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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615)

29화 모병 (2)

케빈이 로만의 부름을 받은 날.

케빈의 가족은, 블러드 팽의 위협에서 벗어나 난장판이 되어 버린 집을 정리했다.

“빌어먹을 녀석들. 살림살이를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네.”

“그래도 집으로 돌아온 게 어디예요? 로만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몰라요.”

남편 클라크의 말에, 아내 미셸이 대답했다.

그때만 해도.

클라크 가족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다.

고리대금으로 인해 전 재산을 날려 버렸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험악한 사내들이 고성을 내지르며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클라크의 얼굴은 폭력에 성할 날이 없었고, 미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딸을 지켜 보겠다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단 한 번의 거래.

자신의 땅을 일구어 보겠다는 농부의 꿈은, 흉악한 범죄 집단을 만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로만 도련님이 블러드 팽을 토벌했다는 게 사실일까? 우리가 아는 로만 도련님은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아니잖아. 케빈이 워낙 호들갑을 떨면서 로만 도련님이 대단한 사내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는 했지만, 나는 그간 보고 들은 것이 있어서 선뜻 믿기지 않아.”

지난 며칠.

클라크로서는 믿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케빈을 구해 준 것으로도 모자라, 로렌스까지 찾아가서 블러드 팽을 토벌해 버렸다.

지옥은 끝났다.

로만의 대리인인 한스가 찾아와서 클라크 가족을 돌봐 주었고, 덕분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에게 로만은 은인이었다. 그런데도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뿐인 아들이 로만을 따르겠다고 집을 나섰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그런 평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잘 알기에, 아들의 인생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미셸이 말했다.

“우리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미셸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흐트러진 그릇 조각을 치웠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그것들은, 그간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세간의 소문처럼, 드미트리 가문이 로만 도련님의 평판을 관리하기 위해서 사건을 조작한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도련님의 도움을 받았다는 거예요. 만약 로만 도련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블러드 팽에게 어떤 일을 당했을지 몰라요. 그렇기에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로만 도련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우리는 로만 도련님에게 평생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요.”

로만을 믿었다.

은혜를 받았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미셸은 로만의 이름을 언급하는 데 조심스러움이 있었다.

앞으로 아들이 따를 사람.

신뢰의 근거는 충분했다.

미셸 또한, 로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똑똑.

“계십니까?”

밖에서 남정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클라크 가족은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험악한 사내들이 집안에 들이닥쳤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혹시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을 반긴 것은 따뜻한 웃음이었다.

한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로만 도련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앞으로 거주하게 되실 새로운 집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스의 말.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었다.

* * *

얼떨떨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케빈의 가족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말 앞으로 여기에서 살라는 말씀인가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간 살았던 판잣집과는 달랐다.

멋들어지게 지어진 목조 주택에, 한스는 웃는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당연합니다. 로만 도련님의 선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로만 도련님 소유의 일부 땅을 클라크 씨에게 대여할 예정입니다. 차지료(借地料)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로만 도련님은 케빈에게 가족을 돌봐 줄 것을 약속했고, 집과 땅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집과 땅.

평생을 바랐던 꿈이다.

그것을 일순간에 이루어 버린 상황에, 클라크는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저희는 블러드 팽을 토벌한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은혜를 베푸는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제 아들을 희생해서 받는 대가라면, 저는 그게 금은보화라 할지라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진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로만의 선물.

과했다.

케빈은 평범한 소년에 불과했고, 이런 대단한 보상을 받을 만한 자질이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대체 왜.

이토록 잘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스가 웃었다.

“저도 로만 도련님의 의중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로만 도련님은 앞으로 케빈을 자신의 사람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보상의 이유는 그뿐입니다. 자신의 사람이기에, 그 사람의 가족들조차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 로만 도련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한스의 웃음이.

그리고 케빈을 자신의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그 말이,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었다.

한스는 금방 자리를 떠났다.

한동안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케빈 가족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집 같은 집.

이 하나를 위해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던가.

그것이 이루어진 순간에, 클라크는 아내와 딸을 한 번에 안고는 펑펑 울었다.

한동안.

그들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들의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미트리 전역에 조금씩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소문이 돌았다.

빈민가의 클라크 가족이, 입성(入城)에 성공했다고 말이다.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그 클라크네 가족. 블러드 팽에게 고리대금을 잘못 써서 난리가 났었던 그 집안이, 로만 드미트리의 부름을 받고 입성을 했다지 뭐야. 지금 소문에 의하면 무상으로 땅까지 받았다는데?”

“정말?!”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입성.

그것은 신분 상승의 상징이었다.

특별한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성 밖의 빈민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데, 얼마 전만 하더라도 본인들보다

사정이 좋지 않았던 클라크 가족이 입성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가 클라크 가족을 그만큼 대우해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성안에서 클라크 가족을 목격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클라크 가족은 성 외곽에 있는 멋들어진 목조 주택에서 생활할 뿐만 아니라, 땅까지 빌려서 경작(耕作)도 하더라고. 내가 직접 보고 말하는 거니깐 믿어도 돼.”

“정말 사람 인생은 모르는 법이네. 고리대금으로 인생이 망할 뻔한 클라크 가족이, 예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인생 역전에 성공하다니. 그나저나 최근에 로만 도련님의 행보가 참으로 의외네. 예전에는 어디서 사고를 쳤다는 소문만 들렸는데, 블러드 팽의 토벌도 그렇고 이번에는 자신의 사람이랍시고 클라크 가족을 성으로 불러들였잖아.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

로만.

이번에도 그가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로만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신분 상승을 했다는 사실에, 로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케빈은 평범한 소년이다.

특별한 것 없는 소년이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유만으로 집과 땅을 하사받았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클라크 가족의 이야기가 드미트리 전역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되면 인생이 대박이 난다고 떠들었다.

틀린 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결과가 그러했다.

하지만, 아직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평판에 가로막혀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쯧쯧쯧, 멍청한 녀석들. 드미트리에서 수십 년을 살아 놓고도 헛소문에 들뜬 꼴이라니. 로만 드미트리가 자신의 사람이랍시고 그렇게 대우해 줄 사람으로 보여? 블러드 팽의 토벌도 그렇고, 그건 다 드미트리 가문의 개수작이라니까? 어디 한번 보라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내 장담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빈이 다 죽은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날걸?”

그때만 해도.

부정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발언에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소문에 화룡점정(畫龍點睛)을 찍는.

로만 드미트리의 평판을 완벽하게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 * *

바르코의 사교 파티가 끝나고.

영지로 돌아온 직후, 로만이 말했다.

“3일간 휴가를 다녀오도록.”

“……휴가요?”

케빈이 눈을 껌뻑였다.

휴가라니.

그것도 3일씩이나.

그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빈민들에게는 휴가가 없다.

날이 쨍쨍한 날에는 무조건 일을 하러 밖으로 나섰고, 일이 없거나 날씨가 엉망일 때나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휴가라는 단어가 무척 낯설었다.

어찌할지 몰라서 맹한 얼굴로 로만을 올려다보는 모습에, 로만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잘 쉬는 것 또한 훈련의 연장선이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니, 가족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거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케빈은 휴가를 얻었다.

얼떨떨했다.

그동안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훈련에만 몰두했던 케빈인지라, 가족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 익숙하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다. 케빈은 평생 가족과 살았다.

그런데 로만과 지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의 인생에 로만의 그림자가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떤 게 도련님의 진짜 모습일까?’

로만 드미트리.

양파 같은 사내였다.

블러드 팽과 같은 적을 상대할 때는 조금의 자비도 없는 잔인한 모습을 보였지만, 자신의 사람에게는 과할 정도의 정성을 베풀었다.

그렇다고 매번 따뜻한 것도 아니었다.

공과 사가 확실하기에,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일 때는 자신의 사람이라고 무작정 배려해 주지 않았다.

선이 확실한 사람.

그게 로만이었다.

어떤 것이 진짜 로만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케빈으로서는 확실히 깨닫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

한스가 다가와 말했다.

“오랜만에 가족을 보는데 그런 꼴로 가려고? 로만 도련님이 깨끗한 옷을 준비해 주었으니, 이걸 입고서 가족들을 만나. 그리고 가족들의 선물을 사려면 돈도 필요하지 않겠어? 앞으로는 매달 30실버가 월급으로 지급될 테니까, 그걸로 선물을 사든 사치를 부리든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와.”

깨끗한 옷과 돈.

로만의 선물이었다.

울컥했다.

참.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은 척 차가운 얼굴을 보이면서도, 로만은 항상 케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았다.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주군은 날 귀하게 여겨 주셔. 그것만으로도 주군을 따를 이유로는 충분해.’

웃음이 나왔다.

케빈은 샤워실로 가서 몸을 씻었고, 로만이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에 입던 꺼끌꺼끌한 옷과는 재질부터가 달랐다.

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느낌은 황홀할 지경이었고, 주머니에서 은화가 찰랑거리자 달라진 모습으로 가족을 본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케빈은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몰랐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자신의 모습처럼, 가족들도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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