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15)

36화 화덕의 불길 (1)

바르코가 성명문을 발표한 그 날.

로만은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바르코와 로렌스의 전쟁. 그 싸움에,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으로 개입할 생각입니다.”

우뚝.

로메로 남작의 몸이 굳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차를 들이켜던 그는, 사납게 변해 버린 눈빛으로 로만을 보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

“예.”

“알고도 그런 말이 나오더냐! 바르코와 로렌스의 전쟁은 중앙 정부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싸움이다. 네가 로렌스의 여식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면 사돈의 관계를 빌미로 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우리에게 아무런 명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단순한 변심으로 로렌스를 도울 생각이라면, 가문에 화를 입힐 수 있는 생각은 그만 멈추거라.”

탁!

찻잔을 강하게 내려놓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수염이, 로메로 남작의 분노를 드러냈다.

‘최근의 행보로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건만.’

전쟁의 개입.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앙 정부는 카이로 왕국에서 절대적이고, 특히 명분이 없는 싸움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다.

귀족의 세계란 그렇다.

일반인이던 시절에는 명분보다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하나의 영토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로만의 말처럼 바르코와 로렌스의 전쟁에 개입하는 순간.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드미트리와의 교류를 단번에 끊어 버릴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중앙 정부에서 드미트리를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나마 드미트리의 명성과 재력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걸 막 아주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위험한 선택이었다.

로만이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까?”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바르코의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건 단순히 변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바르코 가문의 장남인 안토니 바르코가, 저와 플로라 로렌스의 결혼을 시기 질투해서 모종의 사건으로 협박을 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날의 일을 증명할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드미트리야말로 동북쪽 일대의 실세라고 말하지만, 바르코는 우리를 이미 자신들의 발아래로 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만의 음성은 차분했다.

말을 내뱉는 속도는 적당했으며, 필요한 부분마다 강조해서 말했다.

묘했다.

자신의 아들이, 평생을 지켜본 로만 드미트리가.

로메로 남작의 심장을 옥죄는 묘한 분위기로, 방금까지 분노를 표출하던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켰다.

“아버지는 대장장이십니다. 겉으로는 귀족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시지만, 사실 힘과 재력을 보유하고도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도 만족하고 계시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아들인 저 로만 드미트리는 다릅니다. 저는 권력을 바라고, 앞으로 바르코가 아닌 그 누구라 할지라도 드미트리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묵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바르코가 없는 명분을 만들어서 영지전을 선포한 것처럼, 힘이 있는 자들에게 명분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새로운 삶.

아직도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도는 기분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백중혁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한결같았다.

군림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멀리 보지 않았다.

바다의 끝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상어와 같은, 눈앞의 적을 보았다.

그들을 무너트리리라.

상어의 지느러미를 뜯어 버리고, 그것의 살과 피로 취해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가문의 힘을 빌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하는 일을 지켜봤으면 하는 마음에 아버지에게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드미트리의 장자로서가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라는 개인의 자격으로 바르코의 분쟁에 개입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켜봐 주십시오. 지금부터 보여 주는 행보가, 앞으로 제가 살아갈 삶의 방식입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아버지의 지지까지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적어도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로만은 자신의 힘이 드미트리에서 비롯된다는 진실을 알았고, 그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인정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는.

로메로 드미트리,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했다.

“……크흠.”

로메로 남작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로만.

아픈 손가락이 하루가 다르게 불쑥 커 가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열망을 보이는 로만의 눈빛에, 로메로 남작은 자신이 말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로만은 개화(開花)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며 개처럼 살아가던 로만이, 본인이 야수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사실.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오리라고 꿈꿔 왔었다.

자신은 태생이 천하다.

결국, 작은 영토에서 만족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아들들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기를 바랐다.

침묵이 맴돌았다.

말없이 로만을 바라보던 로메로 남작이,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말했다.

“네 뜻대로 하여라. 그리고 내가 도와줄 것이 있다면 말해다오. 넌 나의 아들이고, 나 로메로 드미트리는 로만 드미트리의 아버지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책임을 네가 온전히 질 일은 없다.”

그걸로 충분했다.

아버지는, 로만이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 * *

아버지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계획대로 혼자만의 힘으로 처리할 생각이었으나, 도움을 받는다면 딱 하나 필요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구(武具)였다.

30명의 병사.

그들을 맨몸으로 전장에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돈과 같은 물질적인 것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비롯되기에,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로메로 남작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대장간의 마스터인 헨드릭을 찾아가거라. 내 부탁이라고 말한다면,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 줄 것이다.”

마스터 블랙스미스(black smith).

드미트리 가문의 상징이었다.

과거에는 로메로 남작이 대장간의 마스터로서 대소사를 모두 처리했으나, 그가 귀족의 작위를 받으면서 같이 일했던 헨드릭이 그 뒤를 이었다.

헨드릭은 카이로가 알아주는 명장이었다.

그렇기에 드미트리 가문의 마스터로서, 그는 모든 철제의 제작을 도맡아 담당했다.

한번은 만나고 싶었던 사내였다.

로만은 아버지와 헤어지자마자 곧바로 대장간으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카앙!

캉! 캉!

드미트리의 대장간.

그곳은 밤낮으로 돌아가는 열화(烈火)의 공간이었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근육이 꿈틀거리는 팔뚝으로 쇠붙이를 열심히 내리치고 있었고, 그러한 풍경이 사방에 끝없이 펼쳐졌다.

드미트리의 대장간은 카이로 왕국 최대 규모였다.

여러 명의 대장장이가 동시에 작업할 수 있는 공방을 하나로 분류하는데, 대장장이의 거리라고 불리는 공간에는 그러한 공방이 무려 30개나 존재하고 있었다.

대단했다.

드미트리가 어떻게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는지는, 이 공간을 보면 바로 의문이 해소되었다.

‘드미트리가 강한 이유는 재력이 본인들의 기술로부터 비롯된다는 거야. 영지 뒤편에 있는 철광산은 그 매장량이 왕국 최대 규모이고, 드미트리의 대장장이들은 직접 채굴한 철을 값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그렇기에 카이로 왕국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은 절대 드미트리와 척을 지려고 하지 않아. 단순히 드미트리의 재력을 무서워하는 것을 떠나, 카이로 왕국에서 드미트리산 철제 무기를 보급받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치명적인 문제니까.’

걸음을 옮겼다.

몇몇 대장장이들은 로만의 모습을 보았다.

드미트리의 장자가 대장간에 나타났으나, 그 누구도 먼저 로만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평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대해, 로메로 남작이 했던 말이 있었다.

“아들아. 드미트리의 대장장이들은 그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네가 드미트리의 성을 타고났다고 해서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일 부류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철을 볼 줄 알고 그것을 다룰 기술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대장장이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로만의 동생들은 대장간에 살았었다.

특히 차남은 후계의 욕심이 있었고, 마스터를 찾아가서 기술을 배우겠다고 말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그에 반해.

생전의 로만은 당연히 대장간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땀을 흘리면서 철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은 고된 노동이었고, 향락(享樂)만을 바라는 귀족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대장장이들의 냉대.

예상했던 일이었다.

로만은 말없이 걸었고, 마침내 목표했던 공간에 도착했다.

툭.

“나를 찾아왔다고?”

헨드릭.

까무잡잡한 얼굴의 중년이, 땀으로 젖은 얼굴로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님이 로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네가 왜 여기를 찾아와?”

헨드릭.

대장간의 마스터.

그는 인간을 두 부류로 판단했다.

호감이 가는 상대, 가지 않는 상대.

그리고 당연하게도, 로만 드미트리는 후자에 속하는, 그것도 ‘매우 싫어하는 상대’에 포함되었다.

‘이 녀석이 여기는 웬일이지.’

한때.

로만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대장간을 찾아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헨드릭은 로메로의 장남을 가르칠 열의가 있었으나, 매일 앓는 소리를 내면서 더러운 일을 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는 로만의 모습에 질리고 말았다.

만약 그 정도로 끝났다면 혐오하지는 않았겠으나, 헨드릭의 눈밖에 벗어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날.

로만은 돈이 필요했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금지당해 버리는 바람에, 그는 유흥비를 벌어 볼 명목으로 몰래 대장간을 찾았다.

그리고 가장 좋아 보이는, 헨드릭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검을 훔친 다음에 길바닥 상인에게 헐값에 팔아 버렸다.

당연히 헨드릭으로서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헨드릭은 로메로 남작이 보는 앞에서 로만을 사정없이 구타했고, 그때는 로메로 남작도 장자를 건드리는 것을 방관했다.

그날부터 헨드릭에게 로만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와 대화를 하는 것조차도 싫었다.

고로.

30명의 무장을 부탁하는 로만의 말에, 헨드릭은 당연히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있는 저것들. 저것 중에 알아서 챙겨 가. 그 정도면, 30명의 무장으로는 충분할 테니까.”

대장간 구석.

그곳에는 무기와 갑옷이 쌓여 있었다.

‘같은 철로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 좋은 무기와 갑옷이 되는 것은 아니지. 저건 수습 대장장이들이 만든 실패작이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어차피 좋은 철제를 판단하는 안목이 없어. 저런 실패작들을 들고 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서 웃을 녀석이지.’

로메로 남작의 부탁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로만을 위해 좋은 일을 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도 자신의 걸작을 잃어버린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로만의 뺨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딱 이 정도.

쓰레기 같은 물건을 넘겨주는 게, 자신이 로만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막말로.

로메로의 아들이니깐 이 정도라도 해 준다고 생각했다.

“저것들을 가져가란 말씀입니까?”

“그래.”

로만이 물건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자세히 볼 필요도 없었다.

헨드릭이 기억하는 로만이라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백중혁의 혼이 담긴 로만의 안목은 달랐다.

로만이 말했다.

“아버지는 제 병사들을 무장시킬 좋은 무기와 갑옷을 받아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게 헨드릭 마스터님의 최선입니까?”

“최선은 개뿔. 저걸로 만족하지 못하겠으면, 당장 대장간에서 나가!”

“헨드릭 마스터님.”

탁.

로만이 검을 하나 집었다.

그리고는, 하늘에 날을 비추더니 헨드릭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드미트리산 철제가 카이로 최고라는 명성은 허명인가 보군요. 이런 쓰레기를 병사들의 무장이랍시고 내놓다니.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이게 정말, 헨드릭 마스터님의 최선이라 생각하십니까?”

날이 선 반응.

그건, 헨드릭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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