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615)

49화 대전사 전투 (4)

앞선 크리스의 승리.

충격적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얀손의 머리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그래도 천재 검사라고 불리는 크리스였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크리스는 조나단의 제자이지 않은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조나단의 가르침이 있었다면 무조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번 대결이었다.

크리스와 얀손의 대결은 어떻게든 논리를 끼워 맞출 수 있었으나, 차갑게 식어 가는 호메로스의 시체에 사람들은 사고 회로가 정지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호메로스는 단순히 강자라는 단어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4성의 영역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랭킹에 올랐을 정도의 대단한 실력자이며, 지금은 마의 30위를 넘보는 그야말로 카이로의 신성이다.

그가.

죽었다.

4성의 오라는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로만의 일격에 검과 몸뚱이가 동시에 갈라지며 피를 뿜어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로만 드미트리.

당연히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호메로스라는 사실을 알고도 기권하지 않은 것은 객기였을 뿐이고, 그가 승리하리라고는 단 1퍼센트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승패가 갈리는 중요한 대결이었다는 사실을 떠나, 눈을 껌뻑이며 이것이 정녕 현실인지를 수차례 확인했다.

단 한 사람.

로만만큼은, 눈앞의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절정에도 오르지 못한 녀석이 오만을 떨다니.’

호메로스.

그의 오라는 강했다.

로만이 샐러맨더 대륙에서 경험한 사람 중에는 가장 강한 존재였으나, 로만의 평가 기준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전생에 있다.

기라성(綺羅星) 같은 고수들이 즐비한 무림. 천마 백중혁으로서도 방심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그곳과는 다르게, 이곳의 심법은 비효율적이고 쓰레기 같았다.

호메로스의 일격.

사람들은 극성으로 발휘한 오라에 감탄했다면, 로만은 줄줄 새어 버리는 기의 분출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서.

대결을 끝내 버렸다.

자신의 승리임을 알았기에.

호메로스는 로마의 상대가 되질 않았고, 뜨겁게 달아오르던 승부욕은 단번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로만이 말했다.

“심판관님. 결과를 선언해 주십시오.”

그제야.

사람들은 현실을 깨달았다.

크리스에 이은 로만의 승리.

3전 2선의 대결에서, 로렌스 가문은 벌써 승자의 자격을 확보했다.

꿀꺽.

크리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로만과 호메로스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그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이게 주군의 진짜 실력이구나.’

사실 그로서는 로만의 실력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처음 대련을 했을 때.

그때의 로만은 분명히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다.

오라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오로지 검술로만 상대하는 상황에서 로만에게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이후에는 진실을 알았다.

로만은 다른 방식으로 마나를 다루고 있었으며,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리는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사실을.

문제는 그 수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쓰러트리는 정도가 그의 한계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은 로만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병사 십수 명을 도륙했을 때.

납득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로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2성 검사인 베르게의 목을 단번에 날려 버리고, 플레어를 부서트렸을 때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마지막으로.

호메로스를 압도했다.

호메로스가 방심해서 4성의 오라를 발휘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3성의 오라를 극성으로 발휘한 호메로스를 검과 함께 두 동강을 내 버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장면.

로만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크리스로서도, 상식을 파괴해 버리는 상황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군은 나와 대련했을 때부터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와 대련한 이후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던 걸까? 어떤 것이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 전자라기에는 그때의 주군은 분명히 호메로스를 압도할 만한 실력자가 아니었고, 후자라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실을 감히 예상할 수조차 없었다.

약 2개월 정도.

범인(凡人)들은 1성의 오라조차 발현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로만의 기준에서는 달랐다.

크리스를 쓰러트리고.

로만은 차례로 자신을 발전시켰다.

환골탈태를 진행하고.

염화신공을 발휘해, 크리스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무림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였다.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천마 백중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로만의 성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후우.”

숨을 크게 내뱉었다.

얀손을 상대로 승리하고.

크리스는 어쩌면 로만의 벽을 넘어설 날이 금방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로만의 진짜 실력을 확인한 지금, 크리스는 경외심과 더불어 왠지 모를 답답한 마음이 일었다.

‘어쩌면 내 다짐이 섣불렀는지도 모르겠군.’

주군을 넘어설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다던 생각.

지금에 와서야, 크리스는 그게 얼마나 섣부른 판단이었는지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

대결은 끝났다.

로렌스의 승리.

더 볼 것도 없지만, 대결을 주관하는 에르테스 백작으로서는 마지막까지 대결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대전사 전투는 3번의 대결을 끝까지 진행해야만 한다. 승패가 이미 결정이 난 관계로, 양측은 상의하에 새로운 대전사를 내보내도 좋다.”

패자를 위한 관용(寬容)이었다.

패배가 확정된 싸움에 굳이 인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기에, 바르코에게 실리와 자존심 중 하나를 택할 기회를 주었다.

에르테스 백작의 말에도.

바르코 자작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호메로스가 피를 뿜으며 쓰러진 그 순간부터, 바르코 자작은 마른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끝났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로렌스와의 분쟁.

그것을 위해 바르코는 사력을 다했다.

일부러 문서를 조작해서 로렌스와 싸움을 유도했고, 중앙 정부의 인맥을 활용해서 에르테스 백작을 불러들이는 등의 과정을 위해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썼다.

그 돈은 바르코의 것이 아니었다.

비옥한 토지를 가진 로렌스와 철광산에서 돈을 찍어내는 드미트리와는 다르게 바르코는 그리 부유한 가문이 아니었고, 전쟁을 위한 모든 자금을 골든 뱅크에서 신용을 담보로 빌렸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신용 대출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담보로 하지 않는 대신에, 엄청난 이자가 곧 바르코에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째서 호메로스가 패배할 수가 있지? 호메로스는 4성의 검사다. 동북쪽 일대의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게, 왕국을 떠돌며 강자를 상대해 온 진짜 검사란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패배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아. 이건 분명히 용병 길드의 음모다. 그들은 호메로스가 아닌 녀석을 위장해서 내게 보낸 것이고, 그렇기에 그 가짜 녀석은 드미트리의 얼간이를 이기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현실을 외면했다.

믿지 않았다.

자신이 치를 대가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기에.

불안하게 떨리는 바르코 자작의 눈동자는, 호메로스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현실이 아니라고 믿었다.

“……영주님. 저희 측 대전사를 내보내야 합니다.”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2성의 기사가 3번째 차례를 맡기로 했다.

하지만 바르코의 대전사가 2번이나 죽임을 당한 지금, 그들로서는 기사를 희생시킬 수가 없었다.

실리와 명예.

바르코 자작은 양자택일의 상황에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까지 잃을 수는 없다. 그를 대신해 벤슨을 내보내거라. 사교 파티에서 바르코의 명예를 떨어트렸던 녀석이니만큼, 이번 대결에서 그것을 만회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기사가 살짝 굳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버리는 패였다.

죽으라는 의미와 같았고, 벤슨으로서는 대전사 전투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지난 사교 파티.

벤슨은 케빈과 시비가 붙었던 기사였다.

드미트리를 우습게 보는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문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로만에게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말았다.

그때의 사건은 귀족들 사이에서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드미트리와 바르코의 차이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고, 벤슨은 그 책임으로 징계를 받고 강등을 당했다.

그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바르코의 기사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리는 패라는 사실을 알고도 대전사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바르코의 벤슨이다.”

마지막 대전사.

벤슨이 앞으로 나서자, 로렌스의 진영에서 소란이 일었다.

벤슨은 무(無)성 기사다.

세 번째 차례로 예정되어 있던 로렌스의 기사로서는 무조건 승리할 수 있는 상대였는데, 그가 나서기 전에 한 인물이 불쑥 튀어나왔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왜소한 아이.

어울리지도 않는 투구를 눌러쓴 그는, 로만을 올려다보며 결심을 내린 표정을 보였다.

케빈이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존재에, 로렌스의 기사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 병사가 어느 자리라고 함부로 나서는 것이냐! 상대가 비록 무성 검사라 할지라도,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대전사 전투는 로렌스의 명예를 건 신성한 자리다. 로만 도련님의 얼굴을 봐서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줄 터이니, 어서 뒤로 물러나거라.”

케빈의 돌발 행동.

군법(軍法)에 따르면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로렌스의 기사는 옳은 말을 했으나, 그가 따르는 로렌스의 주인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알았다.

로렌스 자작도.

플로라도.

대전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로만 드미트리에게, 케빈의 청을 받아 줄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슥.

로만이 케빈을 내려다보았다.

‘어리석은 녀석.’

미련했다.

최근에 케빈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건장한 성인 검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케빈은 싸우겠다고 말했다.

벤슨에게 당했던 것을 갚아 주기 위한 선택인지, 아니면 자신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다녀오너라.”

로만은 케빈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힘없이 패배한 사람의 권리는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다.

사교 파티에서의 사건.

사람들은 로만이 수하를 위해 멋지게 복수했다고 떠들어 댔지만, 그 이면에는 주군이 모욕당하고도 말없이 얻어맞기만 했던 나약한 수하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케빈은 크리스가 아니었고, 겨우 소년병이 무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케빈은 반드시 나서야만 했다.

로만의 곁에 머무르며, 그는 로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았다.

케빈이 말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사나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모습에, 로렌스의 사람들은 케빈의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