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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615)

31화 모병 (4)

시험 하루 전날.

로메로 남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찻잔을 홀짝거리며 조나단 기사단장의 보고를 받았다.

“테스트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저희는 최소한의 통제 병력만을 지원할 예정이며, 테스트의 전반적인 진행은 로만 도련님이 맡아서 처리하는 것으로 얘기를 끝냈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예. 사병을 지원하겠다는 사람들로 인해, 아침 일찍부터 방문객의 수가 부쩍 늘었습니다.”

“그래?”

로메로 남작은 처음 계획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만 하더라도, 계획의 가능성보다는 사병을 육성하겠다는 생각 자체에 황당한 마음이 앞섰다.

‘로만이 내게 말했었지. 드미트리 가문의 병사가 아니라, 개인을 위한 사병을 육성하고 싶다고. 그것은 귀족의 세계에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야. 후계(後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 때, 한 아들에게 개인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선택이지.’

그러나.

로메로 남작은 흔쾌히 승낙했다.

드미트리의 장남보다는 둘째가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고, 30명의 병사에게 매달 8실버를 지급하는 것은 적지 않은 지출인데도 불구하고 로만의 목적조차도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최근에 로만의 행보는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로렌스 가문과 파혼을 해 놓고 바르코의 사교 파티에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로만 드미트리가 그간의 인맥을 활용해서 바르코와 협력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후계 구도. 차남을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바르코의 지지는 매우 매력적인 카드였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안토니 바르코가 말리는 데도 기사의 뺨을 날려 버렸다.

선을 넘었다.

안토니 바르코는 편협하고 속이 좁은 사내라서, 자신에게 굴욕을 선사한 로만에게 원한을 가질 것이 뻔했다. 직접 위협을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드미트리의 배경이 강력하다는 의미이나, 안토니 바르코로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도 로만에게 복수할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예를 들어.

후계 구도에 개입할 수도 있다.

로만이 아니라 차남의 편을 든다면, 내외부의 지지로 로만은 후계의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로메로 남작은 로만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십수 년의 세월을 드미트리의 얼간이로서 평판을 갉아먹은 로만 드미트리가, 블러드 팽의 사건을 시작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싶었다.

후계 구도에서 차남을 따라가기에는 그 격차가 크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래도 로만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하기를 바랐다.

아비의 마음.

아픈 손가락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둘째 아들은, 어차피 수도에서도 재능을 인정받는 그야말로 엘리트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로메로 남작이 말했다.

“그래서 지원자는 얼마나 되지? 50명? 100명? 로만의 평판을 생각한다면 50명만 넘어도 다행인 일이겠지. 한 가문이 아니라 개인의 사병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닐 테니 말이야.”

옳은 말이다.

개인의 사병(私兵).

사병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대로, 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주로 사용되는 역할은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직업이었다.

귀족 가문의 사병과는 다르다.

그래도 한 가문을 수호하는 명목으로 길러지는 병사들은 안정적인 직업으로 선호되지만, 개인의 사병은 상황에 따라 버림받기가 쉽다.

잘해야 50명.

로메로 남작의 예상이었다.

테스트가 사실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사병을 희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나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경비대에서 출입 목적을 파악한 것만 해도, 벌써 이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병 시험을 위해 드미트리를 방문했다고 밝혔습니다. 게다가 아직 시험 당일이 아닙니다. 지금의 기세대로라면, 당일에는 최소 오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테스트를 받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오백 명.

상상 이상의 인원에, 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로메로 남작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나 많이?”

문득.

아직도, 로만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로메로 남작이었다.

그 시각.

드미트리의 여관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여관 안에서, 루카스는 바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탁.

“크으.”

목 넘김이 예술이었다.

드미트리산 흑맥주 특유의 텁텁함에, 루카스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찬찬히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하루 전날부터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다니. 예상한 것보다 지원자가 더 많겠어. 문제는 단순히 지원자가 많다는 것을 떠나서, 생각보다 사병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다는 거야.’

이번 사병 모집.

일반 병사를 모집하는 일이다.

매달 8실버는 충분히 괜찮은 보상이라고는 하나, 자신과 같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들로서는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루카스가 지원한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리고 세간의 소문처럼 그가 정말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고로.

루카스는 특이 케이스였다.

대부분 평범한 일반인이 지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괜찮은 실력자들이 눈에 보였다.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내 세 명. 허리춤에 매달린 동색의 신분증을 보았을 때, 그들은 C급 용병일 가능성이 커. 그리고 바에서 나란히 술을 마시고 있는 녀석들. 용병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체격과 자세만 보더라도 싸움에 숙달된 녀석들이야.’

이곳 여관.

드미트리에 있는 수많은 여관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작은 공간에서도 5~6명의 괜찮은 지원자가 보일 정도라면, 지원자들의 수준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을 넘어서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용병의 세계에서 B급과 C급의 차이는 매우 컸고, 자신은 어딜 가더라도 대우를 받을 만한 귀한 존재였다.

루카스는 의문이 일었다.

대체 왜.

일반인들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나름 칼밥을 먹은 사내들조차도 사병을 하겠다고 지원한 걸까.

단순히 소문 때문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만으로 인해 클라크 가족의 인생이 변화하고, 바르코 가문의 기사를 엄벌할 만큼 케빈을 귀하게 여겨 주는 것은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결국 제일 중요한 가치는 돈이다.

매달 8실버의 돈은 무지한 사람들에게나 먹히는 값어치지, 자신과 같은 부류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제안이었다.

‘영문을 모르겠어.’

벌컥벌컥.

술을 마저 들이켰다.

그리고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루카스의 신경을 사로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헨더슨. 로렌스 가문의 병사가 되겠다던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두 사내의 대화.

루카스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사정은 이랬다.

헨더슨이라는 사내.

그는 로렌스 출신이었다.

로렌스는 바르코 가문과의 전쟁을 대비해서, 로렌스의 영주민들을 상대로 징집을 진행했다.

그로 인해 건장한 사내들은 대부분 징집에 응했다.

헨더슨도 얼마 전만 하더라도 당연히 로렌스를 위해 싸울 생각이었는데, 한 사건으로 인해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헨더슨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징집 대상자가 아닌데도 징집에 응할 생각이었어. 내 고향이고 삶의 터전인 로렌스가 망해 버린다면, 어차피 내 삶에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가 로렌스에서 블러드 팽을 토벌하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더라. 저게 바로, 진짜 지도자라는 걸 알았지.”

그날.

헨더슨은 광장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신세계였다.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자랐을 귀족 가문의 도련님이, 일반 평민들이 보는 앞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나타났다.

로만은 한 손으로 벤 마일즈의 머리채를 잡아서 질질 끌었다.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알기에, 일촉즉발의 상황에 헨더슨과 같은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로만은 벤 마일즈를 처단했다.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은 그날의 사건을 믿지 못했지만, 헨더슨은 당시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블러드 팽은 드미트리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추잡한 수작질로 드미트리의 영지민들을 나락에 빠트렸고, 그걸 방해한 나를 죽이려는 의도까지 보였다. 블러드 팽의 죄는 명백하다. 고로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악(惡)의 뿌리를 뽑겠다.”

로만은 말했다.

드미트리의 영지민들을 건드린 블러드 팽을 처단하기 위해, 로렌스까지 와서 검을 잡았다고.

피가 튀었다.

벤 마일즈의 머리가 날아갔다.

어린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지만, 헨더슨은 피가 튀기는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아아.’

전율이 일었다.

로만의 모습을 보라!

영지민을 위해 검을 드는 지도자!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니!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그때의 순간을 말하던 헨더슨은, 자신이 어째서 로만의 사병이 되기를 희망하는지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로렌스에 있었던 사건을 의심하고 부정해. 로만 드미트리가, 절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지. 하지만 난 직접 보고 느꼈어. 로만 드미트리는 세간의 소문처럼 약해 빠진 인간이 아니라, 정녕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투쟁해 줄 수 있는 지도자라는 걸. 그리고 이번 사병 모집은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나는 시험에 통과해서, 드미트리의 영주권을 얻고 로만 드미트리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어.”

바닥에 떨어졌던 평판.

그 위로, 새로운 이야기가 켜켜이 쌓였다.

블러드 팽 토벌.

클라크 가족.

케빈의 사건.

로만의 이름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하나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여러 사건으로 인한 시너지였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로만이라면.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충성심의 대가로 그만한 대우를 해 주고, 사람을 귀하게 여겨 주며, 블러드 팽과 같은 악의 무리와 맞선다고 할지라도 검을 뽑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지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가치가 8실버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로만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속에서 피가 끓었다.

이번 사병 대란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눈과 귀가 있다.

그렇기에.

서서히 로만의 진면목이 표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 * *

테스트 당일.

날이 밝았다.

수많은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시험장에, 루카스는 아직도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만약 내가 들은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때는 대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 거지?’

이 자리.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반신반의하면서 지원 의사를 밝힌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만의 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선택의 순간이었다.

진심으로 시험에 응할지.

아니면, 적당히 간을 보다가 빠질지.

평생을 최전방에서 뒹굴며 B급의 용병패를 얻었던 루카스는, 8실버라는 허접한 대가를 받으면서까지 인생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를 진심으로 고민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조건이다.

그러나 루카스의 감이, 그를 B급 용병으로 만들었던 감이 시험장으로 그를 인도했다.

시험장은 시끄러웠다.

최소 오백 명.

제재하는 사람이 없기에, 그 많은 사람이 시장 바닥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크하하하하하하.”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테스트가 끝나면 맥주나 한잔하러 가자고!”

그때였다.

누가 그만하라고 말하지도,

누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지도 않았다.

갑자기 소란이 사그라들었다.

한쪽에서부터 땅이 꺼지는 것처럼 사라지는 소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루카스도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시선을 옮기는 순간.

“……!”

숨이 턱 막혔다.

털이 삐쭉 섰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최전방.

그곳에서나 느낄 법한 극한의 긴장감이 살아나자, 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한 사내.

그의 모습에, 그의 걸음걸이에.

루카스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로만 드미트리.

그가,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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