.
바르코의 파티.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었다.
처음에는 박쥐 같은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왕따를 당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달라진 외관과 상대의 이름을 기억하고 칭찬을 건네는 화법에 귀족들이 알아서 몰려들었다.
로만을 몰랐던 사람들은 로만에게 호감을, 그리고 로만을 알았던 사람들도 로만이 변했다는 사실에 달리 보았다.
십수 년.
로만의 평판은 켜켜이 쌓였다.
파혼을 통보받고도 오히려 문제의 원인으로 취급을 받았던 그가, 말 몇 마디로 분위기를 녹여 버렸다.
한 귀족이 말했다.
“제가 그동안 로만 님을 잘못 판단한 모양입니다. 항상 술에 취해 계셔서 술 없이는 대화하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재밌고 유쾌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볼트 가문과 드미트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합니다.”
볼트 가문.
그의 아비를 칭찬해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는 기분이 좋아서 빨개진 얼굴로 호쾌하게 웃었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제는 아무도 로만을 흉보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까지 로만이 문제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은근슬쩍 다가와 같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드미트리.
동북쪽 일대의 실세.
로만은 그간 드미트리를 등에 업고도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장자임에도 가문을 물려받을 확률이 희박하고, 사람 자체가 가볍고 경박스럽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외관부터 달라진 로만은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뒤늦게 로만의 위치를 깨달았다.
로만은 드미트리의 장자다.
그가 실제로 이리 괜찮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계산이 깔렸다.
그때였다.
인파를 뚫고, 바르코의 하인이 다가와 말했다.
“로만님. 저희 도련님이, 밀실(密室)로 초대하셨습니다.”
하인이 말하는 도련님.
그의 정체는 하나밖에 없다.
안토니 바르코.
기다리고 있던 만남에, 로만은 주변에 있는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하인에게 말했다.
“밀실로 안내하거라.”
지금부터는.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로만의 진실을 알아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