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615)

67화 로메로 남작의 고민 (4)

헨드릭을 기다리며.

로메로 남작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3년 전.

후계자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그래도 장남이지 않냐는 가신의 말에 헨드릭은 불같이 반응했다.

“장남이라는 사실이 가문의 미래를 땅바닥에 내던질 만큼 중요합니까? 예, 로만은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입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나가서 로만 드미트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열에 열은 모두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혀를 찹니다. 그런데도 로만이 드미트리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제발 다들 정신 좀 차리십시오!”

분노를 토해 냈다.

그리고.

그가,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발언을 내뱉었다.

“영주님. 드미트리의 근본은 대장간에 있습니다. 영주님을 따르는 대부분이 철광산과 대장간에서 일하는데, 차기 후계자라는 사람이 철을 아예 다룰 줄 모른다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로드웰 드미트리는 어렸을 때부터 대장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을 배웠습니다. 수도에 나가서도 본인의 재능을 증명한 걸출한 인재가 있는데, 로만 드미트리를 후계자로 내세우는 건 가문을 위험에 빠트리는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헨드릭이 총대를 멨다.

모두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부분.

장남을 후계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라는 발언에, 가신들도 너도나도 말을 덧붙이며 헨드릭을 지지했다.

그렇게.

로드웰 드미트리는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다.

로만은 그 사실도 모른 채, 계속 쓰레기같이 살면서 가신들에게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을 부여했다.

‘3년이 지난 지금, 로만은 달라졌다. 헨드릭과 같이 열변을 토해 내던 가신들도 로만의 후계자 가능성을 재고해 달라고 말했고, 철광산과 일반 영지민들의 민심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장간의 마스터인 헨드릭의 의견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의 말처럼 드미트리의 근본은 대장간에 있기에, 후계자로서의 본분에 소홀했던 로만을 무작정 지지해 줄 수는 없다.’

머리가 아팠다.

아들의 성장세.

차라리 조금만 빨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에 와서 후계 문제를 고민하려니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좋은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로만이 검사로서 성장해서 경악스러울 정도의 행보를 보여 주었다고는 하나, 헨드릭이 드미트리의 후계자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대장간의 일을 이해하고 있느냐였다.

그건 드미트리 가문의 기본적인 소양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가문을 맡으면 대장간의 일을 직접 관리해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을 헨드릭이 인정하고 명령을 따라 줄 리가 없었다.

헨드릭.

그는 대장간의 마스터이자, 로메로 남작의 동료였다.

만약 그런 사람이 반대한다면, 로메로 남작으로서도 후계 문제를 강행할 수 없었다.

‘아마도 헨드릭은 내 의견에 크게 반발하겠지. 그래도 물어볼 수밖에 없다. 대세가 로만을 원하기에, 헨드릭의 반대에 부닥친다면 그때 작금의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논의를 해야겠지.’

그건 추측이 아니었다.

강한 확신.

헨드릭을 오랜 시간 보아 왔기에,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는 당연히 찬성입니다. 로만 드미트리 도련님이라면, 후계자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막상 마주한 헨드릭은, 예상과는 다른 발언을 내뱉었다.

로메로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헨드릭이라면.

대장간의 마스터라면.

로만을 다시 후계자로 올리자는 발언에, 당연히 길길이 날뛰면서 분노를 토해 내는 것이 정상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제가 영주님을 상대로 어떻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한때는 로만 드미트리가 후계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최근에 바르코와의 전쟁에서 증명했듯, 로만은 우리가 보지 않는 곳에서 피와 땀을 흘려 가며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오라 검사로서 성장할 수 있었고, 스스로 철광산에서 일할 정도로 드미트리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로만을 옹호하는 헨드릭이라니.

아직도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헨드릭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사실 얼마 전에 로만과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로만이 사병들의 무장을 위해 의뢰를 넣었는데, 저는 로만에 대한 반감에 좋지 않은 물건들을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로만이 제게 뭐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이따위 물건들을 병사들의 무장으로 건네주는 당신의 행동은 살인과 다르지 않다며 저를 쏘아붙였습니다. 맞습니다. 장인 정신을 위배하는 행동이었지만, 그날 밤에 저는 찬찬히 로만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헨드릭은 로만의 진면목을 보았다.

과거의 기억은 미화되었고, 로만과의 불화조차도 제멋대로 좋은 기억(?)으로 해석했다.

“로만 도련님이 드미트리 가문에 어울리는 안목을 갖추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일반인의 눈으로는 물건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로만 도련님이 대장간에서 직접 작업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화덕의 불길 앞에서 뜨거운 열기를 맞이하면서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는데……. 하아, 그건 정말 같은 대장장이로서 반하지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한때는.

악연이라 불렀다.

그러나 로만에게 선물을 받은 그 순간부터, 헨드릭은 로만과의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헨드릭이 검을 건넸다.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검의 모습에, 로메로 남작은 의문스럽다는 눈빛을 보였다.

“이게 무엇이냐?”

“로만 도련님이 직접 제작한 검입니다. 영주님이라면 한 번에 알아보실 겁니다. 이 검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저도 처음에는 로만 도련님의 실력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오늘 작업하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게 진실임을 알았습니다.”

로메로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눈앞의 검.

명검이었다.

헨드릭과 마찬가지로 로메로 남작은 단번에 검의 진가를 알아보았고, 얼떨떨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무슨.”

대체.

로만이 어떻게 이런 검을 만들었단 말인가.

최근 로만의 행보에.

로메로 남작은 일말의 아쉬움이 있었다.

검사로서 쑥쑥 성장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가문의 본분에 소홀히 하는 모습은 한때 대장간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라면.

드미트리 가문의 장남이라면, 헨드릭이 강하게 주장했던 것처럼 최소한 대장간에 관심이라도 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헨드릭이 충격적인 진실을 보여 주었다.

이건 단순히 관심 정도의 결과물이 아니라, 로만이 차고 넘질 정도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다.

헨드릭이 말했다.

“드미트리의 근본은 대장간에 있습니다. 3년 전에 로드웰 도련님을 차기 후계자로 낙점하기는 했지만, 로만 도련님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지금, 결정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이 반전되었다.

근본을 운운하며 반대했던 헨드릭이.

상대를 설득하려던 로메로 남작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로메로 남작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이것 참.”

헛웃음이 나왔다.

헨드릭.

마스터 블랙스미스.

로메로 남작이 걱정하던 마지막 관문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개인 집무실.

헨드릭을 돌려보낸 로메로 남작은, 홀로 집무실에 남아 일 년 전에 받았던 편지를 읽었다.

[아버지. 로드웰입니다. 얼마 전에 카이로스 왕실 아카데미에서 S클래스로 승격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단순히 이론 수업만이 아니라, 실전에 나가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을 쌓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드미트리 가문이 변방에서 평화를 추구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제 꿈은 다릅니다. 카이로스 왕실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반드시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아버지를 찾아가 새로운 드미트리의 미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로드웰 드미트리.

둘째의 편지였다.

그는 드미트리의 돌연변이였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로메로 남작과는 다르게, 항상 최고이길 바라는 야심가의 성질을 타고났다.

그리고 실제로 결과도 만들어 냈다.

카이로스 왕실 아카데미는 카이로 왕국을 대표하는 최고 교육 기관이고, 그곳에서 제일 높은 클래스인 S클래스로 승격했다는 것은 로드웰 드미트리가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

한때는 이런 편지를 받으면 새로운 드미트리의 미래에 심장이 두근거렸었다.

자신이 잘 닦아 놓은 기반을 토대로 로드웰이 날개를 달길 바랐는데, 최근에는 로만의 성장에 마음이 복잡했다.

로만과 로드웰.

둘 다 뛰어난 인재다.

하지만.

최근의 행보를 보자면, 로만은 단순히 인재라고 표현할 만한 재능이 아니었다.

‘로만은 카이로 왕국이 아니라 대륙에서 명성을 떨칠 재능이다. 로드웰은 분명히 가문의 후계자로서 본분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사람들이 천재라고 불리는 로드웰조차도 현재의 로만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두 아들을 위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고민은 깊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민심이 로만을 원한다.

가문의 가신들도, 로만을 따르는 하인들도, 철광산과 대장간의 마스터도.

로만이 후계자가 되기를 바란다는데, 과거의 결정에 얽매여 로드웰을 끝까지 밀고 갈 수는 없었다.

고로.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다. 로드웰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로만이 국방의 의무를 모두 수행하고 나면 그때 본격적으로 후계자 경쟁을 선언할 것이다. 장남과 차남의 구분은 두지 않는다. 둘 중 누구든 드미트리를 이끌 자격을 보여 준다면, 나는 그를 가문의 후계자로 선정하고 지지할 것이다.’

드디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고민이 사라졌다.

로메로 남작은 이만 집무실을 나섰다.

정말 오랜만에, 리한나의 곁에서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지난 한 달.

발할라의 사제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진즉에 드미트리에 도착했어야 하는 윌라스는, 그와 전혀 반대되는 지역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사제님. 이번 랭킹전의 결과는 정말 충격적인 것 같습니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99위에 머물렀던 베르토프가, 30위의 수문장인 페르난도와의 랭킹전에서 승리하다니. 내년에 새로운 카이로 왕국의 랭킹 명단이 발표되면 다들 난리가 나겠네요. 베르토프는 아직 소속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사도의 말에, 윌라스가 덤덤하게 반응했다.

드미트리로 떠나려던 날.

그들은 공식적인 랭킹전 의뢰를 받았다.

99위의 베르토프가 페르난도에게 랭킹전을 신청했고, 페르난도는 망설임 없이 도전을 받아 주었다.

오랜만에.

공식 랭킹전이 성사되었다.

결과는 페르난도의 패배였고, 그로 인한 행정 처리로 윌라스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윌라스가 말했다.

“사실 페르난도의 패배는 애초에 예견되었던 일이야. 사람들은 페르난도를 30위의 수문장이라고 추앙하지만, 오래전에 4성 검사의 경지에 오르고도 페르난도는 단 한 번도 20위의 영역에 들어서지 못했어. 결국, 한계에 도달한 것일 테지. 그나저나 이번 랭킹전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어. 예정대로라면 벌써 드미트리에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로만 드미트리를 보고 싶으신 겁니까?”

“당연하지.”

윌라스가 무덤덤한 이유.

바로 로만 드미트리 때문이었다.

동북쪽 일대에서 계속 소문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바르코 가문이 멸망했고, 그 과정에서 호메로스를 쓰러트린 로만의 실력은 정말 진짜라고 말이다.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윌라스는 로만을 보고 싶었다.

‘상식적으로는 호메로스와의 대결에서 변수가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문제는 소문의 주인공인 로만 드미트리가 드미트리의 얼간이라 불릴 정도로 형편없는 인물이었다는 것. 대전사 전투의 소문이 과장되었다 한들, 분명히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릴 만한 변화가 있었다는 의미겠지.’

카이로에서의 생활.

참으로 무료했다.

발할라의 사제로서 윌라스는 파견 임무를 맡았고, 이제야 절반의 기간을 채운 그로서는 흥밋거리가 필요했다.

그러던 참에 로만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은 베르토프와 페르난도의 대결에 열광했지만, 윌라스는 왠지 모르게 동북쪽 일대의 진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랭킹전의 일을 전부 처리했으니.

이제는 드미트리로 떠날 차례였다.

“일단 드미트리로 가자고. 비공식적인 대결로 49위의 호메로스가 죽었으니, 로만 드미트리가 랭킹의 말석(末席)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며칠 뒤.

이동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 드미트리의 회색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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