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 (1)
소문은 정말 빨랐다.
로렌스가 바르코를 쓰러트렸다는 충격적인 소식.
동북쪽 일대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일 때면, 자연스럽게 로렌스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말했다.
“참, 바르코로서는 답답하겠네. 그 난리를 피웠는데 로렌스에게 패배해 버리다니.”
“그런데 그게 정말 사실이야? 로만이 홀로 적의 후방을 공격에, 수백의 병사를 단번에 도륙해 버렸다던데.”
“당연히 사실이지! 너도 내 친척들이 로렌스 토박이인 거 알지? 그 친척들한테 들었는데, 성벽 위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바로는 로만은 그야말로 로렌스의 구세주처럼 나타났다고 했어. 당장 성벽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홀로 적의 후방을 공격해 바르코의 병사들을 도륙해 버렸어. 게다가 플레어까지 파괴해 버리면서 분위기를 완전히 반전시켜 버렸지. 만약 로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바르코는 진즉에 로렌스의 땅에 깃발을 꽂았을걸?”
소문은 진실과 허구가 뒤섞였다.
마치 대대로 내려오는 영웅담(英雄譚)처럼.
두 사내가 떠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북쪽 일대의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로만의 업적을 찬양했다.
“이번 전쟁은 로만 드미트리로 시작해서 로만 드미트리로 끝났어. 이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만 아는 얘기인데, 선봉장이었던 크리스가 1승을 확보할 때만 하더라도 로렌스의 사람들은 이대로 승리하는 줄 알았대. 그때 누가 나타난 줄 알아? 바로 카이로 왕국 49위의 랭커인 호메로스가 바르코의 대전사로 나왔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순간 로렌스의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버렸지. 그리고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이번만큼은 로만이 기권을 선언하고 목숨을 보존하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비장한 표정을 보였다.
어깨를 쫙 펴며, 본인이 로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로만 드미트리, 아니 영웅의 판단은 달랐어. 당당하게 대전사로 나서겠다고 선언했지.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한 번의 공격에 호메로스의 머리를 날려 버렸어. 하늘에 붉은 피가 촤악하고 흩어지는데……. 캬아! 그야말로 명장면이었지. 공성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로만 드미트리가, 이번에는 대전사 전투의 종지부를 찍어 버린 거야.”
“……그런데 넌 현장에 없었다며.”
“아니, 내 친척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는 의미지. 하여튼 각설하고, 로만 드미트리는 우리가 알던 그 드미트리의 얼간이가 아니야. 봐 봐. 블러드 팽을 토벌하고, 바르코에서 자신의 수하를 위해 기사의 뺨을 날려 버리고, 이번에 로렌스의 사건까지. 그는 영웅이야. 드미트리가 꼭꼭 숨겨 두었던 잠룡이 마침내 하늘로 승천해서, 본격적으로 본인의 영웅담을 하나씩 쌓아 가는 거라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로만의 행보.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다.
길거리에 뛰쳐나온 아이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역할로 영웅 놀이를 할 정도로, 소문은 거세게 퍼져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전사 전투.
로렌스는 3번의 대결에서 3번을 이겼다.
로만의 임팩트가 워낙 대단하기는 했지만, 나머지 2번의 대결 모두 로만의 사람이라는 건 중요한 포인트였다.
“영웅은 정말 인복(人福)마저 타고나는구나. 드미트리의 천재 검사인 크리스는 2성의 경지로 3성의 얀손을 쓰러트렸고, 소년병처럼 보이던 아이도 바르코의 기사를 완전히 난도질을 해 버렸잖아. 이번 대전사 전투에서는 로렌스의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서지 않았어. 로만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전사를 자처했고, 그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로만을 향한 충성심을 증명해 냈지. 앞으로 아주 난리가 나겠구먼. 동북쪽 일대에서 오랜만에, 세상을 놀라게 할 인재가 탄생했어.”
플로라의 예상은 옳았다.
이번 전쟁.
로렌스는 많은 희생을 대가로 승리를 쟁취했지만, 승리의 영광은 모두 로만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승패가 갈리는 싸움.
상처를 입을지라도 승자로 남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로렌스의 사람들은 모르지 않았다.
* * *
끝났다.
다른 단어로는 지금의 상황을 표현할 수 없었다.
패잔병(敗殘兵)이 되어 가문으로 복귀한 바르코 자작은, 눈앞에 들이닥친 현실에 절망하고 말았다.
“하아.”
책상 위.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내용은 뻔했다.
골든 뱅크에서는 영지전의 패배로 앞으로 원금을 어떻게 갚을 것인지에 물어보았고, 카이로 용병 길드는 호메로스의 죽음에 분노하며 위약금을 요구했다.
살짝 확인해 본 용병 길드의 논리는 참으로 황당했다.
대전사 전투의 의뢰 당시 로렌스는 분명히 2성의 기사만을 보유한 가문이라고 말했기에, 변수에 대한 책임을 바르코에게 떠넘겼다.
한마디로.
바르코를 완전히 깔보았다.
이번 패배로 바르코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다들 뭐라도 챙기려고 혈안이 되었다.
“거지 같은 새끼들.”
씁쓸했다.
바르코를 무시하는 것은 둘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면 파티라도 열어 줄 것 같았던 우호 세력들은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부는 드미트리에게 붙었다는 말도 있었다.
차가운 현실이었다.
분명히 바르코가 동북쪽 일대의 실세로서 명성을 떨쳤을 때는 하루가 멀다고 바르코를 찾았던 녀석들이, 이렇게 안면을 몰수하는 행태가 참으로 혐오스러웠다.
모르진 않았다.
이해관계로 얽힌 세력들의 진실을.
바르코 자작 또한 박쥐처럼 살아온 인물이지만, 본인이 벼랑 끝에 몰리자 웃으며 넘길 수가 없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패배의 책임이 어깨를 짓눌렀다.
막막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빚을 갚을 자신도,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다시 재기해서 일어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승리를 확신하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빌어먹을 로만 드미트리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바르코는 금의환향하며 승리의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이건 모두 로만 드미트리 때문에 생긴 일이야. 로만은 이번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없는데도 나타났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망쳐 버렸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명분이 중요한 귀족 사회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어.”
로만.
모두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바르코 자작은 생각했다.
벼랑 끝에 몰린 바르코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로만의 존재를 물고 늘어져야만 한다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일한 희망.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바르코 자작은 동북쪽 일대 귀족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아직은 연락 정도는 받아 줄 귀족들.
그들은 바르코 자작의 연락에 난색을 보이면서도, 간곡한 부탁에 단 한 번의 만남은 허락해 주었다.
며칠 뒤.
바르코 가문에 귀족들이 모였다.
만약 과거의 위상이었다면 친 드미트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석 의사를 밝혔겠지만, 원탁의 테이블에는 겨우 열 명도 되지 않는 귀족들이 자리했다. 암담한 현실. 가세(家勢)가 기우는 것이 눈에 보이는 장면이었지만, 바르코 자작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렇게 바르코를 찾아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진정한 귀족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그간의 관계를 무시하고 단번에 등을 돌려 버린 몇몇 귀족들과는 다르게, 여러분들이 있어 아직 동북쪽 일대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합니다.”
“크흠.”
“본론부터 말씀하시지요.”
자리에 참석한 귀족들.
그들은 칭찬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드미트리와의 관계가 좋지 않기에 만남을 허락했을 뿐이지, 이게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를 알았다.
바르코 자작이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족 가문 간의 싸움에는 명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언제 외세의 침략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단순히 욕심이 생긴다고 해서 주변 영지를 공격하는 것은 엄연히 귀족 세계의 룰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바르코는 정당한 명분으로 로렌스를 공격했습니다. 선조의 대가를 치르기 위함이었고, 중앙 정부는 우리의 명분이 옳다는 판단에 심판관까지 내려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는 아무런 명분이 없는데도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그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바르코는 플레어를 잃었고, 나아가 대전사 전투에서 로렌스의 전사가 단 한 명도 나서지 않는 만행을 경험했습니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귀족들에게 공감을 요구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강조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로렌스를 도와준단 말입니까? 두 가문이 혈연의 관계를 맺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로렌스는 플로라 로렌스의 책임으로 파혼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로렌스에게 남일 뿐이고, 그가 도와줄 명분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선을 넘은 행동입니다. 우리 또한 주변의 도움을 받을 세력이 많았는데도 끝까지 바르코의 힘으로 싸운 것은 귀족으로서의 선을 지키기 위함이었고, 그렇기에 우리는 패배의 참담함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맞습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는 명분이 없습니다.”
다들 동조했다.
애초에 틀린 말이 아니었다.
명분이 없는 개입은 처벌받아 마땅하고, 이것은 충분히 공론화시킬 여지가 있는 문제였다.
‘이로 인해 드미트리 가문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책임을 물어 그들에게 거액의 배상은 요구할 수 있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드미트리 가문의 재력이라면, 골든 뱅크에서 빌린 돈을 해결할 수 있다.’
골든 뱅크.
당장 급한 문제였다.
용병 길드와의 논쟁은 말로써 해결할 수 있지만, 골든 뱅크는 원금 회수에 대해서는 철저한 집단이다.
만약.
바르코가 원금을 갚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바르코 가문을 뼈대까지 잘근잘근 짓밟아 버릴 것이다.
한 귀족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의견이 모였다.
싫은 내색을 보이던 귀족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바르코 자작은 의도가 통했음을 알았다.
일단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부터.
바르코 자작은 주변의 공감을 끌어내, 드미트리를 압박할 수 있을 만큼의 목소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일단…….”
그때였다.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바르코 자작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병사를 바라보자, 병사가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로, 로만 드미트리. 그가 자작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패배의 원흉.
그런데 그가 바르코 가문을 찾아온 것은, 자신을 죽여 달라고 사지(死地)에 발을 들인 것과 같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회의실에 모인 귀족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들 여기에 모여 계셨군요.”
로만이었다.
로만은 안절부절못하는 병사들의 제재를 무시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회의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바르코 자작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로만을 죽일까?
어차피 벼랑 끝이다.
로만을 죽여서라도 복수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명분을 들먹이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분노의 대상이 앞에 있는데도 참아야만 하는 상황.
바르코 자작이 들끓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어느새 안까지 들어온 로만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착.
누가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로만은 바르코 자작의 맞은편에 앉아,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다리를 꼬았다.
“저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다고 들었습니다.”
슥.
로만이 입가를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바르코 자작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 직접 말씀해 보십시오. 바르코가, 무슨 명분으로 이러한 자리를 만들었는지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