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615)

53화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 (3)

로만이 제시한 선택지.

둘 다 악수(惡手)였다.

바르코 자작은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로만은 도망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는 분명히 두 개의 선택지를 제시했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전자를 택하지 않는다면, 저는 가문으로 돌아가는 대로 아버지에게 협박을 당했던 일을 고할 것입니다. 그때는 드미트리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안토니 바르코의 만행은 충분한 명분을 부여했고, 바르코가 확실하게 참회하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물러날 생각이 없습니다.”

퇴로를 막았다.

시간을 끌 수 없도록 확고하게 내뱉는 발언에, 바르코 자작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해 버리고 싶었다.

‘후자는 절대 선택할 수 없다.’

드미트리와의 전쟁.

승패는 뻔했다.

골든 뱅크에서 돈을 빌리면서까지 치른 전쟁에서도 패배했는데, 동북쪽 일대의 대부호인 드미트리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할 터.

그렇지 않아도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에 드미트리의 공격까지 받는다면, 바르코는 멸문의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로만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나마 바르코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을 말했다.

‘네놈이 원하는 것은 드미트리가 바르코를 무릎 꿇렸다는 사실이겠지. 당당하게 바르코의 안방에 찾아와, 바르코의 장남인 안토니 바르코를 처벌한다면 그건 귀족 사회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터. 바르코 가문은 전쟁에서의 패배와 바닥에 떨어진 평판으로, 다시 재기할 방법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겠지.’

참담했다.

바르코의 마지막 연줄들이 보는 앞에서.

로만은 바르코 가문을 조롱하고 숨통을 끊으려고 했다.

‘잔인한 녀석.’

할복자살(割腹自殺).

로만이 칼자루를 내밀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스스로 패배의 책임을 물어, 장남을 강제로 끌고 와 바르코 가문의 벌을 대신 받으라 강요했다.

입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동북쪽 일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던 바르코 자작이기에, 새파랗게 어린 로만 드미트리에게 머리를 숙일 수가 없었다.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르코 가문의 멸문을 각오하고, 겁도 없이 바르코 가문의 안방을 찾아온 로만을 보란 듯이 처형하는 것.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더 살아가고 싶기에.

생명에 대한 바르코 자작의 강한 욕구가, 결국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수긍하고 말았다.

“안토니 바르코의 일은 가문의 문제로 번질 사안이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안토니 바르코에게 말해 직접 사죄하도록 하겠다. 이제 되었느냐? 내가 직접 바르코 가문 장남의 무릎을 꿇리는 것으로, 너의 분노가 해소되었느냔 말이다!”

악에 받쳐 소리쳤다.

회생의 기회는 사라졌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바르코 자작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처절하게 말했다.

그런데.

“제가 언제 안토니 바르코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지?”

“처벌을 받길 바란다면 그 방식은 제가 선택합니다. 세상에 그 누가 가해자에게 처벌의 방식을 선택하라고 말하겠습니까?”

로만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바르코 자작을 벼랑 끝에 몰고도.

로만은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저는 안토니 바르코와의 심판 결투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심판 결투.

그 단어에, 바르코 자작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심판 결투는 절대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다.

공개적인 처형(處刑).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생과 사의 갈림길에 몰아넣어, 피와 죽음으로써 본인의 죄를 속죄하는 방식이다.

안토니 바르코가 심판 결투를 치른다면.

로만을 상대로 살아남을 확률은 희박했다.

‘설마 내가 보는 앞에서 바르코의 장남을 죽이겠다는 뜻인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간 로만 또한 살아남을 수 없다.

로만은 단순하게 안토니 바르코가 무릎을 꿇는 정도로는 용서할 수 없다는 의사를 드러냈고, 심판 결투를 수락할 경우 불구가 될 각오는 해야 할지도 모른다.

참으로 잔인한 녀석이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고개를 숙였는데도, 로만은 바르코가 실질적으로 ‘죄의 대가’를 받기를 바랐다.

현기증이 일었다.

로만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바르코 가문의 명운을 걸 것이냐, 아니면 아들을 버릴 것이냐.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아무리 안토니 바르코가 바르코의 대를 이을 장남이라지만, 그의 팔을 한 짝 내주는 대가로 드미트리와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래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로렌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 대가로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에서, 바르코의 장남을 사지로 몰아넣는 선택은 목에 박힌 가시처럼 쉽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바르코 자작은 한참이나 고민한 끝에, 로만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아직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아들에게, 그의 미래를 말해 주었다.

“아, 아버지!”

“미안하다.”

“절대, 절대 안 됩니다! 로만 드미트리는 호메로스를 상대로도 승리한 검사이지 않습니까? 정녕 바르코 가문 장자의 목숨을 타인의 손아귀에 맡기실 생각입니까? 제발 로만 드미트리의 제안을 거절해 주십시오. 그 녀석은 절대 저를 살려 주지 않을 겁니다.”

안토니 바르코가 무릎을 꿇었다.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펑펑 울며, 바르코 자작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는 처절하게 빌었다.

그도 알았다.

심판 결투에서 살아남을지라도, 온전한 육체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나름 의젓하게 자라났다고 생각했던 바르코의 장남이, 3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현실을 외면했다.

그 모습에.

바르코 자작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너는 바르코의 장남이다. 바르코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너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너는 가문의 명운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설령 그것이 네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로만은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너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왔겠지. 그러니 현실을 받아들여라. 강해져라.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훗날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치욕을 절대 잊지 말아라.”

“아버지, 제발……!”

“안토니!”

바르코 자작은 단호했다.

그제야 안토니 바르코는 깨달았다.

심판 결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안토니 바르코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이시여.’

지금부터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로만이 제발 손속에 자비를 베풀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자리가 정리되었다.

안토니 바르코.

그가 바르코 자작, 그리고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심판대에 올랐다.

덜덜덜.

그의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얼마나 떠는지 검이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사실상 결투의 의미는 없었다.

로만은 호메로스를 쓰러트리면서 압도적인 실력을 증명해 냈고, 오라도 사용할 줄 모르는 안토니 바르코가 결투에서 승리해서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로만을 쓰러트리겠다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인정에 호소하는 것뿐이었다.

“로, 로만. 너에게 한 행동들은 정말 미안해.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플로라 로렌스를 너무 많이 흠모하고 있었고, 그런 여자가 너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잠시 이성을 잃어버렸어.”

간절한 목소리였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는,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시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우린 친구잖아. 비록 로렌스의 일로 틀어졌다고는 하지만, 너와 나는 제법 좋은 시간을 같이 보냈잖아. 로만. 아니, 로만님.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진짜 이번 한 번만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 준다면, 이 안토니 바르코가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구차했다.

바르코의 장남이 보여서는 안 될 태도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귀족들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힐끗 바르코 자작의 표정을 확인했다.

분노로 달아오른 자작의 얼굴.

아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그것을 지켜보는 상황에, 그는 이 순간을 각인시키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평생 은혜를 갚겠다라.”

로만이 말을 늘어트렸다.

천천히 안토니 바르코를 향해 걸어가자, 안토니 바르코는 화들짝 놀라면서 검을 몸에 바짝 붙였다.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불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로만이 말했다.

“대체 네 녀석 따위가 어떤 방법으로 내게 은혜를 갚는다는 거지? 바르코 가문은 완전히 끝났어. 그 잘난 중앙 정부의 인맥도 너희들이 저지른 만행을 수습하지 못할 테고, 골든 뱅크에서 빌린 돈을 갚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지. 그런데 나는 대체 왜 너를 용서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무시를 하고, 비열한 계획으로 나를 함정에 빠트렸던 너를.”

순간.

바르코 자작은 이상함을 느꼈다.

머릿속에 울리는 강한 경고음.

그가 다급하게 결투를 말리려는 순간, 로만은 바르코 자작에게 시선을 주며 검을 휘둘렀다.

“그래, 용서할 이유가 없어.”

서걱!

바람이 불었다.

칼끝에 걸리는 감각.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에, 바르코 자작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한때.

백중혁은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방법은 없었다.

매일 밤 암살을 시도하는 형들의 위협을 버텨 냈고, 오히려 그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숨통을 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중혁의 손에 하나씩 정리되어 가는 상황에, 마교의 후계자로 유력한 장남이 이런 말을 했었다.

“중혁아. 너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타협이 없다는 것이다. 상대를 적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와의 관계를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파국으로 몰아가지. 그것이 언젠가는 너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너보다 약한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궁지에 몰리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건만, 너는 상대에게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게, 너의 치명적인 문제점이다.”

장남 백호열.

그는 강자였다.

단순히 대단한 무력을 보유했다는 것을 떠나, 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던 적들을 하나씩 쓰러트리면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을 보였다.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었다.

백중혁으로서도 백호열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한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로.

백중혁은, 백호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형님의 말대로 타협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적의를 보인 존재라면, 저는 그 존재를 완벽하게 짓밟아 버리는 것이 제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 방식에 토를 달지 마십시오. 저는 마교의 밑바닥에서부터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정점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적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면 그 업보는 반드시 돌아오기에, 백호열과 같은 지도자들은 항상 포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이 무조건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백호열의 적이었던 사람들은, 백호열의 편으로 돌아서면서부터 든든한 우군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백중혁의 방식은 달랐다.

적은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죽음만이 변수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백중혁은 공포를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바르코.

그들은 자신을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비를 베푼다고 할지라도 언제고 복수할 존재라면, 로만으로서는 그를 살려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서걱!

“……커억.”

안토니 바르코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만을 바라보며, 양손으로는 황급히 분수처럼 뿜어지는 피를 막았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축 늘어졌다.

안토니 바르코의 죽음.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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