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615)

44화 참전 (2)

한때.

정파 무림의 사람들은 말했다.

“마교의 선두에는 항상 천마가 존재한다. 그의 공격을 한 번이라도 막을 수만 있다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교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정파 무림에는 희망이 없다. 정파 무림의 사람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천마는 무적(無敵)이며, 그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임을.”

무림 통일.

백중혁은 선두에서 마교를 이끌었다.

가장 먼저 적군과 검을 맞대었고, 백중혁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마교의 교도들이 미쳐 날뛰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대체 왜.

가장 위험한 역할을 자처하느냐고.

그때도, 지금도 이유는 똑같았다.

‘가장 강한 사람이 선두에서 적들의 사기를 완벽하게 꺾어 버려야 한다.’

싸움은 기세가 중요하다.

어두컴컴한 굴에서 자신보다도 큰 아이를 쓰러트리면서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던 것처럼, 백중혁은 살면서 기세를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았다.

강자의 역할은 후방에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정녕 수많은 적을 마주하고도 물러나지 않을 만큼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오히려 무력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것만이 승리를 위한 방법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서걱!

“크아아악!”

로만의 공격에 병사의 팔이 날아갔다.

비명을 지르는 병사는 황급히 도망가 보려고 했지만, 로만은 곧바로 따라가 그의 목마저 베어 버렸다.

푸확.

피가 흩뿌려졌다.

로만은 하늘에서 내리는 핏빛 비를 그대로 맞으며, 앞에서 벽을 형성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견고해 보이던 대형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나타난 로만의 존재에, 병사들은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일제히 창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카앙!

채채채챙!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로만은 자신을 노리는 공격을 전부 쳐 내 버리더니,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들의 머리를 베었다.

학살이었다.

다른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로만은 수십의 병사들을 홀로 상대하고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오히려 상대를 압도하면서 하나씩 눈앞의 적들을 정리해 갔다.

그 모습에 뒤따라오던 병사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들은 로만이 선두의 역할을 맡는다고 했을 때, 이 정도의 광경은 기대하지 않았다.

“주군을 따르라!”

“공격해!”

케빈.

그가 먼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케빈과 크리스가 로만을 따라 적들을 덮치자, 다른 병사들도 독기 어린 눈빛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푹!

“크르르륵.”

상대의 목을 쑤셔 버리는 공격에, 바르코의 병사가 피거품을 물며 무릎을 꿇었다.

케빈은 자신의 손에 사람이 죽었는데도 곧바로 다른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순간 로만이 멀어지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최대한 따라잡으려고 했다.

“이, 이런.”

“저 괴물을 막아!”

로만이 길을 열었다.

적들이 만든 방패 벽은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였고, 엉망으로 변해 버린 상황에 바르코의 병사들은 감히 달려들지는 못하고 소리만 질러 댔다.

그들도 알았다.

로만에게 먼저 달려드는 사람은 죽은 목숨이라는 사실에, 동료들의 등을 떠밀면서 제발 누군가가 기적을 일으키길 바랐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만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족족 상대를 베어 버렸고, 공방은커녕 일격을 받아 내는 사람조차 없었다.

피, 피, 피.

주변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으며 피가 강이 되어 흘렀고, 로만은 적들을 도륙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러자.

‘플레어.’

이번 계획의 목표물.

공성 병기의 모습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왔다.

로만의 활약.

주변을 압도하는 미친 존재감에, 베르게 용병단의 단장인 베르게가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이, 이게 무슨.”

상대.

로만 드미트리였다.

바르코의 임무를 맡으면서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파악해 둔 상태였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이 정도로 강한 줄은 몰랐다.

그가 여기에 왜 나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로만 개인의 무력이 수십의 병사들을 도륙할 정도로 압도적이라는 것이고, 만약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바르코와 로렌스의 전쟁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끝날지도 몰랐다.

‘그건 안 돼.’

이번 임무.

거액이 걸렸다.

베르게 용병단의 명운(命運)이 걸린 일이니만큼, 베르게는 검을 뽑더니 로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처리한다.’

베르게.

왕국에서 인정한 A급 용병.

단순히 잡일거리만 처리해도 획득할 수 있는 B급의 지위와는 다르게, A급은 오라를 사용하는 등의 특별함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베르게는 2성의 오라 검사. 벌써 40에 달하는 나이에 그 이상의 경지는 감히 바라지 않지만, 2성의 오라라면 로만을 쓰러트리기에는 충분했다.

화악.

콰르르르릉.

오라가 일었다.

전신에서 폭발하는 마나가 검을 매개체로 발현되었고, 베르게는 그대로 로만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일격필살.

승리를 장담했다.

상대가 설령 3성의 오라 검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필살기는 쉽게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카앙!

막혔다.

로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공격을 막았다.

그 광경에.

베르게가 눈을 부릅떴다.

‘이런 미친!’

전력을 다한 공격은 상대의 검을 부수고 그대로 살점을 갈라야 하건만, 검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에 당장 토사물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머리에서 다급하게 울리는 경고음에 베르게가 황급히 백스텝을 밟으려는 순간, 로만이 곧바로 따라붙으며 공격을 펼쳤다.

카앙!

카카카캉!

연계 공격.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로만의 검에서는 어느새 오라가 타올랐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공격으로 베르게를 궁지에 몰았다.

로만과 베르게.

오라의 크기가 달랐다.

외형으로는 베르게의 거대한 오라가 로만을 압도해야 정상이건만, 로만과 베르게의 검이 부닥칠 때마다 베르게의 오라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베르게는 그제야 알았다.

소문에 의하면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눈앞의 존재는, 감히 자신이 대적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이건 세도 너무 세잖아!’

후회는 늦었다.

이번 임무.

거저먹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테랑 용병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로만이라는 변수는, 애초에 계획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서걱!

번뜩이는 검.

베르게의 목에서 혈선이 그려지더니, 몸통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쿵.

베르게.

A급 용병인 그가 로만을 상대로 버틴 시간은 겨우 10초도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이었다.

베르게의 죽음.

대단한 성과다.

로만은 A급 용병을 10초 만에 무너트렸지만, 그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현세(現世)의 나는 천마가 아니다.’

천마였던 시절.

감히 공방을 주고받을 만한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백중혁의 일격에 정파 무림의 고수들이 우수수 무너졌고, 그렇게 백중혁은 무림 통일의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달랐다.

로만은 약하다.

빠르게 발전해서 베르게를 압도할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갈증이 사라지질 않았다.

화르르륵.

오라가 타올랐다.

정점에서 밑바닥으로.

일반인들은 자괴감을 느낄 만한 상황에, 로만은 오히려 새로운 도전에 대한 호승심이 끓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강자들.

이따위 몸뚱이로 그 모든 걸 제패한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로만이 나아갔다.

베르게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멈추질 않는 그 모습에, 바르코 자작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발악했다.

“죽여! 저 녀석을 죽이란 말이야!”

베르게의 죽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베르게와 로만이 싸우다가 한쪽이 죽은 것이 아니라, 베르게가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는데도 일방적인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만은 그 이전에 수많은 병사를 도륙한 상황인데도, 베르게와의 싸움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괴물.

압도적이었다.

로만의 움직임에 따라 길이 열렸고, 이대로라면 공성 병기가 부서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막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막으라고 소리쳤으나, 바르코 자작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몸은 점점 로만과 멀어졌다.

“위험합니다, 자작님!”

“일단 몸을 피신하셔야 합니다!”

바르코의 기사들.

그들이 바르코 자작을 끌고 갔다.

처음에는 힘을 합쳐서 로만을 제압하려고 했지만, 베르게가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생각을 바꾸었다.

아직은 바르코가 유리한 싸움이다. 성벽을 공격하고 있는 병력을 복귀시키면 병력의 수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에, 굳이 목숨을 걸고 로만과 싸우고 싶진 않았다.

길이 열렸다.

아무도 로만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로만은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고, 어느새 그의 앞에는 플레어가 존재했다.

‘플레어.’

무림에는 없는 마법의 산물.

발사하는 탄환이 수십 골드에 달하는 걸 떠나, 마법 탄환을 발사하기 위해서 특수하게 제작된 몸체 자체도 그 값어치가 상당했다.

그렇기에 이번 계획의 목표는 바로 몸체였다.

몸체를 박살 내 버린다면, 바르코로서도 원거리에서 로렌스의 성벽을 공략할 방법이 사라지게 된다.

‘천마신공.’

화르르륵.

마나를 일으켰다.

플레어의 몸체는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부술 수 없기에, 단전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일어나며 로만의 검에서 발현되었다.

검은빛의 오라.

그것은, 천마의 힘이었다.

‘천마검법 일초식.’

한 번의 공격.

한 번의 번뜩임.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검이 플레어를 갈랐다.

굉음이 일었고, 거대한 몸체가 그대로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압도적인 광경.

순간 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였다.

그때.

로만이 마나가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로렌스는 들어라! 나 로만 드미트리가, 바르코의 공성 병기를 파괴했다!”

그 말에.

전장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바르코의 병사들.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던 그들로서는, 후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방법이 없다.

고로.

로만의 발언은 현실을 말해 주었다.

공성 병기가 파괴되었다는 말에, 눈앞에 적을 두고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뭐, 뭐라고?”

“플레어가 파괴되었다고?”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플레어의 파괴는 단순히 공성 병기의 이점을 상실했다는 것을 떠나, 바르코의 후방이 위험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자 성문을 향해 밀고 들어가던 걸음이 멈추어졌다.

상황을 파악하던 바르코의 기사들은, 진짜로 플레어가 부서져 있는 모습에 황급히 후퇴를 명했다.

“후퇴하라!”

“모두 뒤로 물러나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바르코 자작.

그들의 주인이 위험했다.

로렌스를 함락하는 것보다 바르코 자작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들은 빠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상황은 순식간에 전개되었다.

바르코의 퇴각.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는 로렌스의 병사들은, 영문을 몰라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성벽 위의 플로라 또한, 경악한 눈빛으로 로만의 모습을 찾았다.

“……정말로 해내다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상황.

이번에도.

로만은, 플로라의 상식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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