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시작했다면 끝을 봐야 한다 (4)
뚝뚝.
검날을 타고 피가 떨어져 내렸다.
충격적인 표정으로 넋을 잃은 귀족들의 시선에, 오열하며 뛰쳐나가는 바르코 자작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안 돼에에!”
와락.
황급히 안토니 바르코의 시체를 끌어안았다.
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이 피로 더럽혀졌고, 바르코 자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아들의 육신이건만, 힘없이 떨어지는 팔을 보면서 바르코 자작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아아!”
아들의 죽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설마 바르코의 안방에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들을 죽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지금 뭣들 하느냐?! 감히 바르코의 장자를 죽인 이 악귀 녀석을 당장 죽여라!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란 말이다!”
바르코 자작이 괴성을 질러 댔다.
핏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발악하는 그 모습에, 바르코의 기사들은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전장에서 로만을 목격했었다.
바르코의 후방을 공격해 십수 명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베르게와 호메로스를 일격에 죽여 버린 로만을 향해 섣불리 달려들 자신이 없었다.
누가 되었든 간에. 가장 먼저 달려든 사람은 죽을 것이 뻔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고, 안토니 바르코가 죽어 버린 충격적인 상황에도 그들의 충성심은 공포를 억누르지 못했다.
촥.
로만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리고는 검을 회수하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선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심판 결투에서 죄인이 죽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일 텐데.”
바르코 자작은 착각했다.
로만은 심판 결투를 제안하면서, 단 한 번도 안토니 바르코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함정이었다.
로만은 바르코를 방문하면서 호위를 단 한 명도 대동하지 않았다.
바르코 자작으로서는 로만이 홀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안토니 바르코를 심판대에 올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로 인해 로만은 명분을 얻었다.
바르코 자작이 직접 처벌할 기회를 넘겨주었기에, 안토니 바르코를 죽인다고 해서 그것의 책임은 로만에게 있지 않았다.
마땅한 벌을 내렸을 뿐.
로만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명심하십시오. 안토니 바르코가 저를 협박했던 그 날부터, 저는 바르코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속이 옹졸하고 당했던 것을 갚아 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어서, 그때부터 바르코 가문을 어떻게 무너트릴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결과입니다. 만약 아직도 바르코와의 실낱같은 인연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들이 어떤 사람을 상대하게 될지 똑똑히 보십시오.”
사람들은 말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크리스도 그러한 이유로 로만을 만류했고, 과거에 백호열도 백중혁의 극단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그러나.
만약 물리는 것이 무서워서 쥐를 살려 준다면, 쥐는 패거리를 몰고 와 고양이를 공격하거나 쥐구멍에서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래서 로만은 상대에게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살점이 뜯겨 나가고 피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죽일 때 죽이는 것이 백중혁의 방식이었다.
바르코 자작이 눈을 치켜떴다.
복수에 타오르는 눈길로, 로만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네 녀석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새삼스럽게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로렌스의 편에서 전쟁에 가담한 순간부터, 바르코와 저는 서로의 목숨을 탐하는 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바르코 자작님, 당신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앞으로 바르코 가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켜볼 것이고, 바르코가 완전히 무너지도록 끝까지 공격할 생각입니다.”
경고였다.
상황을 지켜보는 귀족들.
그들에게 바르코를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를 보여 주었다.
자신의 의지.
드미트리가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바르코와의 연대 세력을 똑같이 공격하겠다는 의미였다.
로만의 경고에.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카이로의 귀족들은 입을 다물었고, 바르코의 기사들은 검을 잡는 시늉만 할 뿐 달려들진 않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걸음을 돌렸다.
정문을 통해 혼자 걸어왔던 것처럼.
로만이 걸어가는 길에 따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로만의 앞길을 막아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절규하는 바르코 자작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로만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르코.
그들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바르코 자작은 어떻게든 복수하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했다.
“미안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바르코를 도와 드미트리에 대항할 자신이 없다네. 그동안 우리의 관계가 좋았다는 것은 인정하나, 바르코는 너무 위험한 적을 건드리고 말았어.”
선을 그었다.
로만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바르코의 안방에 찾아가, 바르코 자작이 보는 앞에서 안토니 바르코를 죽여 버렸다.
그것은 애매한 적대 관계에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는 행동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단순하게 로렌스의 일에 개입한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복수를 주도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
게다가 명분도 확실했다.
안토니 바르코의 협박.
추행.
그리고, 심판 결투를 허락한 바르코 자작의 판단까지.
바르코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귀족들은, 로만의 행동에 명분이 있었다고 말하는 증인이 되었다.
외통수였다.
바르코로서는 외부의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었다.
아들이 살해당했는데도 명분을 빼앗겨 버렸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도움을 요청해도 받아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건 중앙 정부의 인맥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바르코 가문의 출신인데도, 그는 오히려 이번 일로 본인의 사정이 난처해졌다고 난색을 보였다.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다.
로만의 판단은 옳았다.
궁지에 몰린 쥐를 완전히 짓밟아 버리자, 바르코 자작으로서는 위기를 넘길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금과 이자를 갚겠다고 약속하신 시간이 딱 3일이 남았습니다. 만약 그때까지 갚지 않는다면, 골든 뱅크로서는 채권자(債權者)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르코 자작님. 3일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우리에게 빌린 원금과 이자를 갚으십시오.”
최후통첩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금과 이자를 회수하기로 유명한 골든 뱅크의 악명에, 바르코 자작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렌스의 땅을 노린 탐욕이 부른 참사였다. 절망적인 현실에, 그는 결국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며칠 뒤.
바르코 자작은 야반도주를 시도했다.
최소한의 짐과 재산을 챙겨 도망쳤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 모를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한때 동북쪽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던 바르코 가문.
그들이 허무하게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 * *
달이 밝은 밤이었다.
달빛에 비추는 한 사내의 모습에, 마침 복도에 나와 있었던 한스가 물었다.
“야밤에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우뚝.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로만은 고개를 돌리더니, 한스를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다.
“달빛이 밝더구나. 오랜만에 산책을 다녀왔다.”
“그렇습니까?”
한스가 싱긋 웃었다.
그는 로만에게 다가가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로만의 옷에 묻은 붉은 얼룩을 닦아 주었다.
“요새 다들 걱정이 많습니다. 도련님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기쁜 일이나, 전쟁과 같은 위험한 일을 하고 계시니 저 또한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입니다. 언젠가는 이 땅의 주인이 되실 분이니만큼, 도련님의 목숨은 온전히 도련님의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항상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저는 항상 도련님의 뒤에서, 도련님을 위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슥슥.
한스는 얼룩을 꼼꼼하게 닦았다.
얼룩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돼서야, 한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한 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로만은 빤히 내려다보았다.
“한스.”
“말씀하십시오.”
“내가 전에 말했었지. 너는 내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로만은 처음으로 ‘한스’라는 사람을 받아들였다.
그건 특별한 관계를 의미했다.
천마 백중혁.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적을 도륙했고, 적의 피로만 대해(大海)를 이룰 정도로 살육에 찌들어 살았다.
그건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적이라면 철저하게 짓밟는 백중혁의 행태에 사람들은 그를 극악무도한 마인이라 불렀지만, 오히려 백중혁의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왜일까.
백중혁은 하나의 원칙을 우선으로 두었다.
적어도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수백, 수천의 적보다.
울타리 안에 있는 한 명이 중요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바르코라는 위협을 계속 내버려 두었다면, 언젠가는 울타리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나 또한, 나의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바르코.
그들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았다.
망자(亡者)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기에.
로만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걸음을 돌려서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끼익.
쿵.
로만이 사라진 문을.
한스는 제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 * *
카이로의 수도.
카이로스(Kairos).
왕국 전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그곳에, 믿을 수 없는 소식 하나가 도착했다.
“……이게 사실이라고?”
“예! 처음에는 저도 믿지 못했는데, 대전사 전투를 치르는 자리이니만큼 호메로스를 쓰러트리는 것을 목격한 증인이 많습니다. 정말 대박이지 않습니까? 로만 드미트리라는 녀석은 랭커에 이름을 올리기는커녕,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4성의 검사를 일격에 쓰러트렸습니다!”
“흐음.”
신도의 호들갑에, 발할라 신전 카이로 지부를 관리하는 사제 윌라스가 미간을 좁혔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데.’
호메로스.
49위의 랭커.
발할라 신전이 최근 주시하고 있는 신성인데, 뜬금없이 무명(無名)의 인물에게 죽임을 당했다.
문제는 상대의 정체였다.
카이로 왕국 동북쪽 일대는 굳이 살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변방이고, 그곳에 호메로스를 쓰러트릴 만큼의 걸출한 인물이 있다고는 들어 보지 못했다.
대체 로만 드미트리가 누구란 말인가. 이름이 조금이라도 알려져 있었다면, 그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윌라스가 말했다.
“확실한 건 로만 드미트리의 나이가 겨우 25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야. 만약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카이로 왕국에 전례가 없는 천재가 탄생했다는 의미겠지. 일단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아무리 거짓일 확률이 높다지만, 진실일 때의 파급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발할라 신전.
그들은 발할라 제국의 소속이다.
보통은 ‘랭킹전’을 통해 랭킹을 관리하지만, 이와 같은 사안에는 인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흥미가 돌았다.
과연.
변방에서 흘러나온 헛소문일지.
아니면, 정말 괴물 같은 천재가 탄생한 것인지.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당장 짐을 챙겨라.”
“알겠습니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카이로 왕국 동북쪽에서부터, 대륙에 큰 변화를 일으킬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날카로운 송곳이, 조금씩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