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615)

30화 모병 (3)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빈민가의 판잣집이 아니라 성 외곽으로 가라는 말에, 케빈은 영문을 몰라서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왜 여기로 가라는 거지?’

이사를 했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케빈의 부모님은 성안으로 거처를 옮길 만큼 자금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이 아니고, 블러드 팽의 협박에 비상금마저 박박 긁어서 모두 사용했다.

그래서 단순히 그곳에 ‘용무’가 있다고 이해했다.

그것이 케빈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의 선이었고, 부모님과 여동생을 만날 생각에 빵집에 들러서 바게트와 생크림을 샀다.

‘마리가 정말 좋아하겠지.’

마리는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마리는 아침마다 딱딱한 빵을 먹으면서, 우리는 왜 갓 만든 빵을 먹지 못하냐며 투정을 부렸다.

그때는 시무룩한 얼굴로 빵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면서도 사 주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갓 만든 빵과 차갑게 식어서 딱딱해진 빵의 가격은 2배 이상 차이가 났고, 특히 빵에 발라 먹는 생크림은 감히 살 엄두를 내질 못했다.

한 번은 사치를 부릴 수는 있다.

그러나 사치의 대가가 굶주림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이른 나이에 철이 들어 버린 케빈은 딱딱한 빵을 입으로 욱여넣었다.

그리고 지금.

예전과는 달랐다.

빵과 생크림을 사고도 많은 돈이 남았고, 케빈은 그것을 부모님의 용돈으로 모두 드릴 생각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에, 어느새 언질 받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입이 떡 벌어졌다.

눈앞의 광경.

괴리감이 일었다.

판잣집에서 생활하던 부모님은 멋들어진 목조 주택 마당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보란 듯이 탁자에는 따뜻한 빵이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 조각들을 기워서 만든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던 여동생 마리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마당의 꽃들에 물을 주었다.

세상이 변했다.

케빈의 가족은 더 이상 빈민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들을 즐길 수 있는 평민(平民)의 삶을 살았다.

“오빠!”

“아들?!”

케빈의 가족들이 뒤늦게 그를 발견했다.

마리는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와락 안겼고, 클라크와 미셸도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재회의 시간이었다.

기껏 준비한 빵과 생크림이 무색해졌지만, 케빈은 자신의 가족이 이렇게나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가족들의 변화.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이다.

그에 대해서는, 아버지인 클라크가 가족을 대표해서 말해 주었다.

“처음에는 우리도 무척 당황스러웠단다. 로만 도련님의 하인인 한스 씨가 찾아와서는, 로만 도련님의 명령이라면서 우리에게 앞으로 살 집과 밭을 일굴 땅을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연줄을 대 주고 금전적인 지원도 해 주었다. 최근 며칠. 이 아비는 꿈속에서 사는 것만 같단다. 빈민가에서는…….”

아버지의 얘기는 길었다.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그간의 일을 구구절절 말했다.

그러나.

케빈은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가족의 변화가 로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로만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앞으로 너의 가족은 생계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찬 바람을 막아 주는 따뜻한 집에서, 매일 삼시 세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고단한 일로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취미 생활도 즐기는 그런 삶을 살게 되겠지. 그렇게 살아갈 방법은 간단하다. 앞으로 내가 그리 만들 생각이다.”

로만이 케빈을 받아들인 날.

로만은 약속했다.

케빈은 그간 받은 은혜만으로도 로만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건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로만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케빈의 가족은 더 이상 생계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다.

목조 주택은 차가운 바람을 막아 주었고, 탁자 위의 음식은 풍요로운 삶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순간.

울컥했다.

가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뜨거운 감정에, 케빈은 고개를 떨구고는 울음을 삼켰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웠다.

신분의 차이가 하늘 같은 계급 사회에서.

로만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소년과의 약속을 외면하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로만은 목숨을 바칠 만한 사내였고, 이제는 그를 위해 죽는다면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자.’

지금은.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바르코의 사교 파티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알았기에, 한시라도 빨리 귀혼마공을 수련해서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상관이 없었다.

로만은 가족을 보살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고, 그런 확신만 있다면 이 선택에 후회는 없다.

고로.

강해질 것이다.

다시 한번, 케빈은 로만에 대한 마음가짐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구구절절 말하던 클라크가, 케빈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흠칫 표정이 굳어 버렸다.

“……너 혹시 로만 도련님에게 맞았니?”

얼굴의 상처.

빨갛게 부어오른 뺨은, 분명히 폭력의 흔적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로만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던 케빈의 부모는, 순간 사나운 얼굴을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 다오. 정말로, 로만 도련님이 네 얼굴에 손을 댔니?”

착각할 만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

로만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소문에는, 평민들에게 손찌검을 날리는 악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에.

폭력의 흔적이 로만에 의한 것이라면.

케빈의 부모는, 케빈의 고통을 대가로 호의호식한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에요. 로만 도련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럼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그게 사실은…….”

케빈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진실을 바라는 부모의 반응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바르코의 사교 파티에서 경험한 일을 말해 주었다.

“……그런 이유로 바르코 가문의 기사에게 뺨을 맞았어요. 그런데 로만 도련님은 그걸 방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를 위해 나서 주었어요. 왜 자신의 사람을 때리냐면서 역으로 바르코의 기사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벌했고, 덕분에 저는 사람들 앞에서 광대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로만 도련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로만 도련님이 좋지 않은 별명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제가 경험한 도련님은 절대 폭력이나 일삼는 분이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니?”

“예. 제가 부모님에게 거짓말할 사람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로만 도련님은 절 귀하게 여겨 주세요.”

케빈의 말.

클라크 부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로만의 소행이 아니라면 다행인 일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바르코의 기사를 처벌하는 것보다는 케빈을 때리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다.

그런데도 케빈의 말로는 로만이 바르코의 기사를 처벌했단다.

확실했다.

소문과는 달랐다.

케빈의 말이 절반이라도 사실이라면, 로만은 모두가 오해하는 그런 인물과는 완전히 달랐다.

미셸이 말했다.

“참 고마운 분이구나. 우리 아들을 귀하게 여겨 주시는 것으로도 모자라, 가족인 우리까지 챙겨 주시다니. 아들아. 로만 도련님이 한 일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란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로만 도련님에게 받은 것 이상으로 그분을 위해 헌신해야 한단다.”

“그래. 혹시라도 우리도 도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서 말해다오.”

부모님의 진심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진심으로 감격한 부모님의 반응.

그들은 로만의 인품에 완전히 빠져 버렸고, 그것이 소문에 불을 붙이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재회의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 * *

케빈이 돌아간 다음 날.

오랜만에 빈민가의 친우들과 재회한 클라크는, 간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그간의 일을 말했다.

“세상 소문이라는 건 역시 믿을 게 못 돼. 우리 케빈이 로만 도련님을 모시는 건 너희들도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케빈의 말로는 로만 도련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에 어울리는 정말 귀족다운 귀족이라는 거야.”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설마!”

“에이, 이 사람아. 내가 사는 집과 밭을 일구는 땅을 어떻게 얻었겠어? 로만 도련님이 케빈을 위해 우리에게 베푼 거야. 그것만 봐도 로만 도련님의 인품을 잘 알 수 있지.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이번에 케빈이 바르코의 사교 파티에 따라갔다가 사건이 하나 있었어. 바르코의 기사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로만 도련님은 자신의 사람인 케빈을 지켜 주겠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바르코 기사의 뺨을 멋지게 날려 버렸다지 뭐야. 그런 사람이 바로 로만 드미트리야.”

“그게 정말이야?”

“그래! 참 뉘 집 자식인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단 말이지.”

처음에는 작은 소문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금방 드미트리 일대를 떠돌았고, 그것을 들은 미셸이 소문에 불을 질러 버렸다.

마을의 빨래터.

빨래하던 미셸은, 주변 아낙네들의 물음에 대답했다.

“……소문이 사실이야? 로만 도련님이 케빈을 위해서 바르코의 기사를 엄벌했다는 게?”

“어머나, 그건 또 어디서 들었대? 그렇게까지 말해서 하는 말인데, 로만 도련님은 케빈을 비롯해 자신의 사람을 정말 귀하게 여겨 주는 분이셔. 그러니까 바르코의 장자가 케빈을 엄벌하겠다고 소리를 지르는데도 케빈의 편을 들어준 거지. 세상에 그런 귀족이 있다는 말 들어봤어? 드미트리의 얼간이? 그거 다 헛소문이야. 대체 어떤 녀석들이 감히 우리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보면 후광(後光) 때문에 감히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할걸?”

“예전에 로만 드미트리가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직접 봤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소리! 내가 헛것을 보았거나, 로만 도련님과 비슷한 녀석이 행패를 부렸던 게 분명해.”

아들의 은인.

미셸은 나쁜 기억마저도 개조(?)를 해 버렸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린 시절과 지금은, 같은 인물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달랐다.

소문이라는 것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클라크와 미셸의 말이 주변에 퍼졌고, 그것은 점점 살이 붙더니 로만의 이미지를 완전히 반전시켰다.

사람들이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분이다. 그의 신뢰를 받는다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빈민가의 케빈이, 그리고 입성에 성공한 클라크 가족이 그를 증명한다.”

소문이 부풀었다.

그리고 때마침.

로만이 사병을 모집하겠다는 공고 글을 올렸다.

그건 결코 의도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이번 사병 모집에 지원하려는 걸세. 그러니까 포기해. 드미트리에서 몸 좀 쓴다는 사내들이 모두 지원하겠다고 난리니까, 괜히 심력 낭비하지 말고.”

노인이 말을 끝마쳤다.

사병 대란(大亂).

로만이 올린 글 하나에, 드미트리가 들썩였다.

노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던 루카스는, 기억의 괴리감에 혼란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아는 로만 드미트리는 이런 평판을 들을 녀석이 아닌데. 정말로 로만 드미트리가 완전히 달라진 건가. 블러드 팽의 토벌부터 시작해서 바르코의 사교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절반만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로만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릴 만큼 형편없는 녀석이 아니야.’

흥미가 돌았다.

로만 드미트리.

그에게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리고.

소문처럼 자신의 사람을 귀하게 여겨 주는 사람이라면, 루카스로서도 사병직을 고민해 볼 만했다.

‘문제는 세상에 그런 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건 직접 확인해 볼 문제.

일단은 구미가 당겼다.

시험을 보고 뒤늦게 발을 빼도 늦지 않은 문제이니, 재미 삼아 시험에 응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용병 일이 질리기도 했다.

모집 마감일까지 D-3일.

루카스와 같은 케이스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편견의 장벽을 무너트린 사람들로 인해, 시험 당일 수많은 사람이 드미트리 성으로 향했다.

사병 모집.

의도치 않은 소문으로 인해, 그것은 역대급 스케일로 커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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