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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7/615)

57화 만인의 남자 (3)

실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만 드미트리라니.

의외의 장소에 나타난 자신의 먹잇감(?)에, 그녀는 빠르게 로만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오호.’

일단 얼굴.

생각보다 잘생겼다.

광산의 흙먼지로 엉망인 상태인데도, 굵직한 선과 날카로운 눈빛은 남자다운 냄새를 물씬 풍겼다.

실비아의 감탄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참이나 얼굴을 요목조목 따져 보던 시선이 몸으로 내려가는 순간, 허름한 옷 사이로 드러나는 로만의 몸매에 순간 감탄사가 나왔다.

“와우.”

대박이었다.

잘 깎아 낸 조각상처럼.

로만의 몸매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옷을 입고 있어서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힐끗힐끗 드러나는 매끈한 근육은 옷 안에 얼마나 대단한 것이 들어 있는지 보여 주었다.

사실 드미트리에 도착한 뒤로 약간 후회했었다.

큰아버지의 부탁으로 오랜만에 로렌스로 오긴 했는데, 로만이 기대한 것만큼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타(?)는 되어 주길 빌었다.

로만의 외모가 못 봐 줄 정도만 아니라면, 로만이 갖춘 조건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이자 4성 검사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신성. 세간의 소문으로는 차남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빼앗길 확률이 높다는 말이 있지만, 오늘 보니 그건 또 아닌 것 같네. 대체 어느 귀족 가문이 아들에게 광부 일을 시키겠어. 이건 분명히 후계자 수업 명목으로 로메로 남작이 지시한 것일 테고, 최근의 행보로 로만의 위상이 급등했다는 의미겠지.’

합격.

로렌스까지 내려올 가치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분석을 끝낸 실비아는, 다른 귀족 여식들을 부추겼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가 봐요. 파티 전에, 인사라도 하면 좋잖아요.”

“그럴까요?”

다들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들 또한.

실비아와 목적이 같았다.

가문으로부터 로만을 쟁취하라는 특명을 받았고, 그녀들은 서로의 등을 떠밀며 로만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로만 드미트리 님 맞으시죠?”

인상을 찌푸리던 여성들은 그곳에 없었다.

흙먼지가 눈앞에 날리든, 드레스가 더러워지든 상관하지 않고, 로만에게 봄날 같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로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빤히 쳐다만 보는 모습에, 실비아가 말했다.

“저는 로렌스 가문의 실비아라고 해요. 이번에 저희 가문을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로만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로렌스 가문은 바르코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소문처럼 정말 멋있으시네요. 드미트리 가문에 영웅이 탄생했다는 말이 있던데, 외모만 봐도 그 이유를 알겠어요.”

그녀는 여우였다.

구김 없는 표정으로 살랑살랑 말하며, 자신의 외모를 어떻게 해야 어필하는지를 잘 아는 듯했다.

문제는.

상대가 로만 드미트리라는 것이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툭 내뱉는 말.

그건 대화를 하겠다는 대답이 아니었다.

마치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이.

로만은 실비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한스를 대동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순간.

“푸흡.”

먼발치에 있던 플로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로만은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만 까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녀는 실비아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위로를 해 주었다.

한스가 잔걸음으로 로만을 따라갔다.

“도련님. 그래도 파티에 참석하실 분들인데, 조금 상냥하게 대해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벌써부터 그들을 위해 웃고 싶지 않았다.”

“어휴.”

한숨이 나오는 대답이었다.

로만이 조금만 상냥했더라면.

아마도 방금의 대화로 많은 아군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호감을 받기엔 글렀다고 생각했다.

한스가 말했다.

“그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광산 일은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영주님이 특별히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닌데도, 벌써 며칠째 사서 고생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최근.

로만의 행보에 말이 많았다.

특히 로메로 남작과 리한나는 로만의 건강을 걱정했고, 한스가 그들을 대신해서 이유를 물었다.

로만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스와 나란히 걸으며, 자신이 광산을 찾은 이유를 말해 주었다.

“내가 빈민가에서 야장을 만났던 날을 기억하느냐?”

“당연히 기억합니다.”

잊을 수가 없었다.

로만이 변하기 시작한 날이었고, 워낙 임팩트가 강하다 보니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구십 해를 살았다는 그 야장은 내게 드미트리의 역사를 말해 주었다. 드미트리는 본래 평민 가문이었으나,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철제들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그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미트리의 근본은 대장간에 있으니, 나 또한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새로운 삶.

로만은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울타리에 새로운 인연들을 들였고,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이 조금씩은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드미트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후계의 문제가 아니다.

마교의 밑바닥에서 올라갔던 것처럼, 드미트리의 밑바닥에서부터 이 터전의 숨결을 느끼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철광산을 찾았다.

사람들은 대장간이 드미트리의 근본이라 생각하지만, 로만은 철광산의 광부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굳이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다.

홀로 철광산으로 찾아가 자신도 일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에야 로만의 의중을 의심하던 철광산의 마스터는, 이내 로만을 광부로 받아 주었다.

며칠 내내.

흙먼지가 가득한 지하에서 철광석을 캤다.

조금도 요령을 피우지 않고, 최대한 다른 광부들과 마찬가지로 할당된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드미트리의 근본은 대장간, 나아가 철광산에 있다.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 철광석을 캐고, 그것을 화덕의 불길로 철제를 만드는 것이 드미트리의 근본이지. 나는 그것을 같이 경험하며 공감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야 그들의 고충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뿐인 이해로는 이 땅의 사람들과 공존할 수 없다.”

“……도련님.”

한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 이렇게 성장하셨습니까.’

불쑥 성장해 버린 로만.

매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로만의 행보에, 한스는 로만의 하인이라는 사실이 진심으로 자랑스러웠다.

멀어지는 로만.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 그 차가움에도, 한스는 다급히 따라붙으며 외쳤다.

“앞으로 제가 아침저녁으로 도련님의 복장을 완벽하게 책임지겠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써도 좋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가 완벽하게 세탁해 드릴 테니까요! 이 한스, 도련님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한스는 로만의 그림자를 따라갔다.

로만이 도착한 곳은 훈련장이었다.

넓은 훈련장에.

수십의 사내들이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었다.

“하나.”

“하나!”

“둘.”

“둘!”

구령에 따라 검을 휘둘렀다.

크리스는 병사들의 앞을 거닐며 자세를 지적했고, 병사들은 그 말에 따라 자세를 고쳐 가며 검을 휘두르는 것에 집중했다.

이번 바르코와의 전쟁.

그때의 경험은 병사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 로만은 4성 검사 호메로스를, 크리스는 3성 검사 얀손을 쓰러트리지 않았던가.

인식이 바뀌었다.

그래도 변방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로만과 크리스가 이제는 예사 인물로 보이지가 않았다.

“크리스.”

“부르셨습니까.”

크리스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병사들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동작을 이어 갔고, 로만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훈련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주군이 알려 주신 훈련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들 열의가 대단하고 습득력이 빨라, 금방 발전한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로만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크리스를 통해 마교의 기본 수련법을 알려 주었다.

수라(修羅) 심법으로 기초적인 내공을 쌓고, 수라 검법으로 효율적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는 방법에 대해 알려 주었다.

사실 말이 기본이지, 이 세상에서는 보물이라고 할 만한 지식이었다.

로만은 자신을 따라 전쟁을 치른 병사들에게 보상을 내려 주었고, 그것이 바로 오러 검사로서의 가능성이었다.

잘만 따라온다면.

서른에 달하는 이 병사들은, 오라 검사의 길에 들어서는 기적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번 전쟁은 변수가 있었다.

플레어와 호메로스.

로만으로서는 알아낼 수 없는 정보였고, 정보의 부재로 인해 함정에 빠지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다행히도.

압도적인 무력은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전생의 경험이 말해 주었다.

‘나만의 정보 세력이 필요하다. 상대의 밑바닥까지 낱낱이 분석할 수 있는 그런 정보 세력이. 문제는 정보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재력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아직은 내게 그만한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내 위치와 상황을 최대한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광산행.

그것 또한 계획의 연장선이었다.

한스에게 말한 것처럼 드미트리의 밑바닥에서부터 경험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로만은 드미트리 가문의 장자로서 가문의 원천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드미트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 자신이 현재의 상태를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그것을 활용할 방법 또한 찾을 수 있다.

로만이라는 사람은.

그냥 움직이지 않았다.

확실한 목적이 있기에, 먼지를 뒤집어쓰는 상황에서도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고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만은 하나 더 할 일이 있었다.

“크리스, 지금부터 네게 새로운 검술을 알려 주마.”

로만의 말에.

크리스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내게도 검술을 알려 주겠다고?’

사실.

병사들에게 검법을 가르치며 크리스는 불만이 쌓였다.

로만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자신에게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모습에 로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수라 검법과 수라 심법을 배우기는 했다.

하지만 로만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공부만 할 뿐, 그것을 네 것으로 만들지는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로만은 크리스에게 이유를 말해 주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출발선이 달랐다.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너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은 상태였지. 그래서 사고(思考)의 유연성을 기르길 바랐다. 틀에 박힌 지식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따라 생각을 다르게 할 줄 아는 능력. 만약 네가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보여 주지 못했다면, 3성 검사와의 대결에서 너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얀손과의 대결.

시험이었다.

크리스를 테스트하기 위한 무대에서, 크리스는 자신의 한계를 이겨 내고 3성 검사의 목을 베었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가르칠 준비가 되었다.

말없이 바라보는 크리스에게.

열망으로 타오르는 그 눈빛을 바라보며, 로만은 그에게 은혜를 내려 주었다.

“지금부터 너에게 가르칠 검술의 이름은 섬전(閃電)이라고 한다.”

한때 무림을 호령했던 섬전검.

천하십대고수(天下十大高手)라 불렸던 그의 절기가, 크리스에게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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