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615)

55화 만인의 남자 (1)

아직은 바르코 가문의 이슈로 떠들썩할 무렵.

리한나 드미트리는 오랜만에 사교 모임에 나갔다.

“어머, 오셨어요?”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의 등장에, 미리 삼삼오오 모여 있었던 동북쪽 일대 사모님들이 모두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모임.

주최자는 멜로크 가문의 헬레나였다.

원래부터 친(親) 드미트리의 사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바르코 가문이 무너지면서 드미트리의 주가가 상승하자 재빠르게 모임 일정을 잡았다.

그것은 일종의 과시였다.

앞으로 동북쪽 일대는 드미트리를 중심으로 득세하리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엉덩이가 무거운 사모님들이 대거로 움직였다.

그런데.

기존의 멤버가 아닌 새로운 얼굴들의 모습도 보였다.

드미트리보다는 친 바르코였던 사모님들이, 가식적인 웃음을 보이면서 리한나의 등장을 반겼다.

“어쩜, 날이 갈수록 예뻐지시는 것 같아요.”

“리한나, 당신을 위해 특제 와인을 준비했어요. 제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즐겨 주세요.”

의도가 뻔히 보였다.

바르코의 몰락.

끈 떨어진 귀족 가문의 사모님들은, 어떻게든 드미트리에 붙기 위해서 이번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 같이 멜로크 가문의 헬레나를 찾아가서 친분을 쌓았고,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리한나 드미트리를 만날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이 상황.

리한나는 미리 언질을 받았다.

낯간지러운 대화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고마워요.”

싱긋.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의 환대와 선물을 받았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드미트리 가문은 로메로 남작의 재력(財力)이 현재의 위치까지 끌어올렸다고 생각하나, 그 이면에는 리한나 드미트리의 헌신이 있었다.

리한나는 동북쪽 일대의 사모님들을 끌어들여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다.

그건 로메로 남작으로는 할 수 없는 정치 능력이었고, 리한나와 평소 어울리던 사모님들이 친 드미트리를 형성했다.

만약 그런 방법으로 미리 판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바르코 가문의 견제로 드미트리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드미트리의 사모님.

그녀는 이번 모임의 주최를 유도했으며, 자연스럽게 드미트리의 달라진 위상을 작은 사회로 증명했다.

“다들 이렇게 모임에 참석해 주셔서 고마워요. 우리가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최소한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물론 지금까지 우리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갔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상황이 달라진 만큼, 달라진 현실에 대한 변화는 필요하겠죠.”

언중유골(言中有骨).

말에 뼈가 있었다.

리한나는 바르코의 편이었던 사람들을 은근히 건드리며, 동시에 그녀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아량도 보였다.

이로써.

모임이 끝난 사모님들은 가문으로 돌아가, 드미트리에게 잘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소하지만 매우 큰 차이였다.

리한나가 바르코의 사모님들을 불러들인 것이, 협력의 여지를 보여 준 것이, 나중에 큰 결과로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리한나는 그간의 경험으로 너무나도 잘 알았다.

드미트리 가문은 이러한 리한나의 내조로 동북쪽 일대의 강자가 되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사모님들이 모여 한가롭게 하하호호 떠드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이로 인해 드미트리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다과를 즐겼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차를 홀짝이던 사모님들은, 어느새 하나의 관심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리한나, 우리 베로니카를 어떻게 생각해요? 로만의 짝으로 참 어울릴 것 같은데.”

헬레나의 말.

순간, 사모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략결혼.

귀족의 세계에서는 참으로 흔한 일이다.

그런데 그 정략결혼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바로 사모님들의 모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먼저 정략결혼의 운을 띄운 헬레나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로만의 나이도 어느덧 스물다섯이에요. 앞으로의 창창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얼른 현명한 아내를 맞이해서 가정을 꾸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건 내 딸을 칭찬하는 말이라서 낯부끄럽기는 하지만, 우리 베로니카 정도면 로만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괜한 주책인가, 호호호.”

헬레나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싸늘해졌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로만 드미트리는 귀족 세계의 계륵(鷄肋)이었다.

드미트리 가문이라서 참 탐이 나는데, 가문을 이어받지 못할 장자라는 사실이 발목을 붙잡았다.

그때.

분명히 헬레나는 이렇게 말했다.

“베로니카는 아직 너무 어려서 로만의 짝으로는 부족해요. 조금 더 크면, 그때 생각해 봐요.”

친 드미트리인 그녀도.

로만과의 정략결혼을 꺼렸다.

그래 놓고는 차남과의 혼사를 은근히 거론했을 정도로, 로만을 반기는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헬레나와 비슷한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이, 헬레나의 발언에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에이, 베로니카와 로만은 조금 그렇지 않나. 베로니카는 얼마 전만 하더라도 다른 가문의 후계자와 정략결혼이 오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헬레나, 욕심은 알겠는데 로만은 너무 과해요.”

사모님 1.

예전에 리한나 앞에서 로만의 흉을 보다가 호되게 혼이 났었던 인물이었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불리는 행보에 속이 상하지 않냐고까지 물었던 그녀가, 지금은 로만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맞아요. 리한나, 로만의 결혼은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어요. 선택지를 제한하지 말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보는 것이 좋겠죠. 그런 의미로 나중에 우리 가문에 한번 방문해 줘요. 사실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건데, 우리 아이가 로만을 한눈에 보고 반했다고 했었거든요.”

사모님 2.

그녀도 로만이라면 학을 떼던 사람이었다.

과거의 행동은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듯이, 그녀는 금지옥엽의 딸을 로만의 배우자로 선뜻 추천했다.

난리가 났다.

헬레나가 불을 붙인 싸움.

사교 모임에 참석한 사모님들은, 너도나도 로만에 대한 욕심을 보였다. 그건 딸을 가진 부모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딸이 없다면, 사촌의 관계를 들먹이면서까지 로만을 탐냈다.

참 재밌는 광경이었다.

바르코의 사건.

그로 인해, 로만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상승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만은 호메로스를 쓰러트리면서 4성 검사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것은 탄탄대로의 미래를 의미하며, 만약에 드미트리 가문마저 물려받는다면 이만한 사윗감이 없었다.

계륵에서 만인(萬人)의 남자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로렌스와의 파혼이 큰 오점으로 남았지만, 지금은 로만의 가능성에 그만한 오점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로렌스가 로만을 낚아채지 못해서, 정말 다행이라고들 생각했다.

탁.

“다들 제 아들을 좋게 생각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리한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지금의 분위기.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로만은 얼마 전에 큰 아픔을 겪었어요. 로렌스 가문과 혼인을 약속했지만, 좋지 않은 이유로 파혼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경험한 로만에게 똑같은 고통은 선사하지 말자고요. 그러니까 제게 정략결혼을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저는 로만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리고 상대 또한 로만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길 바라요. 제가 로만의 배우자로서 바라는 건 그뿐이에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정략결혼은 없다고.

문제는.

그 발언이, 오히려 사모님들의 경쟁심에 불을 붙였다.

‘그 말인즉, 조건과는 상관없이 로만을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거지?’

만인의 남자.

로만을 향한 욕심에, 귀족 사모님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 * *

전쟁이 끝나고.

플로라는 방에 틀어박혔다.

다행히도 로렌스는 멸문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전장에서 경험한 일들은 그녀를 충격에 빠트렸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해.’

로렌스와 바르코.

사실상 로렌스가 패배한 싸움이다.

로렌스는 바르코가 준비한 플레어도, 호메로스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책에서 읽은 지식으로는 겨울까지 버틴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지만, 막상 들이닥친 현실에서 로렌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때의 무력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개미 떼처럼 밀려드는 적군의 모습을 바라보며, 플로라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로만은 달랐다.

일개 개인의 힘이, 바르코를 무너트리고 패색이 짙은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해 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대단했다.

단순히 개인의 무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로만은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바르코의 후방을 공격하는 대담함을 보였으며, 49위의 랭커인 호메로스의 이름을 듣고도 본인이 상대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경이로울 정도의 용기였다.

그것은 힘이 있는 자의 자신감이었고, 그때만큼은 로만이라는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한때.

자신이 꿈꾸던 이상형이 있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그 상상 속의 존재가, 어느 순간부터는 로만과 조금씩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절레절레.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로만이라는 사람 자체는 싫었다.

굉장히 이기적이고 본인의 실리만을 챙기는 사람이, 자신의 이상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어떻게 그리 강할 수 있는지.

로만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문제는 파혼하면서 이미 끊어져 버린 관계였고, 플로라로서는 로만을 다시 만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내 현실에 집중하자.’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도 강해지고 싶었다.

로만처럼.

어떤 상황에서든 문제를 해결할 힘을 바랐다.

그렇기에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도 방에만 틀어박혔고, 그녀의 근처에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책이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미로에 빠진 기분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잠시 바깥 공기를 쐬려고 나온 그녀는, 의외의 방문객을 발견했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실비아……?”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늘하늘 기른 하늘색의 머리칼에, 전형적인 미인의 이목구비를 한 여성.

사촌 동생인 실비아였다.

‘얘가 여기는 웬일이지?’

의외였다.

실비아의 아버지는 로렌스 자작의 동생이었는데, 자작의 작위를 형에게 양보한 그는 상인으로서 수도에서 자리를 잡았다.

어린 시절을 수도에서 보냈기 때문일까. 실비아는 고향인 로렌스로 내려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플로라와 마찬가지로 로렌스의 핏줄을 물려받아 예쁘장한 외모를 지녔지만, 신경질적이고 까탈스러운 면모에 로렌스의 마녀라고도 불렸다.

그런 그녀가.

로렌스에 나타나다니.

실비아가 로렌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알기에, 플로라로서는 그녀의 등장이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렌스에는 무슨 일로 왔어? 그리고…….”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다.

예뻤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평범한 목적으로 방문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복장은 또 뭐고.”

“무슨 일이긴요. 이번에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을 위해서 성대한 파티를 연다면서요. 큰아버지가 예쁜 제가 그 자리를 빛내야 한다고 연락해 주셔서, 한달음에 달려왔죠. 그런데 언니. 로만 드미트리가 그렇게 대단하고 멋진 사내예요? 다들 얼마나 자랑하던지, 궁금해 죽겠다니까요.”

실비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자신의 외모를 뽐내듯 앙탈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플로라는 순간 심기가 살짝 불편해졌다.

“……드미트리의 장남을 위한 파티라고?”

작은 소식이 아니다.

자신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실비아까지 로렌스로 찾아올 정도라면, 자신도 지금쯤 파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난 왜 처음 듣는 말이지?’

드미트리의 파티.

플로라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