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615)

39화 화덕의 불길 (4)

백중혁이 자신의 검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때는 18살.

아직은 마교의 후계 구도가 결정되지 않았을 시기에, 형제들 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으로 인해 백중혁은 피가 말리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보호해 줄 기반이 없었고, 매일같이 시도되는 암살에 뜬눈으로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손님이 찾아왔다.

11번째 형.

백창현은 백중혁을 죽이기 위해 암살을 시도했고, 하얀 달이 떠오른 밤에 형제간의 혈전이 벌어졌다.

전투의 양상은 박빙이었다.

백창현 또한 굴에서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이었고, 피가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집요하게 백중혁의 급소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둘의 신체적인 차이는 컸다.

백창현은 먼저 태어난 만큼 신체적인 우위를 보였고, 백창현의 공격에 백중혁이 그간 애지중지하던 검이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콰직.

한 번의 공방.

검이 부러지면서 치고 들어온 공격에, 백중혁은 가슴팍이 베이고 말았다.

피가 튀었다.

죽음의 공포가 코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백중혁은 대담하게도 가슴팍을 완전히 내주면서 부러진 검으로 상대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승리했다는 찰나의 기쁨.

희열로 가득 차올랐던 백창현의 얼굴이 끔찍하게 뭉개지면서, 백중혁은 피를 철철 흘리는 몸으로 상대의 목숨을 끊어 버렸다.

그날.

백중혁은 생각했다.

자신만의 검이 필요하다고.

전투 도중에 절대 부러지지 않을, 그리고 현재 자신의 신체 능력을 완벽하게 살려 줄 그런 검을 원했다.

11번째 형을 처리하고 독종으로 이름을 알린 백중혁은, 그날로부터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게 대장장이들을 찾아가면서 검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는 항상 결전의 순간을 앞두고 있을 때 현재 자신에게 걸맞은 검을 제작했다.

신체적인 특징, 현재 선호하는 검법의 특징과 같은 복합적인 것들을 계산해서, 자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검을 말이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백중혁은 정점의 자리에 올랐고, 나아가 무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백, 수천 번의 전투를 치렀다.

해마다 백중혁의 검은 바뀌었다.

백중혁은 자신이 새로운 검을 제작할 때마다 이전의 검을 수하들에게 물려주었고, 대대로 내려간 39자루의 검을 어느 순간부터는 천마(天魔)의 검이라 불렀다.

감히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

무림에 천마의 검이 풀리는 순간 그걸 차지하기 위해서 쟁탈전이 벌어졌을 정도로, 수많은 전투와 지나간 세월에 따라 발전한 백중혁의 제작 기술은 장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했다.

검을 만드는 행위.

백중혁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로만은 바르코와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고로.

첫 번째 검.

로만은, 백중혁으로서의 의식을 행했다.

내성의 대장간.

한동안 아무런 발길도 없었던 그 공간에, 강철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카앙!

불꽃이 튀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을 망치로 내리치는 로만은, 일정한 힘과 리듬에 따라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서 행했다.

일반인이 보면 참으로 지루한 시간이었다.

화덕에서 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강철을 때리는 소리만이 허락되는 공간에서, 로만은 뜨거운 열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땀을 흘렸다.

카앙!

카앙! 카앙!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

로만은 하나의 목적에 빠져드는 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자신의 반복되는 행동으로 인해 멋진 검으로 탄생하게 될 것이다.

과거의 수하들.

그들은 최초의 검을 제작할 때만 하더라도 백중혁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창고에 널린 것이 검이었고, 그것 중에 아무것이나 주워다가 쓰면 되지 않냐고 말했다.

막말로 검을 제작하는 데 쓸데없는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무공을 연마하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백중혁은, 단순하게 검을 제작하는 것을 떠나서 자신만의 세계에서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삶의 목적.

모든 것을 이루고 나서도 깨닫지 못했다.

천마를 아버지로 두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야 했고, 눈앞의 고비들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사람들은 그를 천하제일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인간이란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능에 따라 한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니 말이다.

지금도 같다.

로만의 삶은 익숙하지 않은 막막함이 있으나,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백중혁은 현실에 충실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

새로운 삶을 위해 파혼을 받아들였고.

블러드 팽의 위협에 그들을 토벌해 버렸으며.

안토니 바르코와의 악연을 정리하기 위해, 지금은 자신을 위한 검을 만들면서 출병을 준비했다.

백중혁.

그의 삶이었다.

단순히 군림하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망망대해에서도 눈앞의 현실에 충실했다.

‘지금의 내 경지는 모든 변수에 대항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환골탈태와 더불어 인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천마검법 초반부 3초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로만의 세상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변수들이 많을 것이다. 고로, 나를 더 단단하게 단련해야만 한다. 내가 모르는 세상, 내가 모르는 강적들.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내가 승자로 남을 수 있도록.’

포식자.

패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패배는 죽음을 뜻하기에, 백중혁은 항상 자신이 포식자로서 남기를 바랐다.

카앙!

강한 충격이 일었다.

뜨거운 불길에 로만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발가벗은 상의의 근육들이 꿈틀거리며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보통의 대장장이들은 작업하는 과정에 보호구를 필수로 입는다.

화덕의 열기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지만, 강철을 두드리다 보면 뜨겁게 달아오른 조각들이 튀어 오르면서 몸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헨드릭도 마찬가지였다.

대장간에서 만난 그는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작업에 임했건만, 지금 불길 앞에서 강철을 두드리는 로만은 하의 외에는 아무것도 입질 않았다.

그도 알았다.

이게 위험한 일임을.

하지만, 검을 제작하는 것은 현재의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기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무공을 수련하는 백중혁만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화르륵.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타올랐다.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뜨거운 열기에, 로만은 폐부를 활짝 열고 그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염화신공(炎火神功).

로만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염화신공.

뜨거운 불길의 힘을 이용해서, 단시간에 빠르게 마나를 쌓는 화마(火魔)라 불리던 마인의 무공이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두 가지의 심법은 공존할 수 없다.

천마신공을 사용하는 사람은 염화신공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나, 백중혁의 천마신공은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친화력(親和力)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로 인해 다른 심법과의 공존이 가능했다. 천마신공은 단전에 우직하게 자리를 잡아 모든 것을 총괄할 뿐, 그 밖에서 다른 힘들이 내부에 유입되더라도 주화입마와 같은 극단적인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공존.

열기를 빨아들였다.

뜨거운 불길이 천마신공의 자양분이 되도록, 단전에 차오르는 열기를 점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염화신공의 수련법은 보잘것없는 나로서 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 자주 사용할 경우 폐와 내부 장기들이 손상되겠지만, 그동안 환골탈태와 같은 방법으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지금으로서는 화덕의 불길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카앙!

카앙! 카앙!

망치를 힘껏 휘둘렀다.

검을 제작하는 행위.

화덕의 불길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로만은 차분하게 자신의 몸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 나가기 시작했다.

팔의 길이.

힘의 강도.

사용할 수 있는 기의 양.

차분하게 상태를 점검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검의 형태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지금 땀을 비처럼 쏟아 내면서 만든 검은 앞으로 1~2년 뒤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정확히 현재의 자신에게 걸맞은 형태였고, 로만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검이 제 역할을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단전에 마나를 쌓아 갔다.

지금까지 파악한 적들.

바르코와 그가 고용한 용병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사실 지금의 수준으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변수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분명히 정보 길드를 고용해서 파악한 바르코의 규모는 상식 안에 있으나, 그들이 로렌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준비를 했는지는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

무림에서는 삼 할의 실력을 숨기라고 말한다.

온갖 암수가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자신의 힘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기에 생겨난 말이다.

바르코.

그들 또한 삼 할의 힘을 숨겼을지도 모르고, 그러한 변수가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음을 로만은 알았다.

그렇기에.

모든 변수에 대항할 힘을 바랐다.

정파 무림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제갈세가의 두뇌들이 수많은 변수로 백중혁을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압도적인 무력은 그것들을 모두 와해시켜 버렸다.

상대의 전력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할 때는.

애초에 변수가 통하지 않을 만큼의 힘을 갖추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아직 이 세상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내가 경험한 사람 중에 제일 강한 사람은 조나단 기사단장이었고, 3성의 경지는 왕국에서 인정을 받는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4성의 검사, 5성의 검사, 나아가 6성의 검사도 있다. 그리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마법이라는 힘을 사용하는 미지의 존재들도 있지. 내가 조나단 기사단장을 압도적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미지의 존재들 또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은 없다.’

숨을 들이켰다.

마나를 빨아들이며, 강철을 강하게 내리쳤다.

카앙!

단련해야만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였기에.

자신이 세운 울타리에 한스와 같은 인물들이 살아가기에, 자신은 절대 패배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로만의 몸은 한 자루의 검(劍)이 되었다.

자신의 검을 스스로 제작하는 것처럼, 뜨거운 불길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육체 또한 강하게 단련했다.

그리고 열흘의 시간이 지났을 때.

툭.

마침내.

대장간의 망치질 소리가 멈추었다.

첫 번째 검.

사람에게 어떤 경우든 첫 번째는 특별하다.

로만은 햇볕에 검을 비추어 보았고, 빛이 매끈하게 타고 내려오는 검의 형태에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지금의 내게 완벽하게 적합한 검이다.’

제작 기간은 짧았다.

열흘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염화신공의 열기와 그간의 경험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수준의 검을 제작하는 것에 성공했다.

시중에서 파는 평범한 검이 아니라, 자신의 마나를 그 어떤 강철 덩어리보다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리고 신체적인 스펙에 따라 부합하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이 검이라면.

준비는 끝났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열기에, 로만은 검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너의 이름은 이 세상의 이름을 따서, 샐러맨더(salamander)라고 부르겠다.”

검을 거두었다.

이제는.

출병.

바르코를 향해, 자신의 이빨을 드러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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