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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615)

25화 사교 파티에서 생긴 일 (3)

안토니 바르코의 인상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얼굴의 그는, 로만을 발견하더니 휘둥그레진 눈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로만!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조금 전.

하인을 통해 로만이 변했다고는 들었다.

그런데 변화가 이 정도로 극적일 줄은 몰랐기에, 진심으로 놀란 눈길로 로만의 모습을 살폈다.

로만이 말했다.

“나도 그 영문을 모르겠어. 외모를 관리해 보겠다고 막대한 돈을 쏟아부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더니, 요새는 뭘 하지도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변하더라고. 어찌 되었거나 오랜만에 봐서 반갑네.”

말을 편하게 놓았다.

가볍고 경박한 어투는, 그간 안토니 바르코와의 사이를 지켜보았던 한스의 조언을 참고한 것이었다.

‘밀실에는 안토니 바르코밖에 없어.’

주변을 살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다른 귀족의 여식들과 파티를 즐기던 안토니 바르코는, 로만이 도착했다는 말에 그녀들을 모두 내보냈다.

그래서인지 테이블 위는 정말 엉망이었다.

수많은 술병이 널브러져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자의 속옷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얼추 짐작되었다.

안토니 바르코가 어떤 사람이고, 사교 파티를 명목으로 밀실에서 어떻게 놀았는지를 말이다.

그렇기에.

로만은 속내를 숨겼다.

마교의 약삭빠른 능구렁이들을 상대하면서, 항상 정공법(正攻法)으로만 상대할 수 없음을 알았다.

‘안토니 바르코는 내가 왔다는 말에 밀실의 귀족들을 모두 내보냈어. 그 말인즉, 아무도 듣지 말아야 할 비밀스러운 얘기를 한다는 의미고, 나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최소한의 연기가 필요해.’

웃었다.

안토니 바르코가 기억하는 로만으로 생각하길 바라며, 의자에 착석하자마자 술을 한 잔 들이켰다.

탁.

“크으, 좋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술기운은 단번에 날려 버렸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로만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길로 안토니 바르코의 말을 기다렸다.

안토니 바르코.

그에 관한 정보는 단편적이다.

한스를 통해서 얼추 상대의 성향은 파악했지만, 둘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으로, 상대가 먼저 말하기를 유도했다.

그러자.

안토니 바르코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는 건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사실, 그때도 네 의도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어. 나와의 친분을 외면하고 로렌스와의 정략결혼을 강행한 네가, 밀실의 침실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정말……. 어후. 아무리 비밀이 보장되는 사교 파티라지만, 결혼을 앞둔 네가 그 정도로 막 나갈 줄은 몰랐지.”

사교 파티.

밀실의 침실.

진실의 파편이 툭툭 튀어나오는 상황에, 안토니 바르코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본론을 말했다.

“그래. 이번 파티에 참석한 것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지? 아니, 애초에 파혼으로서 네 의지를 증명했으니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겠지. 그때의 일은 비밀로 묻어 둘 테니, 이제는 바르코와의 혼인을 얘기해 보자고.”

바르코와의 혼인.

핵심적인 단어를 언급하는 순간, 로만의 머릿속에서 잠금장치가 풀렸다.

탈칵.

기억의 저편.

생전(生前)의 기억이 살아났다.

그날.

로만은 바르코의 사교 파티에 참석할 생각에 잔뜩 긴장했다.

“후우, 로만 드미트리. 너무 긴장하지 말자. 안토니 바르코를 배신하고 로렌스와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였지만, 언제까지고 그들을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들과의 관계를 되돌리자.”

바르코의 초대장.

그것을 확인하고 수도 없이 망설였던 그는, 결국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상대는 바르코다.

자신으로 인해 그들과 전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에, 되도록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로렌스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하면서부터 바르코와는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으로 돌아섰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어린 마음에 아직 충분히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로만은 파티장에 갔다.

생각보다 안토니 바르코는 로만을 반겨 주었고, 긴장이 풀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술을 양껏 들이켰다.

그게 문제였다.

필름이 끊겼다.

숙취에 깨져 버릴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을 때는, 전혀 생소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밀실의 침대.

처음 보는 얼굴의 여인들이 곁에 있었다.

로만은 화들짝 놀라서는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 모습을 안토니 바르코가 보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로만의 인생이 바닥으로 추락한 것이.

안토니 바르코와 로만은 평소에 문란하게 놀았던 사이였기에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안토니 바르코는 로만을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사나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로만. 정략결혼을 앞둔 네가 여성들과 문란하게 노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어. 그런데 지금 네가 누구를 건드린 줄 알아? 너와 같이 있었던 여인 중 한 명의 이름은 에밀리 바르코야. 넌 지금 날 배신하고 로렌스와 정략결혼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바르코의 여인을 건드린 것이라고.”

에밀리 바르코.

바르코의 방계(傍系)였다.

그날부터 안토니 바르코는 그 사실을 빌미로 협박했다.

“선택해. 이 사실을 폭로하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당할지, 아니면 바르코의 방계가 아니라 직계와의 혼인으로 우리의 관계를 다시 바로잡을지. 아직도 네가 한 일에 분노가 치밀어오르지만, 네가 바르코의 사람이 되겠다면 나는 분노를 억누르고 널 용서할 생각이 있어.”

하늘이 무너졌다.

로만은 파티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혔고, 한스에게 술을 가져오라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고통의 나날이었다.

두 선택지.

모두 최악이었다.

바르코의 방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파혼을 당한다면 드미트리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평민 출신의 가문이 어떤 평판을 듣는지 알고 있는 로만 드미트리기에,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아버지인 로메로 남작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후자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로만은 플로라를 사랑했다.

그녀를 처음 본 날 완전히 빠져 버렸고, 정략결혼으로 인해 가문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데도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파혼을 요청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 ‘파혼녀’라는 불명예를 안겨야 한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고민에 빠졌다.

안토니 바르코는 시시때때로 서신을 보내 그를 압박했고, 결국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날.

로만은 자살을 택했다.

그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인간은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었고, 자신이 죽는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장자의 죽음.

그것 또한 드미트리 가문의 불명예지만, 그래도 아들의 문란한 행위로 일방적으로 파혼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고, 플로라 로렌스 또한 파혼녀라는 딱지가 붙는 것보다는 사별(死別)이 훨씬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참.

한심했다.

그간의 기억에, 로만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정말 초라한 현실이구나.’

자살의 이유.

대단하지 않았다.

바르코는 정치판에서 흔히 일어나는 술수를 부렸고, 나약한 인간이었던 로만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플로라를 향한 진심에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

만약 로만이 아버지를 신뢰했더라면. 로메로 남작은 절대, 아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만을 몰랐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렇기에 약을 와득와득 씹어 먹는 것으로 짐을 떠안았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다.

앞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로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안토니 바르코의 모습이 보였다.

드미트리의 파혼.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안토니 바르코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분이 정말 좋았다.

‘멍청한 녀석!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정말 파혼을 해 버리다니.’

로만의 기억.

그것은 진실과 달랐다.

밀실의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것은 맞지만, 로만은 같이 있던 여인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처음에는 맨정신에 작업할 생각이었다.

평소에 문란한 삶을 살았던 로만이라면 작업이 쉬우리라 생각했는데,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미안한데, 난 이제 결혼을 앞둔 몸이야. 앞으로는 다른 여인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어.”

같잖았다.

언제부터 로맨티스트였다고 사랑을 말하는 그의 모습에, 안토니 바르코의 심사가 완전히 뒤틀렸다.

그래서 계획했다.

로만이 잔뜩 취하도록 만들었고, 힘이 없는 방계의 여인을 설득해서 로만과 잠자리를 했던 것처럼 연기하라고 말했다.

로만으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애초에 문란하지 않았던 사람이면 모르되, 문란했던 로만이기에 자신의 잘못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말았다.

그리고.

로만을 협박했다.

계획대로 로만은 파혼을 선택했고, 안토니 바르코는 이 계획의 피날레가 무엇인지 알았다.

‘이제 로렌스 가문은 완전히 궁지에 몰렸어. 하지만 같잖은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끝까지 투쟁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바르코와 드미트리가 정략결혼을 한다면? 게임은 끝이야. 단순히 의지만으로 버티기에, 동북쪽 일대에서 바르코와 드미트리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은 없어.’

완벽했다.

속으로 웃음을 삼킨 안토니 바르코는, 자신의 꼭두각시인 로만을 향해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내뱉었다.

“로만. 바르코와 드미트리의 결합은 동북쪽 일대를 발칵 뒤집을 엄청난 이슈야. 그 누구도 우리의 철옹성을 넘보지 못할 것이고, 너는 동북쪽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쟁취할 수 있어. 그리고 네가 혼인할 내 동생은 알다시피 모두가 알아주는 미녀야. 너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라고.”

달콤했다.

사내라면 현혹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고, 안토니 바르코는 당연히 로만이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만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런 이유만으로는 내가 정략결혼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라고?”

안토니 바르코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순간 잘못 들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말했다.

“네가 무슨 착각을 한 모양인데, 이건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아니야. 네가 만약 바르코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나로서는 밀실의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세상에 공개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드미트리의 위상이 어떻게 되겠어? 로렌스와 파혼을 했다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파혼의 이유가 네 여성 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잘 생각해.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고 싶으면.”

협박이었다.

안토니 바르코의 사나운 얼굴을 마주하고도, 로만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안토니 바르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며칠 전.

로만은 바르코 가문을 조사했다.

바르코가 어떤 곳인지, 그들이 얼마나 강인한 세력인지를.

그리고 판단을 내렸다.

“방금도 말했잖아. 그따위 같잖은 이유로는, 드미트리가 바르코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동북쪽 일대.

이곳의 갑(甲)은, 바르코가 아니라 드미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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