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화덕의 불길 (2)
쓰레기.
장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에, 헨드릭의 눈썹이 홱 올라갔다.
“드미트리산 철제는 단언컨대 카이로 왕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그런데 대장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는 네가, 뜨거운 화덕 앞에서 땀방울을 흘려 보지도 않은 네가 감히 드미트리산 철제를 평가한단 말이냐!”
목소리가 높아졌다.
로만이 평가한 물건들.
드미트리에서는 하급(下級)으로도 쳐주지 않는 쓰레기들임은 맞다.
다만.
발언의 주인공이 로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헨드릭의 기억 속에서 로만은 갱생 불가의 인간이었고, 사적인 감정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 아버님이신 로메로 남작님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나는 네게 그 어떠한 것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너는 대장장이를 평생의 업(業)으로 삼은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이다. 네 동생인 로드웰 드미트리가 후계를 이어 가겠다고 내 밑에서 수년간 허드렛일을 할 때, 너는 길가에 나가 아낙네들의 하얀 피부를 탐내며 아무런 의미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바닥에 널브러진 저 물건들보다, 로만 드미트리 바로 너야말로 갱생 불가의 쓰레기라는 뜻이다. 저것들은 품질은 떨어질지언정 주인을 찾는다면 제 역할을 해내겠지만, 너는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으로서 그 어떤 것도 할 줄 모르는, 아니 할 수 없는 쓰레기다.”
신랄한 독설이었다.
드미트리의 근본은 대장간에 있다.
그것을 부정하고 도외시한 가문의 장남은, 피땀을 흘려 가문을 일군 일꾼들의 존중을 받을 수 없었다.
‘또 이런 상황인 건가.’
헨드릭.
처음 보는 사내다.
백중혁의 기억에는 없는 얼굴이건만, 그는 편견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로만 드미트리를 향해 분노를 토해 내고 있었다.
익숙했다.
로만 드미트리로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으나,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간에 처음부터 우호적인 감정을 보여 주는 사람은 없었다.
딱 한 명.
한스만은 예외였다.
한스는 로만에게 정성을 다했고, 그렇기에 특별한 이유 없이 그를 자신의 울타리로 들였다.
‘헨드릭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드미트리의 장남이라는 녀석이 대장간 일에는 관심이 없다가, 이렇듯 목적이 있을 때 찾아와서 평가질한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겠지.’
이해했다.
상대의 생각을.
상대의 마음을.
헨드릭의 분노는 너무나도 당연하였으나, 분노를 마주하는 로만으로서는 거슬리는 게 하나 있었다.
‘마스터 블랙스미스. 드미트리의 실세이자, 대장간을 총괄하는 장인. 그는 존중받아 마땅하나, 지금의 상황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얘기가 달라. 그는 내가 평가한 물건들이 쓰레기라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평가하는 대상이 로만 드미트리이기 때문에 화를 내고 있어.’
헨드릭과 자신.
둘의 관계를 떠나.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탁.
로만은 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주웠다.
그리고는, 밖으로 걸어가 햇볕에 검을 비추었다.
“헨드릭 마스터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검은, 단순히 햇볕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음영(陰影)이 생길 만큼 검을 만드는 과정에서 힘의 전달이 고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미숙한 대장장이가 망치질을 엉망으로 했기에 만들어진 결과물일 것입니다. 고로, 이건 드미트리산 철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헨드릭 마스터님도 그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쓰레기라는 단어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저를 비난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헨드릭 마스터님.”
말을 툭 끊었다.
로만은 허공에 검을 몇 번 휘두르더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헨드릭을 보았다.
“방금. 이 쓰레기 같은 검으로 적의 살을 베어 내지 못한 제 병사가 죽었습니다. 표면이 고르지 못한 날은 살을 깔끔하게 베어 내지 못했고, 근육에 박힌 검을 빼내지 못한 병사는 당황한 얼굴로 상대의 검에 목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쓰레기 같은 주군이 쓰레기를 주었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툭!
보란 듯이 검을 버렸다.
이번에는 갑옷을 들더니, 헨드릭에게 보여 주었다.
“헨드릭 마스터님은 갑옷을 왜 입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번이라도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다면, 갑옷은 그 육중한 무게를 감당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급한 이 체인 메일(chain mail)을 입은 병사는 믿었던 갑옷에 배신을 당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촘촘하게 얽혀 있는 철 조각들이 몸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었건만, 이름도 모를 대장장이가 만든 실험작은 적의 공격을 막아 주지 못했습니다. 구멍이 뚫렸고, 살이 갈라졌으며, 체인 메일 사이로 내장이 쏟아졌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아직도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까?”
사람들의 편견?
이해했다.
생전의 주인이 쓰레기같이 살았기에, 자신도 편견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헨드릭은 선을 넘었다.
개인적인 감정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몰랐다.
“저는 헨드릭 마스터님에게 제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와 방어구를 부탁했습니다. 만약 바닥에 널브러진 저것들이 쓰레기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저를 따르는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쓰레기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겼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단순히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보복할 문제가 아닙니다. 30명의 생명이 걸린 문제였고,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음에도 헨드릭 마스터님은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을 정녕 마스터 블랙스미스,드미트리를 대표하는 장인(匠人)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내준 저것들로 인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죽을 뻔했다는 말입니다!”
“……!”
헨드릭이 당황했다.
로만의 발언.
맞는 말이다.
하지만 헨드릭은 그런 상황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단순히 로만에게 좋은 물건을 내주고 싶지 않았고, 그로 인해 병사들이 죽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다!”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기와 방어구는 목적이 명확하고, 이따위 쓰레기들을 내주었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이 아니라, 제 아버님이신 로메로 남작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했습니다. 최대한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부탁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쓰레기들입니다.”
툭.
찰그락.
바닥에 널브러진 철제들을 발로 밀어 버렸다.
우수수 무너지는 철제들의 모습에, 헨드릭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알았다.
“이번 행동. 제 아버지에 대한 항명(抗命)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항명.
순간, 헨드릭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로만이 생각한 선.
헨드릭의 태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스터 블랙스미스는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을 막대할 만큼의 권력이 있는 위치지만, 로메로 남작의 이름을 등에 업고 찾아온 자신에게 ‘쓰레기’를 내주는 순간 로만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로만은 헨드릭을 존중했다.
그는 성실한 일꾼이었고, 가문에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헨드릭 마스터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에게 항명할 생각이 아니라, 단순히 저에게 좋은 물건을 내주고 싶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항명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헨드릭 마스터님. 저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고 마스터님을 찾아왔습니다. 개인의 부탁이 아니라, 이 땅의 주인이 저를 위해 좋은 무기와 방어구를 내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천마.
백중혁은 평생 군림하는 자로서 살았다.
다양한 인간들을 다스렸던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단 하나의 원칙만큼은 반드시 지켰다.
‘위계질서(位階秩序). 주군과 신하의 선이 모호해지는 순간, 그 관계로 인해 위계와 질서는 무너진다.’
충직한 신하도.
친구 같던 신하도.
신하로서의 선을 넘어서는 순간, 백중혁은 차가운 얼굴로 엄격한 벌을 내렸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헨드릭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아는데도, 선을 넘어 버리는 순간 로만은 상대에게 현실을 말했다.
딱.
여기까지.
로만은 헨드릭의 머리를 찍어 눌렀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제게 한 행동. 제 아버지에 대한 항명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항명이라니! 그건 절대 아니야!”
헨드릭이 발악하며 외쳤다.
마스터 블랙스미스.
그 칭호를 얻기까지 그는 수십 년을 일했다.
로메로 남작은 드미트리 가문의 주인이기 전에 그의 친구였고, 한때는 화덕의 불길 앞에서 같이 열정을 불태웠었다.
헨드릭은 장인으로서 로메로 남작을 존경했다.
지금은 귀족으로서 할 일들로 인해 대장간에 많이 들리지는 못하지만, 로메로 남작은 헨드릭이 인정하는 카이로 제일의 장인이다.
그렇기에.
헨드릭은 충성을 맹세했다.
대장장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로메로 남작이라면, 충성을 맹세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로만의 고성에 주변의 대장장이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했던 그들은, 이어진 로만의 발언에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항명이 아니라면 해명하십시오. 대체 왜. 제게 이따위 물건들을 내주신 겁니까?”
“이 새끼가.”
“감히 헨드릭 마스터님에게!”
대장장이들이 발끈했다.
새파란 애송이가 헨드릭을 다그치는 모습이라니.
분노가 폭발했다.
대장장이들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기세를 보였다.
기본적으로 우락부락한 체격의 사내 십수 명이 로만을 둘러싸자, 폭력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은 상황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블러드 팽과 같은 악독한 무리도, 드미트리의 대장장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대장장이는 힘을 쓰는 직업에다 칼과 같은 무기를 다루다 보니, 실제로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조직 자체가 와해가 되어 버린 사례가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로만의 태도는 평온했다.
대장장이들의 위협에 당황하지도, 그렇다고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헨드릭을 보았다.
대답을 바라는 그 모습에, 대장장이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감히 마스터님에게 대드는 꼴을 더는 지켜볼 수 없습니다.”
“일단 제압해!”
“예!”
헨드릭은 그들에게 하늘이다.
대장장이들이 일제히 달려드는 모습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헨드릭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멈춰!”
“……마스터님!”
“멈추라고 했다.”
헨드릭의 표정이 굳었다.
헨드릭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로만은 이와 달랐다.
철제를 알아보는 안목도.
자신에게 위계질서를 따질 배짱도.
그리고 대장장이들이 윽박지르는 상황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을 만한 담력도 없다.
그런데.
눈앞의 로만은 대담했다.
대장장이들이 달려들기 직전인 상황이었는데도, 로만은 한 걸음 물러섬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는 확실하다.’
헨드릭이 말했다.
“미안하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내 실수다.”
항명이라는 지적.
헨드릭이, 한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