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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42/615)

42화 로렌스의 꽃 (3)

연락은 마법 통신으로 이루어졌다.

허공에 떠오른 로만의 모습에, 플로라는 마주 앉으며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로렌스의 위기를 도와줄 방법. 그게 대체 뭐죠?”

빙빙 돌려서 묻지 않았다.

지금 밖에서는 로렌스의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있기에, 그녀로서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이유로 바르코 가문에게 복수할 생각입니다. 이미 결단은 내린 상태고, 지금부터는 언제 그 복수를 행할지 타이밍의 문제죠. 그래서 당신에게 연락한 겁니다. 만약 로렌스 가문이 제 계획에 동조하겠다고 말한다면, 그 타이밍을 앞당겨서 당신들과 같이 바르코 가문을 무너트려 주겠습니다.]

로만의 제안.

예상 밖이었다.

로렌스로서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제안이나, 플로라는 로만의 말에 함정이 있음을 알았다.

“……그 계획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죠?”

[간단합니다. 계획을 위해 희생해 주십시오. 로렌스 가문이 먼저 피를 흘리고 판을 깔아 주겠다는 의향을 밝힌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단 그 부분을 약속하셔야 합니다.]

희생.

예민한 단어였다.

순간, 플로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로만 드미트리는 정말 선이 분명한 남자였다.

자신과의 파혼을 선뜻 받아들인 것도 그렇고, 지금도 남이기에 본인이 절대 희생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로만이 내민 손길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로만의 존재는 플로라의 치부와도 같았고, 그와 관계를 계속 맺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다.

애초에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희생 정도는 당연히 각오해야만 했다.

‘아마도 우리의 상황을 알고서 제안한 것이겠지. 뻔뻔하게 희생하라고 말해도, 로렌스에게 그런 제안이라도 한 사람은 로만 드미트리가 유일하니까. 우리는 로만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존심은 버린 지 오래였다.

플로라에게 우선시되는 가치는 가문의 안전이었고, 그렇기에 로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할게요. 가문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도와줄게요.”

[하나 더. 당신이 약속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세요.”

[저의 참전으로 인해 후에 많은 논란이 생길 겁니다. 파혼했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없고, 이는 바르코 가문을 후원하고 있는 중앙 정부의 인맥이 문제를 제기할 만한 부분입니다. 고로, 앞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로렌스 가문이 진정으로 안전하길 바란다면, 제가 전쟁에 개입할 수 있도록 명분을 주십시오.]

명분.

그때까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로만의 설명에, 플로라는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대화는 끝났다.

아직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딱 30분만 기다리겠다는 로만의 말에, 플로라는 힘없는 걸음으로 성벽으로 향했다.

‘로만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정말 옳은 일일까.’

로만.

그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바르코 가문은 드미트리와 로렌스를 떼어내기 위해서 모종의 계획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술에 취한 사이에 바르코 가문의 방계인 에밀리 바르코와 한방에 있게 만들었고, 그것을 빌미로 파혼을 하라고 종용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들에게 복수하려는 개인적인 명분이고, 지금부터 당신이 제게 명분을 부여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안토니 바르코. 그가 당신을 추행했다고 주장하십시오. 그와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추행을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드미트리와의 혼인은 추진할 수 없었기에 파혼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아마도 그로 인해 당신의 가치는 땅바닥에 떨어질 겁니다. 로렌스의 꽃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명성은 꺾여 버릴 것이고, 파혼과 더불어 연달아 터진 사건은 귀족의 세계에서 매우 치명적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귀족의 여식으로서 많은 것을 포기한다면, 당신은 로렌스의 위기를 해결할 중요한 한 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손이 떨렸다.

플로라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겁쟁이처럼 시선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다.

냉정한 현실 앞에서, 플로라는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입니다. 저는 제 사람을 건드린 녀석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블러드 팽이 그러했고,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추행의 시기가 파혼하기 전이라면, 플로라 로렌스 당신 또한 내 사람입니다. 딱 그것 하나만 더 약속해 주겠다고 말한다면, 안토니 바르코가 다시는 당신을 욕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내 사람.

가슴이 철렁였다.

서로 이득을 위한 거래라지만, 로만은 파혼을 하지 않았다면 플로라가 자신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로만은 단순히 그런 명분만으로, 바르코와 적대하는 위험한 일을 벌이려고 했다.

쾅!

콰르르르릉!

“성벽이 무너졌어!”

“빨리 철책(鐵柵)을 날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성벽은 난리가 났다.

연속되는 플레어의 공격으로 성벽 일부가 무너졌고, 멀리서는 바르코의 병사들이 밀려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성벽의 이점을 상실한 상태로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상대가 되질 않기에, 로렌스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암담했다.

시선 곳곳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플로라는 일단 성벽으로 달려가서 병사들과 같이 화살을 쐈다.

퍽!

“커억.”

성벽 밑.

달려들던 병사 하나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플로라는 빠르게 화살을 하나 더 먹였고, 지난 며칠간 얼마나 연습했는지 손가락에서 아련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플로라는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을 거칠게 찢어 버리더니, 화살을 발사하기 편한 자세로 서서는 병사들에게 강하게 소리쳤다.

“공격해! 우리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플로라는 생각했다.

전장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귀족 여식으로서 삶은 끝나 버렸다고.

“헨델!”

하녀의 이름이었다.

겁을 먹은 얼굴로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에, 플로라는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지금 바로 로만 드미트리에게 연락해. 네가 원하는 조건이라면 무엇이든 해 줄 테니까, 당장 저 빌어먹을 바르코 자식들을 모두 처리해 달라고. 적어도 나는 안토니 바르코의 첩이 되고 싶지는 않아.”

결단을 내렸다.

지금부터는.

플로라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 * *

툭.

마법 통신을 끊었다.

플로라가 제안을 승낙했다는 말에,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크리스가 물었다.

“지금 바로 공격하실 겁니까?”

로만과 병사들.

그들은 로렌스와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지금이라도 명령을 내린다면 당장 도와줄 수 있겠지만, 로만은 그렇게 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우리는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는 로렌스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바르코는 플레어를 공성전에 동원했습니다. 그것의 화력은 로렌스의 힘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정말 로렌스를 도와 바르코의 계획을 저지할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적들의 후방을 공격해 숨을 돌릴 여유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적절한 조언이었다.

크리스는 병법을 공부한 경험이 있었고, 그렇기에 로렌스가 벼랑 끝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로만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왜 그런 거까지 생각해야 하지?”

“……예?”

“로렌스가 무너지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바르코의 병력이 로렌스를 덮친다고 할지라도, 결사 항전을 하는 로렌스는 최소 1시간 이상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로렌스와 바르코의 분쟁에서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이득을 얻는 것이다.”

잔인한 발언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양심(良心)을 완전히 배제한, 오로지 실리적인 이득만을 생각했다.

“크리스.”

“예.”

“앞으로 나를 따르면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수백의 사람이 죽는 것보다, 내 사람 하나가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번 일로 로렌스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능력한 사람을 따랐기에 생긴 문제고,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내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희생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두거라. 로렌스의 희생을 대가로 우리가 나서야 할 때, 그때는 피를 흘려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로만 드미트리.

다른 사람들에게는 잔인무도할지 몰라도, 그는 적어도 충성을 맹세할 가치가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 * *

성벽 위.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바르코의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에, 플로라는 로렌스 자작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버지! 지금 당장 성문을 열고, 정면에서 바르코의 군대와 맞서야 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성문을 열라니.

로렌스 자작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상세하게 설명할 여유가 없는 플로라로서는, 강한 어조로 아버지를 설득했다.

“방금 마법 통신으로 로만 드미트리가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우리가 바르코의 공격을 버틸 수 없는 이유는 플레어의 존재 때문이에요. 그러니 지금 성문을 열고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면, 그때 로만 드미트리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나서 플레어를 부숴 주기로 했어요.”

“로만 드미트리가 대체 왜?”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확실한 건, 로만 드미트리는 두말할 사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순간.

로렌스 자작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로만 드미트리.

블러드 팽의 사건으로 잠깐 보았던 그는 확실히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태도에는 당당함이 보였고, 플로라의 말처럼 일구이언(一口二言)할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가 로렌스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파혼을 이유로 악의를 가졌으면 몰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로렌스를 도와줄 이유는 떠오르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성문을 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딸의 설명대로라면, 로만 드미트리는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본인의 힘으로 도와주려는 생각일 것이다. 상대는 바르코 가문. 아무리 시선을 분산시킨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육성한 병력과 베르게 용병단의 정예들을 쓰러트리고 플레어에 접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리고 오라를 사용할 줄 모른다면, 플레어를 애초에 부서트릴 수도 없다.’

판단이 서질 않았다.

생사의 갈림길.

로렌스 자작은 나약했다.

전형적인 새가슴의 소유자였고, 위험한 상황일수록 그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능력을 갖추질 못했다.

그러자.

“아버지, 아니 아빠. 어차피 우리가 불리한 싸움이에요. 결사 항전을 택한 순간 우리는 이 싸움에 많은 것을 걸었고, 바르코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로렌스 가문은 카이로 왕국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날 믿어요.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을 받고 플레어를 박살 내는 것만이, 지금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플로라가 간절하게 말했다.

뒤늦게.

로렌스 자작은 플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상의에 걸친 갑옷은 화염으로 인해 검게 그을렸고, 치맛자락은 어느새 찢어져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활.

가주라는 사람은 나약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건만, 플로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왔다.

믿었다.

하나뿐인 딸을.

로렌스 자작은, 두려움을 이겨 내고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성문을 열어라! 로만 드미트리가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러니 성문 밖으로 나가, 바르코의 극악무도한 악인들을 처단하라!”

활짝 열리는 성문.

로만의 계획대로, 로렌스는 판을 깔아 주기 위한 희생을 택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