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615)

46화 대전사 전투 (1)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대전사 전투.

가문을 대표하는 세 명의 검사가 각각 대결을 펼쳐, 2번의 승리를 거두는 쪽이 모든 영광을 차지하는 방식이다.

언뜻 들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전사 전투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섣불리 가문의 명운을 맡길 수가 없었다.

로렌스의 가신이 말했다.

“대전사 전투. 좋습니다. 우리가 승리한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것만큼 간단한 방법도 없겠지요. 문제는 세 번의 대결에서, 최소 두 번의 승리를 확보할 수 있을 만큼의 실력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상대는 바르코입니다. 중앙 정부에 연줄이 있고, 골든 뱅크에서 거액의 돈을 빌린 그들은 인맥과 재력을 바탕으로 어떤 고수를 초빙했을지 모릅니다. 대전사(代戰士)란 결국 인맥 싸움이고, 초반에 대전사 전투로 상황을 유도하려던 그들의 의도는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전사 전투는 반드시 가문의 사람이 나서라는 법이 없다.

보통은 외부의 고수를 초빙하는 경우도 많기에, 로렌스는 그러한 변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가문의 전력 차이도 심했다.

바르코는 드미트리와 마찬가지로 3성의 기사를 한 명 보유하고 있지만, 로렌스는 2성의 기사 하나가 전부였다. 드러난 전력에서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리고.

“로만, 당신이 도와준 덕분에 바르코는 공성 병기가 파괴되었습니다. 바르코로서는 로렌스의 성벽을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해집니다. 이건 시간의 문제입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농성(籠城)을 택한다면 로렌스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성문을 열고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이는 순간 상황이 어떻게 반전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대전사 전투는 재앙입니다. 만약 바르코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렌스의 토지를 보상으로 바란다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순순히 땅을 내주어야만 합니다.”

다른 가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변수였다.

드디어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는데, 괜히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여 상황을 망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해했다.

로렌스의 판단은 상식 안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초식 동물인 것이고, 비옥한 토지를 보유하고도 단 한 번도 포식자로 살지 못했다.

로만이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승리한다는 확신만 있다면 대전사 전투만큼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그 확신을 드리겠습니다.”

3번의 대결.

3번의 승패.

세 명의 존재가 강조되는 싸움이지만, 대전사 전투는 결국 2명의 실력자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바르코와 로렌스. 상대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르코는 3성의 검사, 그리고 외부의 고수를 필승 카드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플레어를 대여하면서 금전적인 지출이 심한 바르코로서는, 세 명을 모두 완벽하게 준비할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는 누가 있습니까?”

사람들의 머릿속.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제가 로렌스를 대표해 첫 번째 주자로 나서겠습니다. 상대가 바르코의 기사든, 아니면 외부의 고수든. 저는 반드시 1승을 확보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질 테고, 2번째 대결에는 실력자를 내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대전사 전투는 눈치 싸움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를 보유했다 할지라도, 1번을 이기고 2번을 패배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세 번째 대결. 제 사람인 크리스가 마무리할 겁니다. 만약 상대가 3성의 오라 검사를 마지막에 내보낸다고 할지라도, 크리스는 충분히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실력자입니다.”

로만의 말.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완벽한 작전은 아니었다.

만약 로만이 미지의 실력자에게 패배한다면, 더 볼 것도 없이 승부는 그 자리에서 끝날 것이다.

“제가 패배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로만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바르코의 후방을 공격해 베르게의 목을 베어 버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표출했다.

승리할 것이다.

로만의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1승을 확보했습니다. 이 정도면 꽤 승산이 있는 싸움이지 않습니까?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적절하게 대진표만 잘 맞춘다면, 우리는 대전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바닥에 추락했던 로렌스의 명예를 복구할 수 있습니다. 더는 설득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고, 지금부터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플로라.

이번 사건으로 인해, 회의실에서 그녀의 발언권은 힘을 얻었다.

로만은 달변가였다.

항상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현실을 과감하게 지적하며 상대의 동의를 끌어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렌스의 가신들을 침묵에 빠트리는 모습에서, 플로라는 문득 마법 통신에서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간단합니다. 계획을 위해 희생해 주십시오. 로렌스 가문이 먼저 피를 흘리고 판을 깔아 주겠다는 의향을 밝힌다면, 로만 드미트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데 전력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단 그 부분을 약속하셔야 합니다.]

그때 했던 말.

로만은 ‘로렌스의 희생’을 바랐다.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로렌스가 피를 흘리고 판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로렌스를 위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에도 로만은 로렌스의 희생을 강요했다.

‘위험한 사람이야.’

로만의 계획에는 허점이 있었다.

만약.

바르코가 로만을 쓰러트릴 만큼의 고수를 고용하거나, 아니면 세 명 다 외부의 고수를 초빙한다면.

로렌스의 필패다.

경우의 수 중에서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고, 그때는 로렌스로서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희박하다.

바르코가 플레어를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은 것은 금전적인 소모가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 또한 이번 일에 전력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딱 2명.

2명의 필승 카드를 준비하는 것이 바르코의 최선이다.

실제로 그게 사실이라면, 로만의 말처럼 적절한 대진을 통해 큰 피해 없이 바르코를 쓰러트리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로만은 지금 우리에게 달콤한 말로 속삭이고 있어. 베르게를 쓰러트린 자신과 같은 고수가 대전사로 나서 줄 테니, 혹시 모를 변수는 로렌스가 감당하라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농성을 택한다면 우리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 방법은 로렌스를 퇴보시키는 선택이 될 것임에는 분명해. 바르코와 로렌스, 두 가문 모두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로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승리한다면, 피해는 최소화할지라도 승리의 영광은 로렌스가 아니라 모두 로만에게 돌아갈 거야.’

입맛이 썼다.

로만은 여우였다.

로렌스가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본인이 유리한 판으로 만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보기 위해.

로만은 굳이 검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속내가 보이니까 신뢰가 가는 아이러니라니. 정말, 로만 드미트리는 빌어먹을 녀석이야.’

도움을 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함?

잠시뿐이었다.

로만의 말처럼.

이건 거래였다.

로만의 이득을 위해, 로렌스의 이득을 위해.

서로 타협할 뿐이었다.

플로라가 말했다.

“저는 대전사 전투에 찬성합니다. 전쟁을 빠르게 끝낼 방법이 있다면, 도박이라 할지라도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만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따라 주는 것.

그것이, 플로라가 로만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가였다.

* * *

그 시각.

바르코 가문은 난리가 났다.

“로만 드미트리, 그 개자식이 왜 나타나! 대체 무슨 명분으로 우리의 일을 방해한단 말이냐! 으아아아악!”

퍽!

콰쾅!

얼굴이 분노로 달아오른 바르코 자작이 막사의 물건들을 모두 때려 부쉈다.

책상을 엎고.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

한동안 내면의 폭력성을 드러냈는데도, 바르코 자작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후욱, 후욱.”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의자에 주저앉아 막사의 회색 천장을 바라보니, 뒤늦게 바르코의 현실이 보였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플레어를 파괴하면서 우리는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방법이 사라졌다. 베르게 용병단은 단장의 죽음으로 전쟁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그렇다고 다시 플레어를 대여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골든 뱅크에서 빌리고 남은 돈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것. 그걸 사용하고도 계획이 먹히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끝이다.’

암담했다.

로만 드미트리.

그가 베르게의 목을 베던 순간이 떠올랐다.

압도적이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에 조잡한 계획이라고 생각했건만, 로만의 검이 번뜩이자 십수 명의 병사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학살을 당해 버렸다.

그리고 호기롭게 달려들던 베르게의 모습.

헛된 희망을 걸었던 바르코 자작은, 카이로 왕국에서 인정한 A급 용병이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자신의 머릿속으로는, 로만의 무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 바로 대전사 전투. 하지만 로렌스로서는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겠지. 이미 승기를 확보한 상황에서, 굳이 위험한 도박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입이 바짝 말랐다.

머리가 꽉 막힌 느낌이었다.

어떻게 할 방법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막사의 문이 펄럭이며, 병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쳐 들어왔다.

“영주님! 로렌스가 전령을 보냈습니다!”

바르코 자작은 생각했다.

어차피 벼랑 끝이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건방지게 전령을 보낸 로렌스에게 전령의 머리만 잘라서 보내 주겠노라고.

보통 전령은 살려 주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건만, 바르코 자작은 분노에 눈이 멀었다.

그런데.

전령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렌스는 바르코에게 대전사 전투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대전사 전투.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바르코 자작은 가까스로 웃음을 억눌렀다.

방금까지 어떻게 대전사 전투로 유도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설마 먼저 제안해 올 줄은 몰랐다.

‘로렌스가 제 무덤을 파는구나.’

상대는 몰랐다.

바르코의 수를.

골든 뱅크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돈을 빌려주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돈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 남겨 두었다.

만약에. 로렌스가 끝까지 대전사 전투를 받아들이지 않고 농성을 택했더라면, 바르코 자작은 그 돈을 다시 한번 플레어를 대여하는 방향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대가 미끼를 물었다.

로만의 존재는 걱정하지 않았다.

로만이 보여 준 무력은 분명히 압도적이었으나, 바르코 자작의 계획은 상식을 벗어난 필승(必勝) 전략이었다.

그렇기에.

일단은 고민해 보겠다면서 전령을 돌려보낸 그는, 곧바로 수하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그’에게 연락해! 계약금을 보내 줄 테니, 우리의 대전사로 나서 달라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끝이 보였다.

단언컨대, 대전사 전투는 2번의 대결 안에 승부가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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