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모병 (1)
다음 날.
로만은 한스로부터 부탁했던 자료를 받았다.
“바르코 가문의 정보입니다. 정보 길드의 말로는, 최근 그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
로만은 바르코 가문에 대해 알아보았다.
대략적인 정보로 그들의 수준은 파악했으나,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는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동북쪽 일대에 활동하는 정보 길드 블랙 문(Black Moon)에 의뢰를 넣었다.
바르코가 최근에 어떤 일을 벌이는지, 그리고 그들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해 달라고 말이다.
한스가 물러나고.
로만은 정보를 확인했다.
사락.
‘바르코 가문. 백여 년 전부터 동북쪽 일대에 자리를 잡은 가문이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실세로 떠오른 계기는 바르코 가문의 사람이 중앙 정부에 입성하면서부터다. 실제로 그들의 군사력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지만, 중앙 정부의 영향력은 카이로 왕국에서 절대적이다.’
카이로 왕국.
샐러맨더 대륙을 구성하는 2개의 제국과 6개의 왕국, 그중 약소국(弱小國)에 해당하는 나라다.
카이로 왕국은 동북쪽 일대의 산맥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어서, 옛날부터 외세의 침략에 고통을 받았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중앙 정부는 힘을 얻었다.
기본적으로 지방의 귀족들이 사병을 육성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나라 밖에 위협적인 적들이 도사리다 보니 살기 위해서라도 중앙 정부를 중심으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징집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징집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카이로 왕국의 울타리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중앙 정부는 병력을 파견해서 분란 세력을 토벌하고 해당 영토를 왕국의 소유로 환수했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준 주변의 영주들은 일정 토지를 보상으로 받고, 나머지는 중앙 정부의 말을 잘 듣는 새로운 귀족을 내세웠다.
그로 인해 중앙 정부.
즉, 수도 귀족들의 힘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코 가문은 그런 중앙 정부를 뒷배로 두었고, 권력의 체계가 그들에게 무형의 힘을 부여했다.
[바르코 가문이 최근 중앙 정부의 연줄을 활용해서 골든 뱅크를 통해 거액의 대출을 받았습니다. 보통은 불가능한 수준의 액수이나, 바르코 가문은 특별한 담보 없이 신용 보증으로 이번 거래를 진행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돈이 베르게(Berge) 용병단으로 흘러갔습니다. 베르게 용병단은 A급 용병 베르게를 중심으로 100여 명의 용병을 거느리고 있으며, 영지 간의 분란에 개입해서 수수료를 받는 것을 주 업으로 삼는 집단입니다.]
정보는 상세했다.
바르코가 어떻게 돈을 확보했으며, 그 돈으로 무엇을 의도하는지가 설명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영지민의 징집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보름 안에 로렌스를 공격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르코는 준비를 끝냈다.
드미트리가 파혼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부터 그들은 본격적으로 움직였고, 로렌스는 한순간의 실수로 바르코의 공격을 홀로 막아서야만 했다.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 소문에 의하면, 로렌스 자작은 주변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지원을 받아 보고자 발악하고 있었다.
‘바르코 가문은 중앙 정부의 연줄을 활용해서 힘을 얻었다. 전력의 차이는 명백하고,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바르코의 위협을 감수하고 로렌스를 도와줄 가문은 없다. 이대로 관망한다면, 로렌스가 농성을 한다고 할지라도 한 달 이상을 버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겠지.’
결과는 뻔하다.
그렇기에, 로만은 다른 전제를 깔았다.
‘만약 바르코와 드미트리가 붙는다면?’
상대의 몸집을 부풀렸다.
변수를 계산하고, 최악의 수를 생각해 보았으나, 만일의 상황에 대한 결론은 단 한 번도 변함이 없었다.
‘100번을 싸워도 100번 모두, 드미트리의 승리다.’
압도적인 차이.
그게, 로만의 결론이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재력과 무력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드미트리처럼 막대한 부를 보유한 가문의 경우에는 다르다.
보통 일반 귀족들은 사병을 200명 내외로 유지한다.
그 이상의 병력은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기에, 적절한 병력으로 영지를 다스리다가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일반인을 징집해서 병력을 보충했다.
그것은 바르코 가문도 다르지 않았고, 그렇기에 전투에 특화되어있는 베르게 용병단의 고용은 대세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문제였다.
그에 반해.
드미트리 가문은 달랐다.
항상 사병을 300명 이상 유지했고, 드미트리 기사단이라는 병사 이상의 무력 단체를 육성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징집을 당하는 병사들은 무장이 허술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드미트리는 대장장이 가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징집병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무장을 갖추어 주었다.
단순히 죽창 하나를 던져 주고 징집병들을 전장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죽 갑옷과 단단한 철창을 보급품으로 지급했다.
그렇다 보니 같은 징집병이라 할지라도, 드미트리의 전투력이 조금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드미트리는 애초에 상단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륙을 누비며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몸을 보호할 수단이 필요했고, 그래서 벤자민(Benjamin) 용병단과 수십 년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벤자민 용병단의 규모는 크지 않았는데, 드미트리 상단의 지원으로 그들은 500명 이상의 용병을 거느린 집단이 되었다.
그 말인즉, 드미트리와의 분쟁은 벤자민 용병단의 개입까지 고려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바르코와 드미트리.
둘의 차이는 컸다.
중앙 정부가 발휘하는 무형의 힘만으로는, 동북쪽 일대에서 드미트리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드미트리에게 부족한 것은 재력과 무력이 아니야. 로메로 드미트리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 가문의 역사가 짧고 출신이 비천하기에, 카이로의 귀족들은 드미트리 가문을 귀족으로서 인정하지 않아. 하지만 그들의 인식을 떠나, 드미트리가 동북쪽 일대의 실세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드미트리는 힘이 있다.
가문의 힘을 빌린다면, 생전의 로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바르코를 처벌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로만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선택의 기로에 선 지금,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바르코 가문의 기사들만 보더라도,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배경과는 별개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사람을 그렇게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아. 생전의 로만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삶을 살았지만, 나 백중혁은 그와 달라. 안토니 바르코는 날 건드렸어. 그렇기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것이고, 가문의 힘을 빌리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증명할 방법으로는 옳지 않아.’
12굴에서.
백중혁은 직접 우두머리의 머리를 부숴 버렸다.
나약하게만 보던 평판을 뒤바꾼 순간이었고, 지금도 그와 같은 확실한 도약의 계기가 필요했다.
로만은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최소한의 피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자신만의 무언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고로.
딸랑딸랑.
“한스.”
로만은 한스를 불렀다.
앞으로 보름.
그때까지,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동북쪽 일대에 전운이 감돌고 있을 무렵.
드미트리에 한 사내가 도착했다.
“드미트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
사내의 이름은 루카스(Lucas).
B급 용병이었다.
용병으로서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그는, 최근에 국경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정말 피가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전우들의 시체를 밟고 일어나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용병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전장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루카스는 재정비를 위해 드미트리로 왔다.
드미트리 태생은 아니지만, 드미트리의 대장간은 용병들 사이에서 퀄리티가 좋기로 매우 유명했다.
“씨발, 다음부터는 국경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어. 대가리에 똥만 찬 새끼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바람에, 내 십수 년 용병 인생이 그날로 끝나 버릴 뻔했잖아. 에휴, 개 같은 새끼들.”
한숨이 나왔다.
시선 아래로.
처참하게 변해 버린 사슬 갑옷이 보였다.
나름 거금을 주고 구매했던 그것은 군데군데 찢겨 나가 상처 부위를 드러냈고, 날이 완전히 나가 버린 검은 맨살조차 제대로 베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덕분에 전투 도중에 욕을 신랄하게 내뱉었다.
괜히 새로운 구매처에서 무장을 맞추었다가, 하나뿐인 목숨을 날릴 뻔했다고 말이다.
역시.
철제(鐵製)는 드미트리 산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드미트리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대장간으로 가서 새로운 무장의 제작 의뢰를 넣었다.
‘당분간은 드미트리에서 지내며 요양 좀 하자.’
전장은 지긋지긋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그때의 순간을 생각하노라면, 벌써부터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루카스는 걸음을 옮겼다.
식당에 가서 끼니를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도시 광장에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웅성웅성.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일었다.
십수 년 용병 인생.
호기심에 살았고, 호기심에 죽을 뻔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루카스의 DNA였고, 그는 자석에 딸려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파를 헤집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곳에는 게시판이 있었다.
영주가 명령을 내리거나, 일반 사람들이 정보를 전달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게시판에는 하나의 글이 사람들의 시선을 반겼다.
[사병 모집]
-지원 자격: 건강한 신체,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
-모집 인원: 30명
-급여: 매월 8실버
-특이 사항: 드미트리 가문이 아니라 오롯이 로만 드미트리에게 귀속되는 신분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만이 지원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병(募兵) 공고였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일반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는 평균적으로 5실버 내외인데, 8실버를 주겠다는 것은 위험 수당을 고려해서라도 정말 괜찮았다.
게다가 지원 자격도 특별한 것이 없었다.
일반인이라면 충분히 혹할 만한 조건이었으나, B급 용병인 루카스로서는 심드렁한 표정을 보였다.
‘나와는 관계가 없는 공고네.’
B급 용병.
일반 사병으로 들어갈 신분이 아니다.
만약 귀족을 위해 충성을 맹세할 거라면, 적어도 매달 50실버는 받아야 고민해 볼 문제였다.
그때였다.
“혹시 지원할 생각이라면 말아. 지금 사병으로 지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수백 명은 될 테니까.”
옆에 있던 노인이었다.
노인은 루카스가 관심이 있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넘어갔겠지만, 루카스로서는 노인의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사병이 되겠다는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된다고? 이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로만 드미트리.
근방에서 유명하다.
루카스도 종종 드미트리를 방문했었기에, 로만 드미트리가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지를 잘 알았다.
한 2년 전이었던가?
그때가 드미트리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때였는데, 도박장에서 돈을 잃고 행패를 부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보면서 로메로 드미트리라는 거물이 자식 농사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수백 명이나 그의 사병을 지원하다니.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지만, 로만 드미트리의 밑에서 어떤 미래가 있을지는 뻔히 보였다.
그래서일까.
루카스는 호기심에 물었다.
“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아무리 매달 8실버를 준다고 할지라도, 상대는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는 로만 드미트리이지 않습니까? 그의 사병이 되었다가는 어떤 수난을 겪을지 모릅니다.”
그 말에.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인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루카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외지인이라 이쪽 사정을 잘 모르는구먼. 로만 드미트리는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 로만 드미트리가 아니야. 블러드 팽을 토벌한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을 정말 귀하게 여겨 주시는 분이라고!”
최근.
드미트리에 하나의 소문이 퍼졌다.
이번 사병 모집 공고로 인한 열기는, 바로 그 소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