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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615)

58화 만인의 남자 (4)

어느덧.

파티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로만의 모습은 낮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낮에는 광산에서의 일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파티 직전까지 크리스와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파티장에는 깔끔하고 예의를 갖춘 모습으로 나타났다.

모두가 기다리던 로만의 등장. 파티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로만의 모습에, 방금까지 떠들던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이 입장하십니다.”

로만.

그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인사를 했다.

까칠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 파티는 자신을 위해 주최된 것이기에, 로만은 파티의 주인공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러한 모습에.

낮에 퇴짜를 맞았던 귀족 여식들이 관심을 보였다.

“로만 님, 아까 낮에는 왜 그렇게 가셨어요? 파티 전에 대화를 조금 나누고 싶었는데.”

“일을 막 끝마친 상태라, 제 몰골이 허름해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었던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런 이유였구나.”

로만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까.

그때부터는, 로만이 무슨 말을 하든 다들 꺄르르 웃었다.

의도가 뻔했다.

어떻게든 로만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함이었고, 어느샌가 로만의 주변에는 여자들로 득실거렸다.

그중.

실비아의 존재감이 가장 도드라졌다.

“확실히 소문대로 참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요. 귀족 가문의 후계자이신 분이, 직접 광산의 인부들과 같이 일을 하다니. 저희 아버지도 항상 낮은 자세로 배움을 갈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로만 님처럼 실천으로 옮기기가 힘들었거든요. 만약 로만 님과 같은 분을 제 배우자로 맞이한다면, 평생의 반려자를 보고 배우면서 저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노골적인 말이었다.

주변에서 견제의 시선을 보냈지만, 실비아는 그런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예뻤다.

자신의 외모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이 외모에 먼저 대시하면 보통 상대 남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동북쪽 일대 제일의 미녀인 플로라 로렌스의 미모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로만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 방법은 먹혔을 것이다.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딱 그 정도.

로만은 웃음으로 대화를 끊었다.

친절하게 사방에서 밀려드는 질문을 받아 주면서도, 절대 남녀 이상의 거리는 허락해 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자들에게 한참이나 시달리던 로만은, 몰래 파티장을 빠져나와 숨을 돌렸다.

그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기 잘하시네요?”

곁으로 다가오는 목소리의 주인.

옆을 내려다보자, 익숙한 얼굴이 로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플로라 로렌스였다.

방금과 같은 친절함은 없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자리기에, 로만은 얼굴에 덮어 두었던 친절함을 내려놓고 차갑게 말했다.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의외네요. 당신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평소라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파티는 로렌스 가문이 저를 위해 주최한 것이고, 제 부모님과 그 손님들이 지켜보는 자리입니다. 평소의 행동과는 별개로,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한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의외라고 표현하기에는 당신을 처음 만날 때도 지금과 같았습니다.”

플로라를 처음 만날 때.

로만은 예복을 갖추어 입었다.

몸에 묻은 피 냄새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지독한 향수마저 뿌리고 나갔다.

로만은 그런 사람이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가도, 필요한 때는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였다.

플로라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랬었네요. 오히려 예의는 제가 없었죠.”

그녀의 기억에.

로만은 선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정략결혼을 한 사이에 끝까지 예의를 지켰고, 자신이 파혼을 통보하고도 간섭하는 발언을 내뱉자 그때부터는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잘못이었다.

로만은 파티장에서 보여 주는 모습처럼 적정선을 지키려고 했으나, 플로라가 그걸 짓밟아 둘의 관계를 망쳐 버렸다.

한결같은 사람.

그래서 더 궁금했다.

로만은 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자신만의 기준이 이리도 확고한 걸까.

“그런데 왜 광부들과 같이 일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그게 후계자 수업의 일환이라 생각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런 후계자 수업은 없다고 들었어요. 대장간이라면 몰라도, 드미트리 남작님이 아들을 광산으로 보낼 이유가 없잖아요.”

플로라의 질문.

평소라면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장에서 보여 주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로만은 한 번쯤은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은 로렌스가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합니까?”

“……예?”

“사람들은 흔히 로렌스가 비옥한 토지로부터 비롯되는 농작물로 부흥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와 다릅니다. 로렌스는 상업(商業)으로 성공한 가문입니다. 본인들이 보유한 농작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그것을 팔거나 물물교환을 해서 지금의 로렌스를 만들었습니다. 로렌스 자작님의 동생 또한, 그러한 재능을 살려서 수도에서 상인으로서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놀랐다.

로렌스의 근본.

그걸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실 플로라도 얼마 전만 하더라도, 비옥한 토지가 로렌스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저는 대장간이, 나아가 철광산이 드미트리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같이 철광산에 나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철광석을 캐는 광부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드미트리는 지금처럼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드미트리라는 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이 땅을 물려받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그것이 적어도 드미트리의 성을 가진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드미트리의 사람들과 같이 하나의 문제를 직면하는 상황이 온다면.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광산에서의 시간이,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로만의 음성은 확고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듯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모습에, 플로라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아.”

“시간이 지체됐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로만 드미트리.

플로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로만은, 만날 때마다 그녀를 생각의 늪에 빠트렸다.

최근에.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를 만인의 남자라고 불렀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평판은 수심 밑에 가라앉았고,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며 욕심을 보였다.

만약.

자신이 로만의 입장이었다면.

주변의 찬양을 받는 상황에서, 저런 생각을 가지고 광산에서 일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 못했을 거야.’

사람이란 그렇다.

달콤한 감언이설(甘言利說)은 뇌를 말랑말랑 녹아내리게 만들고, 아무리 부지런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을 즐기려 할 것이다.

특히 로만과 같은 만인의 남자라면. 여자들의 대시를 받아 주고 문란하게 논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걸 흠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로만은 달랐다.

승리에 취하지도, 그렇다고 현실을 즐기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곡괭이를 쥐고 광산으로 향했고,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축제를 즐길 때 전쟁의 주인공은 묵묵히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철광석을 캤다.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걸까.

플로라도 그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만을 마주하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존경스러웠다.

본받고 싶었다.

그가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로만이라는 사람 자체는 그녀의 이상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문득.

플로라는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네 꿈을 위해 살아라. 나는 너의 가치를 땅바닥에 떨어트렸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고,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로렌스 자작은.

플로라가 로렌스의 꽃으로서가 아니라.

플로라 로렌스로 살아가길 바랐다.

무엇이든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그 말이, 지금에 와서야 플로라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내 꿈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꿈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로만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이루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다.

‘강해지고 싶어. 다시는 다른 세력들이 로렌스의 영토를 넘볼 수 없도록. 타인에게 로렌스의 안전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강해져서 그러한 위험들을 이겨 내고 싶어. 그게, 내가 바라는 목표야.’

결단을 내렸다.

확고한 꿈.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방황했던 머릿속이, 마침내 맑아지며 모든 것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플로라는 자리를 떠났다.

더는 파티장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라는 존재가.

지금은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인데, 플로라는 로렌스를 떠나 수도로 향했다.

온실 속의 화초.

로렌스의 꽃이, 마침내 온실을 나와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 * *

시간이 흘렀다.

보름 뒤.

바르코 가문의 멸문이 이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어 갈 즈음에, 드미트리의 대장간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헨드릭! 헨드릭!”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같이 한잔이나 하자고 들렀지.”

왜소한 체격을 지닌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대장간을 나서는 헨드릭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술병에.

헨드릭이 군침을 흘렸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기에, 헨드릭은 황급히 테이블로 쓸 만한 나무둥치 위에 있는 물건들을 치웠다.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제이콥, 자네밖에 없다니깐.”

“그렇지?”

사내의 이름.

제이콥이었다.

광산의 일을 총괄하는 그는, 헨드릭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는 본인은 병째로 들이켰다.

“크으, 죽인다.”

“오늘 일은 어때?”

“평소와 똑같지. 이놈의 철광산은 아무리 캐내도 끝이 보이질 않아. 우리가 아직 산의 초입 부분만 개발해서 그렇지, 드미트리 가문은 대대로 수백 해를 보내도 철광산의 맥이 마를 일은 없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광부로 평생을 살아온 이 제이콥의 인생이 그걸 확신할 수 있어.”

헨드릭과 제이콥.

드미트리의 두 기둥은 지금과 같은 시간을 종종 보냈다.

매일같이 고된 업무를 처리하는 와중에, 잠깐 짬을 내서 술을 마시는 건 정말 단비와도 같았다.

얼마나 마셨을까.

헨드릭이 잔을 내려놓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로만 드미트리. 걔 상태는 어때? 한 보름 전만 하더라도 로만 드미트리가 철광산에서 일한다고 말이 많았는데, 요새는 조금 잠잠하네? 이제는 일을 그만두기라도 한 건가.”

“아, 로만?”

제이콥이 피식 웃었다.

그는 술을 한 번 더 들이키더니, 재밌다는 얼굴로 말했다.

“말도 마. 일을 그만두기는커녕 그동안 단 한 번도 일을 빠진 적이 없어. 처음에야 다들 로만 드미트리의 의중을 몰라서 그를 꺼렸지만, 지금은 로만을 싫어하는 광부는 없을걸?”

“정말?”

헨드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광부들은 대장장이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하다.

그런데 그런 외골수들이 로만을 좋아한다니.

“대체 철광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난 보름.

드미트리의 철광산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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