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615)

56화 만인의 남자 (2)

사람 마음은 참 간사했다.

만약에.

드미트리에서 파티가 열린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았다면, 플로라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만에 대한 호기심은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 당장은 나약하기만 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며칠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살았다.

게다가.

실비아는 이런 말도 했다.

“……언니, 혹시 파티가 열린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요? 어머머, 큰아버지가 파혼 문제도 있고 해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나 보다. 이번 파티는 드미트리가 아니라 ‘로렌스’에서 주최하는 파티예요. 로만 드미트리 덕분에 로렌스가 큰 위기를 넘겼으니, 큰아버지는 은인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서 파티를 계획하셨거든요. 그 과정에서 저를 초대했고요. 언니랑 같이 파티 갈 생각에 기뻤는데, 이러면 혼자 가야겠네요.”

속을 박박 긁는 발언이었다.

파티에 관심이 없는데도.

애초에 참가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괜히 화가 났다.

특히나 평소 자신에게 자격지심이 있었던 실비아의 발언에, 플로라는 그 화살을 아버지에게 돌렸다.

‘겨우 그런 이유로 내게 말하지 않은 건가?’

파혼 문제.

껄끄러운 사실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로만 드미트리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파티라면, 로렌스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본인도 참석해야 맞는 일이다.

애초에 로만을 끌어들인 것은 자신의 판단이지 않은가.

플로라는 실비아가 보는 앞에서는 애써 웃음을 보였지만, 대화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 드미트리에서 파티가 열린다면서요. 제게는 왜 말하지 않았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그랬는지.

아버지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로렌스 자작은, 플로라를 바라보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플로라. 이번 일로 이 아비는 깨달은 것이 정말 많단다. 그래서 앞으로는, 네가 싫어하는 일들은 절대 강요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건 참.

당혹스러운 대답이었다.

바르코와의 전쟁.

로렌스 자작으로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사건이었다.

특히 플로라의 각성은 충격적이었다.

아직은 온실 속의 화초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는 가문의 위기에 본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플로라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아비의 식견이 부족해서 딸의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플로라가 파혼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선택이었어. 플로라는 누군가의 여자로 남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어.’

끝까지 싸우는 딸을 바라보며.

로렌스 자작은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정말 못났다.

딸이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면서, 가문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라니.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딸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했기에.

앞으로의 삶은 후회를 남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딸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이 아비는 그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는 재능을 목격했단다. 아비로서가 아니라, 그때의 너는 정말로 멋있었다. 아무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 정확히 가려내는 판단력을 보여 주었고, 로만 드미트리를 전장으로 끌어들인 덕분에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단다. 그러니 앞으로는 네 꿈을 위해 살아라. 나는 너의 가치를 땅바닥에 떨어트렸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고,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감동적인 발언이었다.

로렌스 자작은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플로라를 바라보며, 그녀를 위한 다짐을 말했다.

문제는.

플로라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파티에 참석하고 싶은데.’

자신을 대신해 실비아가 간단다.

그게 싫었다.

실비아는 여우다.

그녀가 로만을 유혹하겠다고 아양을 떠는 장면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괜히 심술이 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자신도 로만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보고 싶었다.

로만은 마법 통신으로 말하는 과정에서, 안토니 바르코의 사건에서 플로라를 ‘자신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의외였다.

항상 차갑고 실리적인 판단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기에.

자신의 사람을 건드린 안토니 바르코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모습이, 로만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자책하는 시간은 끝났다.

지금은 로만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플로라는 평소와 다르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도 모르는 파티에 실비아는 왜 초대한 거예요?”

“그건 내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란다.”

“욕심이라면…… 설마.”

로렌스 자작이 멋쩍게 웃었다.

딸의 앞날에는 손을 뗐다.

앞으로는 플로라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배려할 생각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로만에 대한 욕심이 들끓었다.

‘정말 탐이 나는 사내야.’

이번 전쟁.

로만의 행보는 경이로울 정도였다.

바르코의 후방을 공격해서 전쟁의 분위기를 바꾸는 과감한 판단에, 호메로스를 쓰러트리면서 4성 검사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최근에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만인의 남자라고 불렀다.

동북쪽 일대에 있는 모든 사람이 탐을 내는 남자였고, 그건 로렌스 자작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플로라를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궁리한 끝에, 실비아라는 아주 훌륭한 대체자를 떠올렸다.

“크흠.”

로렌스 자작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그의 반응에, 플로라가 말했다.

“알겠어요. 그런 이유라면, 제가 실비아를 따라가서 안내하는 역할을 맡을게요. 그래도 로만 드미트리에게 은혜를 갚는 자리인데, 과거의 일에 얽매여서 제가 참석하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괜찮다. 굳이 네가 나설 필요는 없단다. 딸아. 나는 앞으로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로만 드미트리와 엮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라.”

끝까지 만류하는 로렌스 자작.

어쩜 이리 청개구리 같을까.

아주 잠깐이지만, 아버지의 머리를 콱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플로라였다.

결과적으로 플로라는 파티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녀의 고집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완강한 태도에 참석을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드미트리로부터 초대장이 하나 날아왔다.

[우리가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관계가 나빠졌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드미트리는 지난날을 잊고 새로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로만 드미트리를 위한 파티에, 로렌스의 꽃이 자리를 빛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로메로 남작.

그는 대인배였다.

플로라 로렌스의 행동은 드미트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는 로렌스가 파티를 주최함으로써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자 기꺼이 받아 주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로렌스로서는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바르코가 무너지면서 드미트리의 독주 체제가 예견되는 가운데, 만약 드미트리가 과거의 일을 빌미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로렌스의 미래는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플로라가 먼저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로렌스 자작은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그날 오후.

플로라와 실비아, 그리고 다른 귀족 가문의 여식들은 같이 드미트리를 방문했다.

파티는 저녁에 예정되어 있으나 일부러 일찍 방문했다.

그건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플로라를 제외하고는 다들 로만을 낚아채겠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보니, 사전에 드미트리가 어떤 땅인지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여기가 드미트리구나.”

“소문처럼 칙칙하기는 하네요.”

중심지를 걸으며.

귀족 가문의 여식들은 살짝 못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실비아가 유독 심했다.

미관이라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드미트리의 모습에, 그녀는 표정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드미트리의 주인이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건 알겠네요. 대체 이런 동네에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 수도에서는 귀족이 아닌 평민들도 기본적인 미관에 신경을 쓰는데,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칙칙하네요. 누가 대장장이의 땅이 아니랄까 봐, 일부러 시위라도 하는 건가.”

불만은 계속되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만 파티장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녀들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어머.”

“저게 바로 광부들인가?”

저 멀리.

일련의 무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막 작업을 끝냈는지 흙먼지투성이였고, 얼굴도 새카매서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을 보이던 여식들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광부들이 근처에 다가오면서 흙먼지를 풍기자, 몇몇 여식들은 손가락으로 코를 막으면서 꺼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에이, 예쁜 드레스 더러워지겠다.”

“드미트리는 이래서 문제라니까. 광산의 인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다니.”

이중적인 태도였다.

동북쪽 일대의 귀족들.

그들은 드미트리의 힘은 인정했다.

하지만 드미트리가 평민 출신의 가문임을 알기에, 태생적으로 자신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플로라의 반응은 달랐다.

한때는 그녀도 드미트리에 대한 편견으로 혼인을 망설였지만, 로만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섣불렀는지를 깨달았다.

이제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플로라는 광부를 보고도 다른 사람들처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광산의 광부가 드미트리의 원천임을 알기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광부들의 모습을 살펴보던 그녀는, 별안간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광부 중 한 명의 얼굴을 확인했다.

‘설마.’

분명했다.

익숙한 얼굴.

광부 중 한 명은, 바로 로만 드미트리였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대체 왜 광산의 광부들과 같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나타난단 말인가.

허름한 옷.

흙먼지로 더럽혀진 피부.

하지만 머리에 눌러쓴 안전모 아래로 보이는 얼굴만큼은, 자신이 기억하는 로만 드미트리와 같았다.

그때였다.

한 중년 사내가, 헐레벌떡 로만에게 달려갔다.

“도련님!”

한스였다.

한스는 로만의 상태를 살피더니, 호들갑을 떨며 손수건으로 로만의 몸을 이리저리 닦았다.

“광산에 가신 것까지는 제가 말릴 수 없지만, 그래도 몸 좀 살피면서 일하면 어디 덧이라도 난답니까? 저번에도 말씀드렸죠. 도련님은 도련님만의 몸이 아니라고. 그런데 매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나타나니, 이 한스의 마음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이 땟국물 좀 보십시오. 손수건으로 조금만 닦았는데도, 손수건이 새카매지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면 됐다.”

“아니요! 안 됐습니다!”

한스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일까.

실비아를 비롯한 귀족 여식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드미트리의 도련님.

나머지 아들들이 드미트리를 떠난 지금, 한스가 칭하는 도련님의 정체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

순간, 귀족 여식들의 시선이 로만을 향했다.

‘저 사람이 바로 로만 드미트리란 말이지?’

그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포착한 하이에나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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